공자 논어(論語) 이해와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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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2. 이해와 감상

참고 자료

본문내용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중국에도 계승되어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19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
보조 자료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서 479년에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대는 중국역사에서 늘 말하고 있는 춘추시대의 말기, 곧 하(夏), 은(殷), 주(周)나라의 순서로 이어온 세 왕조의 마지막 주왕실이 전혀 그 권위를 잃어, 열두 제후가 패권을 다투었다. 거기에 그 제후마저도 내부적으로 부패되어 내란이 자주 일어나 거의 무정부적 혼란 상태를 빚고 있었던 시대이다.
주왕조의 정치 조직은 제후를 그 밑에 두고 따르게 했던 봉건제도였다. 그러나 유력한 제후의 대부분은 주왕실과 동족이어서 같은 종묘에다 제사를 함께 지내는 종족 관계로서 주왕실에 달려 있었다. 거기에 씨족을 달리하는 제후국 이하와의 사이에도 사직을 받들어 모시는 일로 연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나라는 봉건국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종족국가라고 하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천자, 제후, 경(卿), 대부(大夫), 사(士), 백성이란 순서로 엄격하게 신분이 정해 있었다. 제사나 예법과 같은 것도 그 신분에 따라서 각각 그 규정이 있었으며 이를 문란케 하는 일은 국가의 질서나 도의를 어지럽히는 최대의 악덕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주공(周公)의 자손이 사는 나라로, 그 종묘에는 주공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주왕실의 중심 지역으로 정치와 도의의 수호신과 같은 성역으로 여기던 곳이었다. 공자는 이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주왕실의 모든 제도에 대하여 의혹을 품기는커녕, 이를 지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연구에 전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말기의 제후, 경, 대부의 하극상(下剋上)이나, 참언이나, 권력 다툼이나, 이기주의나 무력 항쟁 등에 대하여 깊은 우려와 노여움을 품고 있었으리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키워드

논어,   공자,   인간문제,   유학,   육예
  • 가격1,3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2.05.30
  • 저작시기2002.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5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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