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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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 논.

본 논.
Ⅰ 시조 개관
Ⅱ 명칭과 형식
Ⅲ 발생과 형성
Ⅳ 내용과 작가
Ⅴ 전문가객의 출현과 시조집편찬
Ⅵ 종류
Ⅶ 모체
Ⅷ 생성기
Ⅸ 시조의 변화와 발전
Ⅹ. 시조의 금후전망

결 논.

본문내용

이다.
Ⅸ. 時 調의 變 化와 發 展
시조의 변이
1) 사대부 시조의 재정비
조동일 「한국 문학 통사」제3권, 지식문학사 1933
① 고응척 (1531-1605)
<대학곡> 28수에서부터 연시조 지향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한권 대학책이 엇디 힝야 됴한 글고
② 장경세 (1547-1615)
<강호연군가>13수를 지난연군가의 선례와는 다르게 애절한 심정으로 탄식의 사설을
장황하게 표현함
③ 이신의 (1511-1627)
<사우가> 松, 菊, 梅, 竹을 차례로 읊어 일시적인 시련에 흔들리지 않는 의연하는 자
세를 보여주었다.
④ 조존성 (1533-1627)
<호아곡>4수로 전원생활의 흥취를 그렸다.
⑤ 박선강 (1555-1617)
훈민시조의 전통을 이어 <오륜가> 8수를 지었다.
임란이후, 사대부시조의 다양한 모습이 재현되며 조동일은 사대부시조가 재정비된다
고 본다.
2) 사대부 시조의 변이
① 김광욱 (1580-1656)
전원시조인 <율리유곡> 17수 사대부가 전원생활을 하면서 농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데에서 나오는 작품들.
뒷집의 술힝 힝니 거츤 보리 말 못 칭다
즈는 것 마고 힝허 쥐비저 괴아내니
여러날 주렷딪 입이니 딪나 힝나 어이리
② 이휘일 (1619-1672) <전가팔곡> 8수
새배빗 나쟈 나셔 白舌이 소링한다.
일러라 아힝들아 밧 보러 가쟈스라
밤싶이 이슬 긔운에 얼마나 기런다고 힝노라
③ 위백규 (1727-1798) <농가구장>
힝은 든다 대로 듯고 볏슨 힝대로 힝다.
쳬풍의 옷깃 열고 긴 파람 흘리 불제
어딪셔 길 가다 소님잎 아다딪시 머무는고
④ 안서우 (1664-1735)
먹거든 머지마나 멀거든 멀지마나
멀고 먹거든 말이나 힝련마는
입조차 벙어리 되지 말 못힝여 하노라
귀먹고 눈먼데다 벙어리 노릇까지 해야하니 견딜수 없다며 절제를 거부한다.
⑤ 신헌조 (1752-1809)의 <봉래악부>에 남긴 시조 25수를 보면 표현의 격조가 낮으며
사설시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조황 (1803-?)은 1847년 개인시조집 <삼죽시류>는
질이 양을 따르지 못한다고 한다.
위에서 나타나는 시조의 변이상을 볼 때 새로운 지도이념으로서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
였던 유학도들에 의해 창조된 시형인 시조가 조선 후기에 오면서 초기의 송축가, 절의가,
훈민사상등, 유교적인 충의사상이 변이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16,17세기의 임.병양난을 기점으로 그들의 사회체제가 유학도 자체내의 비판적 지성
에 의한 도전과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는 서민 의식에 의해 도전 받고 있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이런 도전과 실학 사상의 여파로 종래의 평시조 형태를 파괴시켜 사설시조의 등 장을 맞게 된다고 하겠다.
時調는 高麗後期에 發生하여 時間의 흐름에 따라 나날이 發展하여 온 지식인의 시가로 그 유행 시간의 장구함으로 보거나 作品의 양으로 보거나 內容이 廣範圍하고 다채로움으로 보거나 우리 시가문학의 代表的인 存在가 아닐수 없다.
時調가 이렇게 한문학자들에게 크게 流行한것은 첫째, 음악상에 있어 그 템포가 느린 것이 그들의 감저에 맞았던 것이니 그것은 中國 유학자들이 가요의 템포가 느린 것을 수련하다 하여 정중하게 여겼고 템포가 빠른 노래 즉 그들이 말하는 것은 경망하게 여겼기때문에 우리 유학자들도 시조의 그런 唱法에 好感을 가졌다.
둘째로 時調의 初章은 정서의 發端이 되고 중장은 888부분이 되며 終章은 結句가 되어 初 中 終 3장으로 일시적인 정서를 表現하기에 알맞았고 또 한문학자들은 한시의 절구에 젖은 사람들로 어떠한 시상이 머리속에서 스스로 절구 형식으로 표현 정리된다는데 절구의 기,승,전구를 時調의 初 中章에 담고 結句를 終章에 담을수 있는 것이 많으므로 결국 絶句의 詩想과 時調의 詩想이 비슷하므로 愛着을 느끼게 되었다.
셋째로 한시형에 토를 달고 일부 우리 말로 꾸미면 시조형이 되는 경우와 또 그 것을 평시조형으로 表現할수 없을때에는 엇시조나 辭設時調형으로 바꾸어 부를수 있기때문에 時調를 꾸미기가 안이 했다는 점 등으로써 歌訶想으로도 한문학자의 기호에 맞는 形式 이었기때문일것이다.
Ⅹ. 時調의 今後展望
時調도 唱이 주가 된 음악 본위의 시가로 발생했지만 後代로 내려오며 노랫말의 문학적인 면이 보다더 주요시되고 또 個人에 따라서는 唱보다 文學的인 目的에서 作品을 쓴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음악상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 최남선, 이병기등에 의하여 완전히 음악을 떠난 시조시가 시조시가 시도되어 행해지기 시작했다.
어떤이는 時調는 우리의 傳統的인 시형이므로 이것을 持續시켜 나아가야한다고 한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것은 그 集團이 그 價値를 느끼면 스스로 持續되는 것이고 價値를 느끼지 않게 되년 스스로 단절되는 것이지 누가 그것을 살리고 말것은 아니다.
따라서 음악을 떠난 시조시는 현대의 時調唱法으로는 부를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음악면을 開拓하지 않는 한 문학 본위의 주 詩인데 歌訶의 형식이란 音樂에 따라 일정한 形式이 要求되는 경우 외에는 사상이나 정서를 效率的으로 表現하기 위해서 그 형식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시조시형으로으로 表現하기에 적합한 것이면 시조시형을 취해도 좋을것이고 그렇지 못할때에는 자유시형을 취하면 되었지 굳이 시조시형을 살리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유시 시대에 있어 문학 본위로 형식상 제약을 받는 시조는 보다 더 발전해 나갈 길은 없으리라고 보아야할것이다.
結 論
조선후기 시조는 양란을 겪으면서 자아의 각성등으로 산문정신이 수용되고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 실학사상등의 영향으로 산문화가 보편성을 띤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후기 시조의 특징을 요약하면 시조의 변이와 사설시조의 성행, 향유층의 확대와 전문가객의 출현, 그리고 시조집의 편찬들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산문화 경향은 시조 향유층을 서민층까지 확대하는데 기여하였으나 시조문학이 쇠퇴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따라서 18세기 이후 시조 문학이 쇠퇴하면서 작가층의 중심이 전문가객으로 옮겨지면서 약화되기 시작하여 명맥을 유지하다가 이후 근대에 시조부흥운동으로 전승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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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7.13
  • 저작시기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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