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농민항쟁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조선후기 농민항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결론

본문내용

도록 하는 것이었으므로 향회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국가에 조세를 잘 내도록 독려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는 조세정책이 자주 바뀌었고, 이 때문에 향회에서 조세에 대한 거론을 자주 하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늘어나는 재정수요로 인해 규정도 없이 수시로 각종 잡세를 거두는 데 향회가 그 적절한 발판이 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향회 개최와 운영이 관에 의해 좌우되어갔다. 수령이 직접 연락을 취하거나 관의 행정기구로 전락한 향청에서 통문을 돌려 소집하였다. 그리고 수령이 개최하였기 때문에 수령이 직접 향회에 참여하여 목정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향회는 관에서 과외의 수취나 부정기적인 재정수요가 생겼을 때 이를 처리하는 방편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향회를 통해 조세가 번중해졌고 이런 측면에서 보면 향회는 조세 운영을 다룬다는 점은 고을정치에 참여하는 측면보다는 갖가지 재정 부담을 떠맡아 이를 해결하는 입장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향회의 본래 기능이라고 하면서 관에 이용되어 갔던 것이다. 조세결정 과정은 향회를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차츰 관에서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린 뒤에 그 결과를 향회에 통보하는 식으로 열리기도 하였다.
4.민회의 활동
1862년 농민항쟁 때 민들은 그 지역 내 민들의 의사를 넓게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없을 때 다른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즉 향회가 관에 장악되어 이른바 공론의 형성이라는 향회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향회가 부민이나 양반지주인 대민들의 이해를 우선시하여 항쟁을 주도하지 못할 경우, 민들은 향회와는 별도로 일시적으로 민들의 조직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조직은 각 면리별로 모인 민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민이 조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둘러싸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일 수 있었던 리회(里會)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러한 역할을 하였던 리회가 항쟁기에 민의 이해와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관에 저항하기 위해 민을 모으는 장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향회가 관에 장악되어 있거나, 대민들의 이해를 우선하여 항쟁을 주도하지 못할 경우, 민들은 민회라는 모임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민회는 각 면리에서 이루어지는 리회, 면회를 기반으로 하였다. 민회는 양반이 주도하는 향회가 그 지역에서 이른바 여론을 모아내었던 기존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조직되었다. 때문에 민회는 소빈농, 그리고 이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주도하였으며, 관과 밀착한 일부 부민이나 양반지주를 제외한 대소민이 참여하였다.
5.농민항쟁과 민회
이처럼 향회는 일반민이 참여할 수 있는 기구도 아니고 농민을 직접 대변하거나 농민을 위한 저항조직으로서의 발전 가능성도 없다고 보인다. 일반 농민을 대변할 수 있는 기구는 이들에게 권리를 주고 참여시켜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역할을 한 것으로 민회(民會)가 있다. 이러한 민회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면리단위에서는 농민들의 의사표현이 어느 정도 가능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점은 당시 조세가 총액제로 운영되었다는 점과 관계가 이
  • 가격2,0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1.08.25
  • 저작시기2011.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9744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