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십자군원정의 배경과 직접적인 원인
3. 십자군 원정의 과정
4. 십자군 원정의 결과와 유럽에 미친영향
5. 결론
2. 십자군원정의 배경과 직접적인 원인
3. 십자군 원정의 과정
4. 십자군 원정의 결과와 유럽에 미친영향
5. 결론
본문내용
이연구역, 집문당 1986, 419쪽. 안상길, 위의 논문, 46쪽 재인용.
11∼12세기에 걸쳐 이슬람 세계로부터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한 고대철학은 스콜라학자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스콜라 철학은 발전하고 체계를 갖추게 된다. 아벨라르(Peter Abelard, 1079∼1142)는 이 당시 스콜라 철학자들이 당면한 문제였던 신과 보편의 개념에 대해 변증법적 방법을 통한 해결방법을 제시하였다. 또한 스콜라 철학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 의해 더욱 발전하게 된다. 그는 그의 저서 '신학대전'에서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 민석홍, 위의 책, 280∼283쪽.
특히 이탈리아는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이슬람과 비잔틴 문화와 활발히 접촉함으로써 스콜라철학을 대표하는 학문을 발전시켜 서유럽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와는 달리 그들 나름의 독자적 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십자군이후 재개된 지중해 무역으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도시 시민층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잔틴과 이슬람문화권과의 접촉으로 인한 학문의 발달, 시민사회의 성장은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 민석홍, 위의 책, 336쪽.
또한 십자군 원정이 유럽의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 중의 하나는 서구의 역사문학의 발전에 뚜렷한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기 전 몇 세기 동안에 있어서 역사는 거의 전체가 연보, 연대기 등의 형식으로 쓰여졌으며. 그것의 관점이 편협했고 그것의 관심도 사실상 일반적으로 국부적이었다.
십자군 원정은 이러한 협소한 범위에 있는 유럽을 뒤흔들었다. 라틴어는 물론 모국어로 된 시문과 산문으로 쓰여진 연대기들, 목격담들, 나중에는 더욱 야심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서술은 갑자기 완전한 상태로 성장하지는 않았다. 역사적 감각의 결핍은 안티오크 점령 후에 예증되었는데, 그때는 진실하지는 않지만 과장된, 혹은 공상적이고 상상적인 글들이 기록되기 시작함으로써 진실된 역사가 완전히 잘못 전달되기도 하였다. 어떻든 스스로에만 의존했으면 협소한 관심에 의해 제한되었던 그 장벽들이 무너졌으며 유럽은 자각하기 시작했다. 즉, 유럽은 공통의 관심사와 공통의 적들을 갖게 되었으며 유럽제후들의 사소한 싸움들 너머에 이슬람 국가와 싸우고 있는 그리스도교 국가의 높은 이상에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한 동방과의 접촉으로 인해서 서방 작가들의 역사적인 범위는 놀랄만한 정도로 확대되었으며 전체적인 연대기 저술을 위한 자극이 주어졌고 그 시기는 무르익었다.
) J. W. THOMPSON, "라틴 역사가들과 십자군에 관한 역사서술," 서동진 역, 「서양중세 역사가와 역사서술사론」(중) 법문사 1983, 425∼427쪽.
이렇게 십자군 원정은 유럽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엄밀히 볼 때 이 기간의 문화의 발전을 십자군 원정의 영향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방 유럽세계가 봉건체제 하에서 안정을 되찾게 됨과 동시에 농업생산이 늘어나고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하여 사람들의 경제생황에 여유가 생기가 되자 학문과 예술 등 그들의 문화활동에도 새로운 활기와 새로운 면모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Ⅴ. 결 론
십자군 원정은 초기 성지탈환이라는 종교적 목적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점차 원정이 진행되면서 초기의 목적은 정치적·상업적 이해관계에 의해 변질되어 갔다. 결국 원정은 많은 재물과 인력만 낭비한 채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비록 초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십자군 원정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사회가 발전하는데 사회·경제·문화면 등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결국 십자군 원정은 그 성과보다는 오히려 그 영향이 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그것은 전성기에 접어든 유럽세계의 힘의 팽창을 표시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계속됨에 따라 점차 중세 유럽사회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십자군 원정 초기 성지를 회복하여 교황의 권위와 봉건기사들의 세력이 높아졌었다. 특히 교황의 권위는 십자군에 의해 더욱 올라가 13세기 초엽의 이노센트3세 때에 교황권은 그 절정에 도달했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성지회복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도 차츰 식어가고 교황의 권위도 실추되어 점차 쇠퇴되어 간다. 또한 성전의 실패는 이 원정에서 주동 역할을 맡았으며 가장 많은 희생을 치뤘던 기사계급의 몰락을 촉진하여 봉건제도 붕괴의 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요인은 왕권 강화의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교황권이 손상을 입고 그 이후 쇠퇴되어 가지만 반드시 십자군의 실패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왕권을 신장과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집권적인 통일국가형성의 추세가 교황권의 쇠퇴에 보다 더 크게 작용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겼던 지중해를 회복시키고 지중해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또한 이러한 무역의 활성화는 서유럽의 도시, 상공업의 발달과 이에 수반하여 화폐경제의 발달도 가져왔다. 사실 십자군 없이도 지중해무역은 점진적으로 발달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인이 완전한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였거나 장악한다 하더라도 실제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십자군에 의한 지중해 무역 활성화는 유럽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또한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고대 그리스 저서들이 이슬람교도로부터 유입되는 등 문화적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유럽 문화발달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이러한 문화적 접촉은 십자군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었겠지만, 십자군이 이를 크게 촉진시키고 시간을 단축시킨 점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이렇듯 십자군은 중세 유럽사회의 변화에 여러모로 꽤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 말 서유럽 사회의 여러 변화가 십자군으로 인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십자군의 영향이 대체로 그러한 변화를 한층 더 촉진시키는 작용을 한 것은 분명하다.
11∼12세기에 걸쳐 이슬람 세계로부터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한 고대철학은 스콜라학자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스콜라 철학은 발전하고 체계를 갖추게 된다. 아벨라르(Peter Abelard, 1079∼1142)는 이 당시 스콜라 철학자들이 당면한 문제였던 신과 보편의 개념에 대해 변증법적 방법을 통한 해결방법을 제시하였다. 또한 스콜라 철학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 의해 더욱 발전하게 된다. 그는 그의 저서 '신학대전'에서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 민석홍, 위의 책, 280∼283쪽.
특히 이탈리아는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이슬람과 비잔틴 문화와 활발히 접촉함으로써 스콜라철학을 대표하는 학문을 발전시켜 서유럽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와는 달리 그들 나름의 독자적 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십자군이후 재개된 지중해 무역으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도시 시민층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잔틴과 이슬람문화권과의 접촉으로 인한 학문의 발달, 시민사회의 성장은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 민석홍, 위의 책, 336쪽.
또한 십자군 원정이 유럽의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 중의 하나는 서구의 역사문학의 발전에 뚜렷한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기 전 몇 세기 동안에 있어서 역사는 거의 전체가 연보, 연대기 등의 형식으로 쓰여졌으며. 그것의 관점이 편협했고 그것의 관심도 사실상 일반적으로 국부적이었다.
십자군 원정은 이러한 협소한 범위에 있는 유럽을 뒤흔들었다. 라틴어는 물론 모국어로 된 시문과 산문으로 쓰여진 연대기들, 목격담들, 나중에는 더욱 야심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서술은 갑자기 완전한 상태로 성장하지는 않았다. 역사적 감각의 결핍은 안티오크 점령 후에 예증되었는데, 그때는 진실하지는 않지만 과장된, 혹은 공상적이고 상상적인 글들이 기록되기 시작함으로써 진실된 역사가 완전히 잘못 전달되기도 하였다. 어떻든 스스로에만 의존했으면 협소한 관심에 의해 제한되었던 그 장벽들이 무너졌으며 유럽은 자각하기 시작했다. 즉, 유럽은 공통의 관심사와 공통의 적들을 갖게 되었으며 유럽제후들의 사소한 싸움들 너머에 이슬람 국가와 싸우고 있는 그리스도교 국가의 높은 이상에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한 동방과의 접촉으로 인해서 서방 작가들의 역사적인 범위는 놀랄만한 정도로 확대되었으며 전체적인 연대기 저술을 위한 자극이 주어졌고 그 시기는 무르익었다.
) J. W. THOMPSON, "라틴 역사가들과 십자군에 관한 역사서술," 서동진 역, 「서양중세 역사가와 역사서술사론」(중) 법문사 1983, 425∼427쪽.
이렇게 십자군 원정은 유럽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엄밀히 볼 때 이 기간의 문화의 발전을 십자군 원정의 영향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방 유럽세계가 봉건체제 하에서 안정을 되찾게 됨과 동시에 농업생산이 늘어나고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하여 사람들의 경제생황에 여유가 생기가 되자 학문과 예술 등 그들의 문화활동에도 새로운 활기와 새로운 면모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Ⅴ. 결 론
십자군 원정은 초기 성지탈환이라는 종교적 목적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점차 원정이 진행되면서 초기의 목적은 정치적·상업적 이해관계에 의해 변질되어 갔다. 결국 원정은 많은 재물과 인력만 낭비한 채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비록 초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십자군 원정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사회가 발전하는데 사회·경제·문화면 등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결국 십자군 원정은 그 성과보다는 오히려 그 영향이 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그것은 전성기에 접어든 유럽세계의 힘의 팽창을 표시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계속됨에 따라 점차 중세 유럽사회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십자군 원정 초기 성지를 회복하여 교황의 권위와 봉건기사들의 세력이 높아졌었다. 특히 교황의 권위는 십자군에 의해 더욱 올라가 13세기 초엽의 이노센트3세 때에 교황권은 그 절정에 도달했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성지회복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도 차츰 식어가고 교황의 권위도 실추되어 점차 쇠퇴되어 간다. 또한 성전의 실패는 이 원정에서 주동 역할을 맡았으며 가장 많은 희생을 치뤘던 기사계급의 몰락을 촉진하여 봉건제도 붕괴의 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요인은 왕권 강화의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교황권이 손상을 입고 그 이후 쇠퇴되어 가지만 반드시 십자군의 실패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왕권을 신장과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집권적인 통일국가형성의 추세가 교황권의 쇠퇴에 보다 더 크게 작용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겼던 지중해를 회복시키고 지중해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또한 이러한 무역의 활성화는 서유럽의 도시, 상공업의 발달과 이에 수반하여 화폐경제의 발달도 가져왔다. 사실 십자군 없이도 지중해무역은 점진적으로 발달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인이 완전한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였거나 장악한다 하더라도 실제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십자군에 의한 지중해 무역 활성화는 유럽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또한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고대 그리스 저서들이 이슬람교도로부터 유입되는 등 문화적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유럽 문화발달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이러한 문화적 접촉은 십자군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었겠지만, 십자군이 이를 크게 촉진시키고 시간을 단축시킨 점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이렇듯 십자군은 중세 유럽사회의 변화에 여러모로 꽤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 말 서유럽 사회의 여러 변화가 십자군으로 인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십자군의 영향이 대체로 그러한 변화를 한층 더 촉진시키는 작용을 한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