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의 성 철학적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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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
(1) 주체의 분열 : 은유와 환유
(2)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3) 욕망의 공식 : 잉여 쾌락
(4) 응시와 시선

2. 영화에 나타나는 욕망이론
(1) 욕망의 모호한 대상
(2) 피아노
(3) 사이코
(4) 확대( Blow up)

3. 맺으며

본문내용

이 다. 토멕은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막다는 다시 토멕의 숭고한 사랑앞에서 새 롭게 눈을 뜬다. 좀처럼 형성되지 못하는 사랑의 정원, 두 주체의 숭고한 사랑이 교차하여 만들어지는 영역... 키쉴롭스키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영화 를 통해 사랑하지 못하는 비극과 사랑의 가능성 모두를 동시에 보여준다.
포르노피아의 성적 욕망
시각을 통해 얻어지는 성적 자극,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적인 호 기심,관음적 욕망은 대상에 대한 상호주체적 관심, 즉 사랑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단오날 널을 뛰며 담장 위로 살짝살짝 얼굴을 내보이는 처녀의 모 습에 동네총각들은 가슴앓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봉건사회의 인격의 총체라 할 수 있는 가문들이 만난다. 시각은 인식의 출발점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영화,TV,신문,잡지에 넘치는 대상화된 성적 이미지들은 하나의 가공현실을 구축 할 정도로 충분하다. 그 세계 속에서 모든 이성은 성적 욕망의 대상이다. 대상화 는 인격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육체조차 파편화한다. 대상화된 이성 전체의 이미 지가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위가 잘려진 채로 팔려나간다. 여기에 도덕 적인 억압이 덧씌워진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적 욕구를 무시하는 도덕은 폭력 이며 억압이다. 한쪽에서는 욕망을 부풀리며 또 한쪽에서는 그것을 억압한다. '리비도 불변의 법칙'에 따르면 억압되거나 연기된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내재된다. 부풀려지고 억압된 욕망은 도착적인 형태,즉 폭력으로 나타난 다. 어떻게 동방예의지국이 성폭력 발생율 세계 1위국이 될 수 있었을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증대된 욕망에 봉건적인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책이라는 것이 부풀려진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는 프리섹스인가? 요즈 음 황색언론을 필두로 하는 대중매체는 '최다섹스에 최대행복'이라는 슬로건을 외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부풀려진 허위에 삶을 구속시키는 사악한 이데올로기가 아닐 수 없다. 욕망은 허위이며 그것은 부추겨진 것이고 타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욕구와 구별된다. 사람은 먹어야 한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 무엇인가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욕구이다. 그러나 욕망은 "나물먹고 물마시니" 배고픈 욕구가 해소된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 것은 프랑스식 달팽이 요리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먹고나서도 완전히 충족되 지 않는다. 그것은 온 세계를 다 먹어치워도 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불가사리와 같은 것이다. 욕구는 충족되어야 하고 욕망은 그 실체를 물어야 한다. 르네 지라 르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된 것이다. 즉 우리는 우 리 자신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매개자의 욕망을 모방한다는 것이다. 예 를 들어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신의 욕망을 모방한다. 따라서 그의 행위는 숭고 해지며 욕망의 내용은 떳떳한 것이 된다. 반면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경쟁자 의 욕망을 모방한다. 이때 욕망은 맹목적으로 되며 따라서 욕망의 내용을 감추게 된다. 대중과 대중매체 사이에도 이런 모방이 존재한다. 대중매체는 대중이 무엇 을 욕망해야 할지를 가르친다. 반면에 대중매체는 자기의 존재 때문에 대중의 욕 망을 모방한다. 이 두 매개가 맞물리면서 서로 저급의 가치 평가를 내리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사랑에 관한 질문 - "교회는 어디에?"
비디오 가게에 가서 그야말로 '끝내주는' 포르노 테이프를 빌린다. 왜? 출구를 갖지 못한 성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자극으로 그것을 빌린다면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다. 그다지 건강한 방법은 아니지만 터질 듯이 부풀어오 른 욕망을 그런 대로 해소하여 사회적 갈등으로 돌출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 다. 한마디로 대리충족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에 관한 교육이 될 때 문제는 심 각하다. 사랑은 신비이다. 드러난 듯 감추어져 있는 구원이다. 인간의 가장 생물 학적이며, 1차원적인 욕구가 사랑이라는 영원한 신비와 결합된 것이 삶의 비밀이 며 인간의 신비이다. 우리는 그것을 섭리라고 고백한다. 신비가 사라진 사랑은 환멸이다. 토멕은 자신을 유혹하는 막다의 모습을 보고 생의 절망을 느낀다.그것 은 마치 아름다왔던 사람이 외투를 벗자 해골로 변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비가 환멸로 변한다. 사랑은 신비스러운 것이기에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은 사랑에 대한 호기심에 빠지기 쉽다. 포르노는 그들을 노린다. 그러나 거기에는 신비가 없다. 신비스러운 사랑에 대한 호기심과 철저하게 보여지기 위해서 행해 지는 성적인 행위가 만난다. 포르노는 그것을 보는 사람을 분명히 인식한다. "나 는 네가 보고싶어 하는 것을 알아, 바로 이런 거지? 이렇게 된 상태지? 이렇게 할테니 어서 봐, 즐겁지?" 포르노는 "즐겁지?"라고 묻는다. 그러한 물음이 환멸 을 보는 자의 것으로 돌린다. 이 충격은 삶에 대한 모멸로,대상화로,몰가치화로 전화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성적인 왜곡만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왜곡, 곧 황 폐화이다.
키쉴롭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영화는 십계명중 "간음하 지 말라"는 계명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간음을 피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간음하는 자들에 관한 것이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인과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 예수의 선언앞에서 결백을 주장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된다. 인간은 모두 죄에 물들어 있으며 기독교인도 예외 는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간음하는 자'라는 죄의 고백 속에서 오늘날의 성문화 에 대처해야 한다. 인간의 성욕을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되 그것이 철저히 상대적인 욕망임을 밝혀야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부풀려진 욕망의 허구 를 지적하고, 허구를 매개로 유지되는 우상숭배적인 사회체제에 대처하는 것이 다. 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한쪽으로 치우친 욕망의 출구를 다양하게 열어 전인 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일, 그것은 가능할까? 가능하다. 우리 스스로 간음하 는 자라 고백하고 교회 스스로 하나님의 다양한 은사 중에서 몇가지에만 집착해 왔음을 인정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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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29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9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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