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머리말
2.통일신라의 붕괴와 후삼국의 성립
1)통일신라의 붕괴
2)후삼국의 성립
3.왕건의 등장과 통일
4.왕건의 통일정책
5.맺음말
2.통일신라의 붕괴와 후삼국의 성립
1)통일신라의 붕괴
2)후삼국의 성립
3.왕건의 등장과 통일
4.왕건의 통일정책
5.맺음말
본문내용
온 내분이란 설도 있다.
그 해 유폐 당한지 3개월이 지난 뒤에 견훤은 李男 能又, 딸 哀福 그리고 애첩 등과 함께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로 달아나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태조 왕건은 견훤을 맞아들인 후 견훤을 尙父라 칭하고 남궁에 살게 하고 자리를 백관 위에 두었다. 또 楊州를 식읍으로, 금과 비단 그리고 노비 각 40인과 말10필을 하사하였다. 태조가 견훤을 이와 같이 각별히 우대한 것은 민심을 모으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후백제의 내부 분열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침내 태조 19년 6월 태조는 4만 3천의 병력으로 후백제에 진군했으며 고려의 군세가 우세함을 깨달은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후백제는 견훤이 완산에 도읍하고 개국한지 4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후삼국 시대는 막을 내리고 고려라는 새로운 통일왕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Ⅳ.王建의 統一 政策
이상으로 태조 왕건에 의한 후삼국 통일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서두에서 제시 됐던 '어떻게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울 수 있었는가?' 란 의문의 해답은 찾지 못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선 왕건의 통일 정책을 검토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는 고려 태조의 통일정책 중 간략하게 몇가지 만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人心收拾策이다. 태조는 후삼국의 분립에까지 이른 혼란의 근본원인은 민생의 파탄으로 인한 국가와 사회의 붕괴에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백성을 安集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곧 통일의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궁예나 견훤이 건국전후 잠시 인심수습을 위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인심수습책은 후삼국 통일에 이르기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둘째는 豪族聯合政策의 실시였다. 물론 호족과의 연합책을 왕건만이 시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후백제의 견훤이나 후 고구려의 궁예도 호족과의 연합정책을 모색했었다. 그것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 호족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은 왕건만큼 철저하게 호족들을 포섭하진 못했다.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딸과 혼인을 맺음으로써 세를 넓혀갈 수 있었다.
세 번째는 佛敎勢力에 대한 적극적인 포섭책을 들 수 있다. 三國時代 이래 불교가 지니는 중요성은 새삼스러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후삼국의 분립기를 통하여 불교계의 동향은 정치적·사회적 추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불교 자체가 轉換期라는 시대적 여건에 영향 받은 바 있지만, 후삼국 시기를 거치면서 불교계에 파문을 일으킨 것은 선종의 본격적인 수용과 발전이었다. 특히 선종은 기존의 교종이 지니는 권위에 도전하며, 새로이 홍기하는 호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처럼 불교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정치적·사회적 분립과 혼란에 짝하여 불교계가 크게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고려의 태조로서 새 왕조를 개창한 왕건은 그의 불교에 대한 깊은 信心을 바탕으로 불교세력의 포섭에 큰 힘을 기울였고, 그것이 통일 대업 성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Ⅴ. 맺음말
후삼국 분립기의 혼란 속에서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분열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그에 대한 적절한 정책을 펼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민생의 파탄과 국가적 통치력의 상실로 지방세력이 대두함으로써 야기된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대응하여 民心收拾策을 써서 民生의 안정도모를 꾀하는 동시에 실질적 지방세력의 근간인 호족들에 대하여 적극적인 포섭책을 썼다. 그리고 정신계를 지배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불교세력을 끌어들이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일련의 시책이 바탕이 되어 앞에서 말한 통일 전쟁을 포함한 可視的인 統一趨進政策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고려가 최후의 승자로 설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 해 유폐 당한지 3개월이 지난 뒤에 견훤은 李男 能又, 딸 哀福 그리고 애첩 등과 함께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로 달아나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태조 왕건은 견훤을 맞아들인 후 견훤을 尙父라 칭하고 남궁에 살게 하고 자리를 백관 위에 두었다. 또 楊州를 식읍으로, 금과 비단 그리고 노비 각 40인과 말10필을 하사하였다. 태조가 견훤을 이와 같이 각별히 우대한 것은 민심을 모으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후백제의 내부 분열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침내 태조 19년 6월 태조는 4만 3천의 병력으로 후백제에 진군했으며 고려의 군세가 우세함을 깨달은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후백제는 견훤이 완산에 도읍하고 개국한지 4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후삼국 시대는 막을 내리고 고려라는 새로운 통일왕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Ⅳ.王建의 統一 政策
이상으로 태조 왕건에 의한 후삼국 통일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서두에서 제시 됐던 '어떻게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울 수 있었는가?' 란 의문의 해답은 찾지 못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선 왕건의 통일 정책을 검토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는 고려 태조의 통일정책 중 간략하게 몇가지 만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人心收拾策이다. 태조는 후삼국의 분립에까지 이른 혼란의 근본원인은 민생의 파탄으로 인한 국가와 사회의 붕괴에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백성을 安集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곧 통일의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궁예나 견훤이 건국전후 잠시 인심수습을 위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인심수습책은 후삼국 통일에 이르기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둘째는 豪族聯合政策의 실시였다. 물론 호족과의 연합책을 왕건만이 시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후백제의 견훤이나 후 고구려의 궁예도 호족과의 연합정책을 모색했었다. 그것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 호족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은 왕건만큼 철저하게 호족들을 포섭하진 못했다.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딸과 혼인을 맺음으로써 세를 넓혀갈 수 있었다.
세 번째는 佛敎勢力에 대한 적극적인 포섭책을 들 수 있다. 三國時代 이래 불교가 지니는 중요성은 새삼스러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후삼국의 분립기를 통하여 불교계의 동향은 정치적·사회적 추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불교 자체가 轉換期라는 시대적 여건에 영향 받은 바 있지만, 후삼국 시기를 거치면서 불교계에 파문을 일으킨 것은 선종의 본격적인 수용과 발전이었다. 특히 선종은 기존의 교종이 지니는 권위에 도전하며, 새로이 홍기하는 호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처럼 불교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정치적·사회적 분립과 혼란에 짝하여 불교계가 크게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고려의 태조로서 새 왕조를 개창한 왕건은 그의 불교에 대한 깊은 信心을 바탕으로 불교세력의 포섭에 큰 힘을 기울였고, 그것이 통일 대업 성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Ⅴ. 맺음말
후삼국 분립기의 혼란 속에서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분열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그에 대한 적절한 정책을 펼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민생의 파탄과 국가적 통치력의 상실로 지방세력이 대두함으로써 야기된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대응하여 民心收拾策을 써서 民生의 안정도모를 꾀하는 동시에 실질적 지방세력의 근간인 호족들에 대하여 적극적인 포섭책을 썼다. 그리고 정신계를 지배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불교세력을 끌어들이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일련의 시책이 바탕이 되어 앞에서 말한 통일 전쟁을 포함한 可視的인 統一趨進政策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고려가 최후의 승자로 설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