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본문내용
릴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전경제학자들은 정부가 노동시간이나 임금등을 규제하는 것들은 자연법칙을 규제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위배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무익한 짓이고, 정부는 그저 평화를 유지하고 재산을 보호하고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경쟁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빈곤과 끝없는 착취로 고통받는 노동계급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의 잘못인 것처럼 말하고,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실제로 맬서스는 그의 저작인 《인구론》을 통해서 식량의 증가는 산술급수적이지만, 인구의 증가는 기하급수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연법칙에 따른 기근과 가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노동계급 스스로 도덕적인 자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출생을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학설들은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부자들을 기쁘게 하는 학설들이었다.
또한 우리가 정치경제학 교실을 통해서 접했던 시니어의 "마지막 노동시간이 이윤을 창출한다"라는 이론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의 요구를 부자들의 입장에서 방어하는 효과적인 무기로 작용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가난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자본가들에게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등의 요구를 걸고 싸웠습니다. 임금인상의 요구에 대항해 부자들은 '임금기금설'이라는 이론으로 맞섰습니다.
'임금기금설'은 아주 간단합니다. 노동자들이 나누어 갖는 임금기금은 일정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거나 노조를 만들고 가입하는 것은 순전히 미친짓이라고 말합니다. 일정한 임금기금을 나누어 갖는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몫을 크게하기 위해서는 나누는수 즉 노동자를 줄이던지 나누어지는 수 즉, 기금을 늘리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임금기금을 늘리기 위해서는 사업을 그냥 내버려두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설명합니다.
즉,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태동으로 인해서 소외받고 가난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돌리려는 이데올로기들이 지배이데올로기였던 것입니다.
제가 언급했던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배한다는 말을 다시한번 꺼내겠습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경제적인 하부구조가 방금 말했던 이데올로기들이 나올 수 있는 바탕과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상적인 세계를 꿈꿉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꿈꾼다면 아마도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이상향을 설계할 것입니다. 초기에 이런 이상향을 가진 사람들은 공상적인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지배계급들의 결단이나, 지배계급들의 지갑에 기대려 했습니다.
바로 이때에 마르크스가 등장했습니다. 그 역시도 사회주의자 였지만, 그는 이상향의 세계에 대한 어떠한 설계나 계획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살핌으로서, 미래사회를 위한 변화의 힘은 현재사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노동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맑스 경제이론의 근본적인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착취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이전의 사회처럼 착취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 노동자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맑스는 착취가 은폐되어있다고 말하고, 잉여가치설을 통해서 이를 밝혔습니다.
맑스는 일반재화와 상품을 구별했습니다. 재화는 직접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환을 위해서 생산될 때 상품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즉,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환 즉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상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상품들의 교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상품들의 유일한 공통점, 즉 사회적인 노동, 사회적 평균노동에 의해 교환의 비율이 정해진다고 말합니다.
맑스의 주장을 짧게 정리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팔기 위한 재화의 생산, 즉 상품생산과 관계가 있고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결정되며 노동자는 이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살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팔아야 하고 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총액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재화의 총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이 총액을 하루 노동 중 일부분만으로 생산해 낼 수 있고, 나머지 시간은 대가가 지급되지 않는 불불노동이며 이 불불노동에 의한 것이 잉여가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잉여가치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에게 돌아갑니다. 이런 잉여가치는 유산계급의 수입의 원천이 되고, 잉여가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착취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맑스는 이 사회가 파멸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왜냐면 노동의 결과인 생산은 갈수록 사회화되는 반면에 소유는 개인적이라는 것 때문에, 생산력의 자유로운 발전과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갈수록 파괴적인 체제의 고장인 공황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어 일아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맑스는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일으킬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하며, 그들이 자본주의 모순들로 가장 고통받고, 사유재산에 기반한 사회에 어떤 기반을 갖지 않고 있기에 그들이 변화을 일으킬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이 거대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더 넓은 시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식민지가 필요했습니다. 즉,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너 광범위한 착취가 일어나고 체제가 더 세계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화 된 체제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서로 공통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갖게 만듭니다. 즉, 맑스가 말했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선언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증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이 거대한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쉽게 붕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인 공황이나 전반적인 이윤율의 하락경향등의 모순들로 인해서 자동적으로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발제를 마치려고 합니다. 과연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태동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어떠한 사회일까?
고전경제학자들은 정부가 노동시간이나 임금등을 규제하는 것들은 자연법칙을 규제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위배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무익한 짓이고, 정부는 그저 평화를 유지하고 재산을 보호하고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경쟁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빈곤과 끝없는 착취로 고통받는 노동계급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의 잘못인 것처럼 말하고,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실제로 맬서스는 그의 저작인 《인구론》을 통해서 식량의 증가는 산술급수적이지만, 인구의 증가는 기하급수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연법칙에 따른 기근과 가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노동계급 스스로 도덕적인 자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출생을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학설들은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부자들을 기쁘게 하는 학설들이었다.
또한 우리가 정치경제학 교실을 통해서 접했던 시니어의 "마지막 노동시간이 이윤을 창출한다"라는 이론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의 요구를 부자들의 입장에서 방어하는 효과적인 무기로 작용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가난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자본가들에게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등의 요구를 걸고 싸웠습니다. 임금인상의 요구에 대항해 부자들은 '임금기금설'이라는 이론으로 맞섰습니다.
'임금기금설'은 아주 간단합니다. 노동자들이 나누어 갖는 임금기금은 일정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거나 노조를 만들고 가입하는 것은 순전히 미친짓이라고 말합니다. 일정한 임금기금을 나누어 갖는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몫을 크게하기 위해서는 나누는수 즉 노동자를 줄이던지 나누어지는 수 즉, 기금을 늘리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임금기금을 늘리기 위해서는 사업을 그냥 내버려두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설명합니다.
즉,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태동으로 인해서 소외받고 가난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돌리려는 이데올로기들이 지배이데올로기였던 것입니다.
제가 언급했던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배한다는 말을 다시한번 꺼내겠습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경제적인 하부구조가 방금 말했던 이데올로기들이 나올 수 있는 바탕과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상적인 세계를 꿈꿉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꿈꾼다면 아마도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이상향을 설계할 것입니다. 초기에 이런 이상향을 가진 사람들은 공상적인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지배계급들의 결단이나, 지배계급들의 지갑에 기대려 했습니다.
바로 이때에 마르크스가 등장했습니다. 그 역시도 사회주의자 였지만, 그는 이상향의 세계에 대한 어떠한 설계나 계획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살핌으로서, 미래사회를 위한 변화의 힘은 현재사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노동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맑스 경제이론의 근본적인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착취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이전의 사회처럼 착취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 노동자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맑스는 착취가 은폐되어있다고 말하고, 잉여가치설을 통해서 이를 밝혔습니다.
맑스는 일반재화와 상품을 구별했습니다. 재화는 직접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환을 위해서 생산될 때 상품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즉,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환 즉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상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상품들의 교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상품들의 유일한 공통점, 즉 사회적인 노동, 사회적 평균노동에 의해 교환의 비율이 정해진다고 말합니다.
맑스의 주장을 짧게 정리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팔기 위한 재화의 생산, 즉 상품생산과 관계가 있고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결정되며 노동자는 이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살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팔아야 하고 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총액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재화의 총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이 총액을 하루 노동 중 일부분만으로 생산해 낼 수 있고, 나머지 시간은 대가가 지급되지 않는 불불노동이며 이 불불노동에 의한 것이 잉여가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잉여가치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에게 돌아갑니다. 이런 잉여가치는 유산계급의 수입의 원천이 되고, 잉여가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착취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맑스는 이 사회가 파멸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왜냐면 노동의 결과인 생산은 갈수록 사회화되는 반면에 소유는 개인적이라는 것 때문에, 생산력의 자유로운 발전과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갈수록 파괴적인 체제의 고장인 공황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어 일아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맑스는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일으킬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하며, 그들이 자본주의 모순들로 가장 고통받고, 사유재산에 기반한 사회에 어떤 기반을 갖지 않고 있기에 그들이 변화을 일으킬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이 거대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더 넓은 시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식민지가 필요했습니다. 즉,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너 광범위한 착취가 일어나고 체제가 더 세계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화 된 체제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서로 공통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갖게 만듭니다. 즉, 맑스가 말했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선언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증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이 거대한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쉽게 붕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인 공황이나 전반적인 이윤율의 하락경향등의 모순들로 인해서 자동적으로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발제를 마치려고 합니다. 과연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태동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어떠한 사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