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한국의 불교
2. 삼국의 불교전래
3. 신라의 불교
1)원효
2)義湘
4. 고려불교
1)의천
2)지눌(知訥; 1158-1210)
5. 불교에서 유교로
2. 삼국의 불교전래
3. 신라의 불교
1)원효
2)義湘
4. 고려불교
1)의천
2)지눌(知訥; 1158-1210)
5. 불교에서 유교로
본문내용
것으로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 의지하다가 마침내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둘째 마음을 통일하여 정토극락을 염원하더라도 밖의 극락을 염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自心을 등지고 願만 있기 때문에 혹시 정토에 왕생할 수는 있으나 성불은 더욱 멀어진다.
지눌은 마음 밖에 佛이 없고 性品 밖에 法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자성을 향한 탐구를 가장 큰 과제로 삼았다. 자성을 탐구하기란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볼 수 없으나 그 눈으로 사물을 잘 식별하면 바른 눈을 가진 것으로 알 수 있는 것같이 자성에 비록 흔적은 없으나 사물을 바르게 보기만 하면 자성을 본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성은 어떤 것인가? 지눌은 우선 형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자성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선하다고 말해도 부족하고 악하다고 말해도 옳지 않다. 형상이 없으므로 국한이 없고 국한이 없으므로 전체에 차며 전체에 차므로 큰 능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자성은 능히 형상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눈앞의 진실되거나 거짓된 모든 형상이 모두 이 마음의 움직임 때문이요 삼라만상 일체작용이 모두 마음의 형상으로 읽어지는 것이다. 셋째 자성을 일체를 거둬들이고 일체를 드러내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거둬들이면 한 알의 티끌 속에도 다 들일 수 있고 드러내면 황하의 모래보다 더 많이 번져지는 세계이니 그 조화는 宇宙와 自心이 하나가 된 상태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한기두 210-214)
지눌은 위대한 선사상가였다. 그러나 그는 선을 위주로 하긴 하였지만 한편으로 화엄사상에 깊이 빠져들어 교학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禪敎一如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통현의 {華嚴論信解義}를 요약하여 {華嚴論節要} 3권으로 만들기도 하고 화엄의 근본사상을 判釋하여 {圓頓成佛論}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지눌이 선가이면서도 선문만을 다루지 않고 화엄사상을 다룬 것은 화엄 천태의 원돈사상이 돈오점수의 실천수행과 그 뜻이 부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눌은 성불의 기초는 卽心是佛임을 아는 때부터라는 것을 혜능을 통해 깨달았다. 그러나 自心만 찾고 事事無碍임을 모르면 佛果가 크지 않다는 주장들에 자극 받아 부처의 말씀으로서의 교와 부처의 마음으로서의 선이 어떻게 상호 부합하는가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화엄경도 成佛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성불은 단순한 悟得境이 아니라 모든 業藏이 頓畢하고 자타의 거래간에 원만한 조화를 이룰 때 성불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교의 사상은 지눌이 주장하는 頓悟漸修와 부합되었다. 지눌의 돈오는 凡夫가 다함이 없는 지혜 즉 성품(無漏智性)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알 때를 의미하였다. 공적령지(空寂靈知)를 찾는 것이 돈오라고 보았다. 이런 후에 망념이 일어나면 덜고 또 덜어서 더 이상 덜 것이 없을 때까지 더는 것이 悟後牧牛行(곧 漸修)이었다. 이러한 수행에는 그러한 이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선을 닦되 닦을 것이 없고 악을 끊되 끊을 길이 없는 때까지 定과 慧를 균등히 지녀야만 선악이 담박하고 자비와 지혜가 뚜렷하고 밝아진다고 보았다.
참고자료로 다음 두 글을 첨부합니다. 한길사의 {한국사} 가운데 사상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올려놓아 많은 사람이 쉽사리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작권에 저촉되는 것이 아닌지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만 학습을 돕기 위한 참조 대상으로 올리는 것이니 이 정도는 허락되지 않을까 합니다.
추만호, "신라하대 사상계의 동향" {한국사: 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1. 가운데 일부입니다.
채상식, "고려시대 불교의 전개와 성격" {한국사: 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1
불교에서 유교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매년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란의 침입을 받았을 때는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6천권의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하였다. 현화사 중광사 대운사 대안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절에 많은 토지를 기부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무분별하게 일으킴으로써 농번기에도 농사를 짓지 못하고 부역에 시달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사찰에 재화가 몰려드는 데 비례하여 승들의 타락이 깊어 갔다. 고려사 문종 10년 9월조에 보면 "...부역을 피하는 무리가 승려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재산을 불려먹고 살아가며 농사짓고 짐승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장사하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계율을 어기고 물러나서는 청정한 검약생활을 하지 않는다. 승복은 술항아리 덮는 데 쓰이고 설법하고 염불하던 장소는 파 마늘 밭으로 할애되었다. 상인을 통해 물건을 사고 팔며 손님과 어울려 취하도록 마시고 노니 절간이 시끄럽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게 되었다".(정의행 208 재인용)
위의 지적은 고려조 초창기에 있었던 일이지만 말기가 되어 원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에도 그후 공민왕의 시기에도 승단의 타락은 깊어 갔다. 선사들이 이권을 탐하고 대토지를 점유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사찰은 권문세가와 결탁하여 대토지와 많은 노비를 차지하고 소작 양조 축산 고리대 등을 통해 물질적 이익을 꾀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10년조(1361)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불교는 본래 청정함을 숭상하는데 그 무리가 죄와 복의 설로 과부나 외로운 여인을 꾀어 머리를 깍아 여승이 되게 하며 동거하며 음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대부 집안이나 종실에 불사를 권하여 산중에 머무르게 하는데 가끔 추문이 들려 풍속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일체 금지시키고 어기는 자는 엄벌해야 할 것입니다. 또 지방의 아전이나 공사 노비들이 법을 어기고 부역을 회피하여 불가에 몸을 의탁해서 손에는 불상을 들고 입으로는 염불을 하며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재물을 축내니 그 폐해가 가볍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신진사대부세력은 귀족과 사찰의 대토지 소유를 혁파함으로써 당시의 재정적 위기와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유학자들은 불교가 주장하는 바의 세계관 자체를 유교적 세계관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정도전이며 그는 불씨잡변에서 배불론을 전개한다.
지눌은 마음 밖에 佛이 없고 性品 밖에 法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자성을 향한 탐구를 가장 큰 과제로 삼았다. 자성을 탐구하기란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볼 수 없으나 그 눈으로 사물을 잘 식별하면 바른 눈을 가진 것으로 알 수 있는 것같이 자성에 비록 흔적은 없으나 사물을 바르게 보기만 하면 자성을 본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성은 어떤 것인가? 지눌은 우선 형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자성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선하다고 말해도 부족하고 악하다고 말해도 옳지 않다. 형상이 없으므로 국한이 없고 국한이 없으므로 전체에 차며 전체에 차므로 큰 능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자성은 능히 형상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눈앞의 진실되거나 거짓된 모든 형상이 모두 이 마음의 움직임 때문이요 삼라만상 일체작용이 모두 마음의 형상으로 읽어지는 것이다. 셋째 자성을 일체를 거둬들이고 일체를 드러내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거둬들이면 한 알의 티끌 속에도 다 들일 수 있고 드러내면 황하의 모래보다 더 많이 번져지는 세계이니 그 조화는 宇宙와 自心이 하나가 된 상태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한기두 210-214)
지눌은 위대한 선사상가였다. 그러나 그는 선을 위주로 하긴 하였지만 한편으로 화엄사상에 깊이 빠져들어 교학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禪敎一如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통현의 {華嚴論信解義}를 요약하여 {華嚴論節要} 3권으로 만들기도 하고 화엄의 근본사상을 判釋하여 {圓頓成佛論}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지눌이 선가이면서도 선문만을 다루지 않고 화엄사상을 다룬 것은 화엄 천태의 원돈사상이 돈오점수의 실천수행과 그 뜻이 부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눌은 성불의 기초는 卽心是佛임을 아는 때부터라는 것을 혜능을 통해 깨달았다. 그러나 自心만 찾고 事事無碍임을 모르면 佛果가 크지 않다는 주장들에 자극 받아 부처의 말씀으로서의 교와 부처의 마음으로서의 선이 어떻게 상호 부합하는가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화엄경도 成佛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성불은 단순한 悟得境이 아니라 모든 業藏이 頓畢하고 자타의 거래간에 원만한 조화를 이룰 때 성불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교의 사상은 지눌이 주장하는 頓悟漸修와 부합되었다. 지눌의 돈오는 凡夫가 다함이 없는 지혜 즉 성품(無漏智性)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알 때를 의미하였다. 공적령지(空寂靈知)를 찾는 것이 돈오라고 보았다. 이런 후에 망념이 일어나면 덜고 또 덜어서 더 이상 덜 것이 없을 때까지 더는 것이 悟後牧牛行(곧 漸修)이었다. 이러한 수행에는 그러한 이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선을 닦되 닦을 것이 없고 악을 끊되 끊을 길이 없는 때까지 定과 慧를 균등히 지녀야만 선악이 담박하고 자비와 지혜가 뚜렷하고 밝아진다고 보았다.
참고자료로 다음 두 글을 첨부합니다. 한길사의 {한국사} 가운데 사상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올려놓아 많은 사람이 쉽사리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작권에 저촉되는 것이 아닌지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만 학습을 돕기 위한 참조 대상으로 올리는 것이니 이 정도는 허락되지 않을까 합니다.
추만호, "신라하대 사상계의 동향" {한국사: 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1. 가운데 일부입니다.
채상식, "고려시대 불교의 전개와 성격" {한국사: 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1
불교에서 유교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매년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란의 침입을 받았을 때는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6천권의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하였다. 현화사 중광사 대운사 대안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절에 많은 토지를 기부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무분별하게 일으킴으로써 농번기에도 농사를 짓지 못하고 부역에 시달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사찰에 재화가 몰려드는 데 비례하여 승들의 타락이 깊어 갔다. 고려사 문종 10년 9월조에 보면 "...부역을 피하는 무리가 승려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재산을 불려먹고 살아가며 농사짓고 짐승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장사하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계율을 어기고 물러나서는 청정한 검약생활을 하지 않는다. 승복은 술항아리 덮는 데 쓰이고 설법하고 염불하던 장소는 파 마늘 밭으로 할애되었다. 상인을 통해 물건을 사고 팔며 손님과 어울려 취하도록 마시고 노니 절간이 시끄럽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게 되었다".(정의행 208 재인용)
위의 지적은 고려조 초창기에 있었던 일이지만 말기가 되어 원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에도 그후 공민왕의 시기에도 승단의 타락은 깊어 갔다. 선사들이 이권을 탐하고 대토지를 점유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사찰은 권문세가와 결탁하여 대토지와 많은 노비를 차지하고 소작 양조 축산 고리대 등을 통해 물질적 이익을 꾀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10년조(1361)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불교는 본래 청정함을 숭상하는데 그 무리가 죄와 복의 설로 과부나 외로운 여인을 꾀어 머리를 깍아 여승이 되게 하며 동거하며 음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대부 집안이나 종실에 불사를 권하여 산중에 머무르게 하는데 가끔 추문이 들려 풍속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일체 금지시키고 어기는 자는 엄벌해야 할 것입니다. 또 지방의 아전이나 공사 노비들이 법을 어기고 부역을 회피하여 불가에 몸을 의탁해서 손에는 불상을 들고 입으로는 염불을 하며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재물을 축내니 그 폐해가 가볍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신진사대부세력은 귀족과 사찰의 대토지 소유를 혁파함으로써 당시의 재정적 위기와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유학자들은 불교가 주장하는 바의 세계관 자체를 유교적 세계관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정도전이며 그는 불씨잡변에서 배불론을 전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