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 요약
1. 전쟁 중의 일본인
2.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3. 메이지유신
4.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5.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
6.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7. 오명을 씻는다
8. 인정의 세계
9. 덕의 딜레마
10. 자기 수양
11. 어린아이는 배운다
2. 감상문
1. 전쟁 중의 일본인
2.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3. 메이지유신
4.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5.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
6.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7. 오명을 씻는다
8. 인정의 세계
9. 덕의 딜레마
10. 자기 수양
11. 어린아이는 배운다
2. 감상문
본문내용
삶의 모습 역시 독특하게 만든다. 사고와 행위의 통일성을 중시하는 서구인들의 눈에 그들은 참으로 특이한 사람들이다. 일본인들의 삶을 잘 살펴보면 충의 영역, 효의 영역, 의리의 영역, 인정의 영역 등 적용 원리가 가기 달라 보이는 여러 영역으로 그들의 삶이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속에서 행동의 통일성을 잃은 듯한, 즉 모순된 생활관을 보여준다. 이는 그들의 선과 악에 대한 관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본인들은 악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선하던 것이 녹이 슬어 낡으면 악이 되고 다시 이를 다듬어 갈면 선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므로 그들이 당면하는 문제는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인생의 각 영역에서 지켜야할 의무(또는 의리-기리-) 사이의 갈등이다. 즉 천황에 대한 충(忠)과 주군에 대한 기리(義理) 사이에서의 갈등 같이.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선이고 다른 하나가 악인 것이 아니다. 단지 둘 사이의 갈등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이를 자살로 해결한다. 부모에 효를 다하기 위해 아내를 버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갈등 가운데 감정에 치우치거나 드러내지 않고 '성실'하게 기무(義務)를 다하려는 노력이다.
일본인에게 있어 '자중(自重)하다'란 말은 행동을 함에 있어 타인을 의식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인의 삶이 서구처럼 '죄의식' 중심이 아니라 '수치'중심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죄가 아니라 수치가 중요한 사회는 외면적인 강제력에 의한 선행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나쁘게 볼까 두려워 선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일본인 특유의 예절이 가지는 한계라고 할까?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보고 웃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베네딕트가 우리나라도 분석을 했다면 아마 일본보다 더 이상한 민족이라 하지 않았을까? 죄의식도 없고 그나마 수치도 모르는 그런 민족. 지금의 일본. 즉 친절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경계하는 성숙된 시민의식의 뿌리 역시 바로 이런 일본인의 세계관이 아닐까 한다.
베네딕트는 11장 '자기 수양'에서 동양문화권의 '무아(無我)지경'을 매우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읽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몰입의 경지인데 서구인의 눈에는 매우 희한하게 보였나 보다. 서구의 자기 수련과는 다르게 자기 희생(서구에서 자기 수련은 가톨릭에서의 고행처럼 자기 희생의 이미지가 강하다)을 포함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처세를 위한 것이라 하고는 선종의 신비주의적 수련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무아지경'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나를 보는 나'의 존재에 대한 의식을 버리는 것, 그래서 자신의 의지와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일체화되는 자연 숙달의 경지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에만 몰입하는 경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베네딕트의 서술은 왠지 그것의 일본인의 특성이라고 자꾸 강조하고 있어 이러한 자기 수양의 모습이 '좋은' 것이라기보다는 특이한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하는 것 같다. 이 역시 '서구에서 바라보는 동양'적 의식의 한계가 아닐까 한다.
일본인의 유아교육법은 일본인의 삶의 특징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일본인의 삶에서 보여지는 이원적 성격이나 여러 종류의 모순성은 그들의 유아기의 삶과 성년기의 삶의 차이에 기인한다. 일본인들은 서구인들과 다르게 그들의 인생곡선이 U자형을 그리게 된다. 서구인들은 어릴 때에는 엄격한 훈련을 받다가 자라가면서 자율권이 확대되고 갈수록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다 늙어가면서 활동의 폭이 좁아진다. 그러나 일본은 반대다. 어린 시절에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다 자가가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리와 기무를 인식하고 타인들의 '눈'을 의식해가며 최대한의 삶의 속박, 최고도의 정신적 훈려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늙으면 이러한 속박의 끈이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을 경험한다. 따라서 어릴 때에는 거의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모르다 어른이 되면서 세상 사람들의 인정, 부끄러움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자제와 자중을 엄격히 익히게 된다. 그리고 훈계와 놀림, 주의를 옮기기 등 가정에서의 훈육은 규칙의 적용이 아니라 인성에 내면화되는 습관의 습득으로 이루어져 그 속박의 강도는 더욱 크다. 이런 성장기 경험의 이원성은 성격의 이원성으로 이어지고 당연히 삶에 있어 긴장을 수반하게 된다. 현재의 삶은 엄격히 통제되면서 계속해서 과거의 자유를 끊임없이 부러워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베네딕트는 패전 후의 일본인의 모습을 서술하며 글을 정리한다. 서구인들이 일본에 대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패전 후에 일본이 보여준 승전국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자신들의 능동적 체제 변화의 노력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억울하게 졌다거나 승전국들이 단지 힘이 강해 자신들이 졌다거나 하며 자신들을 변호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천황을 위해 자살공격까지 감행했던 그들이었기에 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일본인의 행동 동기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이해하면 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자신의 추구하는 어떤 신념, 즉 이데올로기, '주의' 등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서슴없이 전쟁을 일으켰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들의 실패나 실수, 오류를 기꺼이 인정한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기들의 신념이 악한 세력에 저지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다분히 기회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을 이겨야 한다느니 일본놈들은 어떠하다느니 말은 많고 따라서 탈도 많지만 정작 일본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고 무지한 우리에게 나름대로 일본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하는 유용한 책이라 생각된다. 재난을 당해도 통곡하고 울부짖는 우리와는 다르게 침착하고 차분하고 심하다 싶을 만큼 냉정한 그들의 모습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일본 연구서나 기행기가 나오고 있는 실정에서 이러한 책들의 바탕이 되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인에게 있어 '자중(自重)하다'란 말은 행동을 함에 있어 타인을 의식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인의 삶이 서구처럼 '죄의식' 중심이 아니라 '수치'중심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죄가 아니라 수치가 중요한 사회는 외면적인 강제력에 의한 선행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나쁘게 볼까 두려워 선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일본인 특유의 예절이 가지는 한계라고 할까?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보고 웃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베네딕트가 우리나라도 분석을 했다면 아마 일본보다 더 이상한 민족이라 하지 않았을까? 죄의식도 없고 그나마 수치도 모르는 그런 민족. 지금의 일본. 즉 친절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경계하는 성숙된 시민의식의 뿌리 역시 바로 이런 일본인의 세계관이 아닐까 한다.
베네딕트는 11장 '자기 수양'에서 동양문화권의 '무아(無我)지경'을 매우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읽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몰입의 경지인데 서구인의 눈에는 매우 희한하게 보였나 보다. 서구의 자기 수련과는 다르게 자기 희생(서구에서 자기 수련은 가톨릭에서의 고행처럼 자기 희생의 이미지가 강하다)을 포함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처세를 위한 것이라 하고는 선종의 신비주의적 수련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무아지경'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나를 보는 나'의 존재에 대한 의식을 버리는 것, 그래서 자신의 의지와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일체화되는 자연 숙달의 경지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에만 몰입하는 경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베네딕트의 서술은 왠지 그것의 일본인의 특성이라고 자꾸 강조하고 있어 이러한 자기 수양의 모습이 '좋은' 것이라기보다는 특이한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하는 것 같다. 이 역시 '서구에서 바라보는 동양'적 의식의 한계가 아닐까 한다.
일본인의 유아교육법은 일본인의 삶의 특징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일본인의 삶에서 보여지는 이원적 성격이나 여러 종류의 모순성은 그들의 유아기의 삶과 성년기의 삶의 차이에 기인한다. 일본인들은 서구인들과 다르게 그들의 인생곡선이 U자형을 그리게 된다. 서구인들은 어릴 때에는 엄격한 훈련을 받다가 자라가면서 자율권이 확대되고 갈수록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다 늙어가면서 활동의 폭이 좁아진다. 그러나 일본은 반대다. 어린 시절에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다 자가가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리와 기무를 인식하고 타인들의 '눈'을 의식해가며 최대한의 삶의 속박, 최고도의 정신적 훈려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늙으면 이러한 속박의 끈이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을 경험한다. 따라서 어릴 때에는 거의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모르다 어른이 되면서 세상 사람들의 인정, 부끄러움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자제와 자중을 엄격히 익히게 된다. 그리고 훈계와 놀림, 주의를 옮기기 등 가정에서의 훈육은 규칙의 적용이 아니라 인성에 내면화되는 습관의 습득으로 이루어져 그 속박의 강도는 더욱 크다. 이런 성장기 경험의 이원성은 성격의 이원성으로 이어지고 당연히 삶에 있어 긴장을 수반하게 된다. 현재의 삶은 엄격히 통제되면서 계속해서 과거의 자유를 끊임없이 부러워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베네딕트는 패전 후의 일본인의 모습을 서술하며 글을 정리한다. 서구인들이 일본에 대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패전 후에 일본이 보여준 승전국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자신들의 능동적 체제 변화의 노력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억울하게 졌다거나 승전국들이 단지 힘이 강해 자신들이 졌다거나 하며 자신들을 변호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천황을 위해 자살공격까지 감행했던 그들이었기에 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일본인의 행동 동기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이해하면 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자신의 추구하는 어떤 신념, 즉 이데올로기, '주의' 등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서슴없이 전쟁을 일으켰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들의 실패나 실수, 오류를 기꺼이 인정한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기들의 신념이 악한 세력에 저지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다분히 기회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을 이겨야 한다느니 일본놈들은 어떠하다느니 말은 많고 따라서 탈도 많지만 정작 일본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고 무지한 우리에게 나름대로 일본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하는 유용한 책이라 생각된다. 재난을 당해도 통곡하고 울부짖는 우리와는 다르게 침착하고 차분하고 심하다 싶을 만큼 냉정한 그들의 모습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일본 연구서나 기행기가 나오고 있는 실정에서 이러한 책들의 바탕이 되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