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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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1. 고려 청자의 시대적 변천
1) 초기 청자
2) 청자의 발견
3) 고려청자의 결정기
4) 청자상감의 전성기
5) 청자의 쇠퇴
6) 상감청자기
2. 고려 청자의 종류와 문양
1) 순청자
2) 상감(象嵌)청자
3) 화청자(畵靑磁)
4) 퇴화(堆花)무늬 청자
5) 진사(辰砂)청자
6) 화금(畵金)청자
7) 철채(鐵彩)청자
8) 명문(銘文)이 있는 청자
3. 고려 청자의 제작과정

Ⅲ. 맺음말

본문내용

주게 된다. 마지막으로 끝 구멍 까지 불이 끝나게 되면 봉통 입구를 밀봉하고 열이 떨어질 때까지 5 ~ 6일간 기다렸다가 가마안의 온도가 30.C 이하가 되면 요출을 하게 된다.
8.상회구이
재벌구이 이후 유약의 표면에 저온의 안료와 유약을 입혀서 다시 한번 녹여 주어 장식하는 상회구이 기법이 있다. 그러나 이 상회부분의 장식은 오래 사용하면 벗겨져서 보기에 좋지 못하다.
실질적으로 한 작품이 나오기 까지는 적어도 24단계 이상의 공정을 거쳐야 하고 일상으로는 70여일이 소요되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청자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만들어진 모든 작품들이 실패없이 완전하게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청자도 매회마다 100% 성공하여 요출된 것이 아니며, 현존하고 있는 명품이라면 국보나 보물급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도 거의 완성 당시부터 흠집이 있었다.그만큼 청자란 모든 도자기 중에서 가장 만들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인류문화에 불후의 명기를 제작해 내었던 고려도공들도 수 백년 동안 전통을 이어 오면서 기량을 갈고 닦아 왔기 때문에 명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Ⅲ. 맺음말
중국에서 옥(玉)은 군자(君子)를 상징하며, 부귀(富貴)와 사후내세를 보장해 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녀 영생을 의미하며 악귀를 쫓는다고 믿어 부장품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당시 지배계급의 옥에 대한 소유 욕구와 부모의 묘에 옥을 부장하려는 사람은 많았으나, 옥은 생산이 적어 매우 비싸 귀한 옥을 흙으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중 전국시대를 걸쳐 삼국시대에 청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4C에서 6C경의 고분에서 중국의 청자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당시 중국의 청자를 왕실의 옥기(玉器)로써 수입하여 사용한 것으로 알 수 있다. 9C경 중국의 호족(濠族)들에게 널리퍼진 불교의 선종(禪宗)이, 좌선(坐禪)을 하는데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하여 차를 마시는 습관이 확산되면서, 청자를 찻잔으로 사용하며 실용화 되기 시작하였다. 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길로써 마셨다. 따라서 차를 마시는 찻잔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고, 그 찻잔은 금값보다 비싼 귀중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9C 통일신라 말기 선종이 유입되면서 중국을 다녀온 선승(禪僧)들을 통하여 중국의 찻잔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초 청자를 국산화하려는 노력중 10C 후반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질이 좋은 흙을 찾아 전라도 강진, 고창에서 우수한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고려인들의 세계가 불교적인 세계이었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고려청자에 담아 영원한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구름과 학, 불교적 선의 세계인 연못, 버드나무, 물살을 따라 노니는 오리, 고요함과 적막함을 나타낸 들국화. 그와같은 문화로 수백년을 이어온 삶의 염원을 담아낸 청자가 은은하면서 맑은 그 신비한 비색과 어울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도자기는 앞서 본론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고려 건국 초인 10세기에 비로소 자리가 잡혔다. 토기가 주류를 이루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로 이어져오는 가운데서도 7세기경부터 연유계 시유도기(鉛釉系施釉陶器), 회유계 경질시유도기(灰釉系硬質施釉陶器)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바탕이 고려자기가 발달하는 터전이 되었다. 국내의 자체적인 노력과 발전도 있었지만, 중국 도자기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4세기경의 청자의 조형(祖形)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월자(古越瓷), 당나라 말기의 정요(定窯)에서 제작된 백자, 저장성[浙江省] 북쪽에 있는 웨저우요[越州窯]에서 만든 오대(五代) 때의 세련된 청자, 베이징 부근의 정요백자(定窯白瓷)와 양쯔강[揚子江] 하구 남쪽의 웨저우요 청자들이 한국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고려자기라면 흔히 청자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이 고려시대 귀족들의 기호에 맞아,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백자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그 수효가 적어서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檀君崇拜의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노장·풍수도참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로 생산하고 세련시켰다. 12세기 전반에 비색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냈으며, 12세기 중엽에는 유약을 맑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고 명랑한 비색, 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유연하고 유려한 선 등 우리나라의 도자기 중 가장 아름답다.
박물관에 가서 보면 우리나라 도자기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고려청자이다. 위에서 얘기한 아름다움 역시 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음이지만 역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푸르른 그 빛깔이다. 고려청자의 翡色이라고 불리는 그 색은 마치 비취옥과 같은 빛깔로 완전히 푸르지도 않고 풀색도 아닌 청록색 계통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중국의 두껍고 짙푸른 색의 청자와는 달리 맑고 명쾌한 색이 사람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 색에는 마치 도공의 영혼이 담겨 있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청명한 색깔을 지켜주는 것 같다.
우리는 여지껏 이런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무관심했었다. 박물관에 가서 고려청자를 보고도 그 색이 어떠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나 역시 고려청자에 관해 흥미가 있어서 이 주제를 택해서 쓰면서도 자세히 기억나는 청자는 몇 개 안되었다. 색감에 대해서는 관심있게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억이 나지만 고려청자의 모양이나 문양에 관해선 사진을 보며 흐릿해진 기억을 되살린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의 얼이 담긴 고려청자 뿐 아니라 모든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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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준, <국보-회화 편>, 예경, 1984
임영주, <한국문양사>, 미진사, 1983
한국고미술협회, <한국 고미술 사료전>, 삼성출판사, 1996
정양모, <고려청자>, 대원사, 1998
장경희 외 4명, <한국미술문화의 이해>, 예경, 1994
한림과학원, <한국미술사의 현황>, 예경,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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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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