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6세기 약 200여년 간 전성기를 보내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외적 요인과 제조상의 문제 등 내적 요인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분청사기의 무늬는 주로 연꽃, 연당초, 모란, 모란 당초, 국화, 물고기, 화조무늬등이 활발하고 민예적으로 탁월한 기법을 통해 시문되었다. 특히 무늬의 재구성과 추상적 변형은 조선시대 도공들의 탁월성을 보여주고 있다.
분청사기의 백토분장 기법 외에 또 다른 특징으로는 銘文을 들 수 있는데 앞서의 고려청자와는 달리 명문에는 그릇을 사용할 관청의 이름이나 생산지와 관청의 이름을 합친 것 이외에 도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편년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제작지를 알 수 있어 분청사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임진왜란 이후 분청사기는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가 청자가 주류를 이루었던 반면, 조선은 분청자와 백자가 함께 발전하였다. 백자는 순백색의 태토(胎土)위에 투명한 釉藥을 씌워서 만든 자기로 백자는 청자보다 안정되고 발전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자로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유학이 전래되면서 검소, 질박, 결백함 등을 추구하게 되면서 백색을 선호하게 된다. 이렇듯 백자가 가지고 있는 청순함과 결백함이 양반들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에 청자에서 백자로 발달하게 된 것이다.
조선자기는 왕실이나 사가에서 쓰는 의기(儀器)와 제기(祭器)의 제작 등 기종과 성격이 명백하였다. 사선서(司膳署)라는 기관을 따로 두고, 경기도 광주(廣州)의 중앙관요와 각 지방관요를 직접 관리할 만큼 국가적이었다. 후에 사옹방(司甕房)으로, 다시 1467년(세조 13)에 사옹원(司甕院)으로 개칭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민요로 바뀌면서 모든 기능은 자연히 마비되고 말았다. 넷째,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분청사기와 백자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임진왜란으로 재정은 고갈되고 도자기 가마도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도공이 모두 일본으로 납치되어 작업이 곤란해져서 자연히 정지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수난을 딛고 일어나 다시 시작된 것이 조선시대 도자기의 특징이며, 색을 피한 평범하고 소박하며 큼직한 순백의 자기를 소생시키게 하였으며, 그 형이 지극히 서민적이고 분위기가 원만하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도자기는 고려 말 퇴락된 청자의 맥을 이은 조선청자와 청자에서 일변한 분청사기, 초기의 고려계 백자, 원(元)·명(明)계 백자, 청화(靑華)백자의 영향으로 발달된 백자가 있고, 이 밖에 흑유(黑釉)·철채(鐵彩)·철사유(鐵砂釉) 등이 있으나 대별하여 분청사기와 백자기로 구분한다.
5) 고려청자의 특징
고려청자의 특징은 청자의 비색, 상감기법, 무늬, 기형에 있다.
-비색
비색은 청자의 푸른색을 지칭하는 것으로 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비색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청자는 중국의 육조시대부터 만들어지며 송대에 와서 그 전성기를 이루었고 고려청자는 송 청자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하나 발색효과는 소과 다른 푸른색을 개발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도자기의 푸른색을 色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고려인들은 독자적으로 翡色이라고 지칭함으로서 중국의 청자색과는 다르다는 긍지를 지니고 있었다. 12세기 순청자의 푸른색은 빙열(氷裂)없이 깊고 차분한 비색의 절정을 보이며 고려자기의 특징적 색을 나타내게 된다.
-상감기법
상감이란 용어의 유해는 알 수 없으나 도자기에 상감기법을 적용하여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발전하였다. 상감기법은 12세기 중엽 인종 말년 내지 의종 초년경에 약간씩 상감기법이 시도되기 시작하면서 12세기 후반으로부터 13세기가 되면서 절정기를 이룬다. 청자 자체가 문양을 넣기 힘들기 때문에 청동은입사 기법에서 영감을 얻어 상감청자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양각이나 음각이 아니라 문양을 새겨넣는 방법으로 흑백의 상감무늬가 발달하게 된다. 가장 오래된 상감청자는 1159년 죽은 문공유의 무덤에서 출토된 ‘청자상감 보상당초무늬 대접’으로 전해진다. 또한 1202년 명종의 지릉에서도 ‘청자상감 여지무늬 대접’이 출토되어 13세기 이전의 상감청자 시대의 발전을 짐작케 한다.
-무늬
무늬는 기하학적 도안과 정서적이고 낭만적인 무늬로 나눌 수 있다. 연화무늬, 모란무늬, 국화무늬, 당초무늬 등의 반복이나 운학무늬, 표류수금무늬, 송하탄금무늬 등으로 다양한 문양을 새겼다. 그런데 청자는 유약의 유리질화 현상으로 매우 반사가 심해 청자에 문양을 양각이나 음각으로 새기는 것이 여의치 않아 상감기법이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는 참외모양, 거북이모양, 표주박 모양 등 기형을 변화시켜 형태의 변화를 추구했다.
-기형
기형은 중국의 기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고려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나 병의 유려한 곡선, 매병의 굴곡 등에서 선의 미학은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띈다.
<청자의 발전과 쇠퇴>
초기 청자
햇무리굽 청자
-절강성 월주청자의 영향으로 생산
-9세기 후반~10세기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 에 집중적으로 분포 ~강진 일대의 청자가 가장 세련
햇무리굽 대접
-초기 청자를 대표하는 기형
-굽 모량이 햇부리굽 내화토비짐눈에 측사면이 직선
Ⅰ형식 ~내저에 원각이 없는 것 Ⅱ형식~ 내저에 원각이 있는 것 말기에 음각국당초문
♣ 국당 초문 출현의 단계에서 햇무리굽은 퇴화 ,작은 다리굽 나타나고 음각대선이 있음
* 햅무리굽 Ⅰ형식 대접 (높이 5~6.3 호암 미술관 ),
* 햅무리굽 Ⅱ형식 대접~회백색의 내화토받침으로 얇게 바쳐 구워지고 청자유약이 두껍게 시유되어 있음, (높이 6.2 국립중앙박물관)
* 청자음각국당초문대접 (10세기 ~11세기 높이 8.4 호암미술관 소장)
* 청자음각국당초문대접 (왼쪽 높이 4 오른쪽 높이 4.8 개인소장)
녹청자
-지방의 수요에 대한 공급용 ( 일반 시민과 지방민 사용 )
-10세기 후반~ 11세기 점차 양질의 청자에 흡수
-태도가 거칠고 유약 표면이 안정되지 못하여 우툴두툴하며 표면색은 고운 청자색이 아닌 녹갈색 계통의 조질 청자
- 기다란 주름무늬와 주름 무늬연판 특수음양각 연판문 등이 공통적인 요소
* 녹
분청사기의 백토분장 기법 외에 또 다른 특징으로는 銘文을 들 수 있는데 앞서의 고려청자와는 달리 명문에는 그릇을 사용할 관청의 이름이나 생산지와 관청의 이름을 합친 것 이외에 도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편년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제작지를 알 수 있어 분청사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임진왜란 이후 분청사기는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가 청자가 주류를 이루었던 반면, 조선은 분청자와 백자가 함께 발전하였다. 백자는 순백색의 태토(胎土)위에 투명한 釉藥을 씌워서 만든 자기로 백자는 청자보다 안정되고 발전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자로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유학이 전래되면서 검소, 질박, 결백함 등을 추구하게 되면서 백색을 선호하게 된다. 이렇듯 백자가 가지고 있는 청순함과 결백함이 양반들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에 청자에서 백자로 발달하게 된 것이다.
조선자기는 왕실이나 사가에서 쓰는 의기(儀器)와 제기(祭器)의 제작 등 기종과 성격이 명백하였다. 사선서(司膳署)라는 기관을 따로 두고, 경기도 광주(廣州)의 중앙관요와 각 지방관요를 직접 관리할 만큼 국가적이었다. 후에 사옹방(司甕房)으로, 다시 1467년(세조 13)에 사옹원(司甕院)으로 개칭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민요로 바뀌면서 모든 기능은 자연히 마비되고 말았다. 넷째,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분청사기와 백자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임진왜란으로 재정은 고갈되고 도자기 가마도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도공이 모두 일본으로 납치되어 작업이 곤란해져서 자연히 정지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수난을 딛고 일어나 다시 시작된 것이 조선시대 도자기의 특징이며, 색을 피한 평범하고 소박하며 큼직한 순백의 자기를 소생시키게 하였으며, 그 형이 지극히 서민적이고 분위기가 원만하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도자기는 고려 말 퇴락된 청자의 맥을 이은 조선청자와 청자에서 일변한 분청사기, 초기의 고려계 백자, 원(元)·명(明)계 백자, 청화(靑華)백자의 영향으로 발달된 백자가 있고, 이 밖에 흑유(黑釉)·철채(鐵彩)·철사유(鐵砂釉) 등이 있으나 대별하여 분청사기와 백자기로 구분한다.
5) 고려청자의 특징
고려청자의 특징은 청자의 비색, 상감기법, 무늬, 기형에 있다.
-비색
비색은 청자의 푸른색을 지칭하는 것으로 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비색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청자는 중국의 육조시대부터 만들어지며 송대에 와서 그 전성기를 이루었고 고려청자는 송 청자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하나 발색효과는 소과 다른 푸른색을 개발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도자기의 푸른색을 色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고려인들은 독자적으로 翡色이라고 지칭함으로서 중국의 청자색과는 다르다는 긍지를 지니고 있었다. 12세기 순청자의 푸른색은 빙열(氷裂)없이 깊고 차분한 비색의 절정을 보이며 고려자기의 특징적 색을 나타내게 된다.
-상감기법
상감이란 용어의 유해는 알 수 없으나 도자기에 상감기법을 적용하여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발전하였다. 상감기법은 12세기 중엽 인종 말년 내지 의종 초년경에 약간씩 상감기법이 시도되기 시작하면서 12세기 후반으로부터 13세기가 되면서 절정기를 이룬다. 청자 자체가 문양을 넣기 힘들기 때문에 청동은입사 기법에서 영감을 얻어 상감청자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양각이나 음각이 아니라 문양을 새겨넣는 방법으로 흑백의 상감무늬가 발달하게 된다. 가장 오래된 상감청자는 1159년 죽은 문공유의 무덤에서 출토된 ‘청자상감 보상당초무늬 대접’으로 전해진다. 또한 1202년 명종의 지릉에서도 ‘청자상감 여지무늬 대접’이 출토되어 13세기 이전의 상감청자 시대의 발전을 짐작케 한다.
-무늬
무늬는 기하학적 도안과 정서적이고 낭만적인 무늬로 나눌 수 있다. 연화무늬, 모란무늬, 국화무늬, 당초무늬 등의 반복이나 운학무늬, 표류수금무늬, 송하탄금무늬 등으로 다양한 문양을 새겼다. 그런데 청자는 유약의 유리질화 현상으로 매우 반사가 심해 청자에 문양을 양각이나 음각으로 새기는 것이 여의치 않아 상감기법이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는 참외모양, 거북이모양, 표주박 모양 등 기형을 변화시켜 형태의 변화를 추구했다.
-기형
기형은 중국의 기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고려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나 병의 유려한 곡선, 매병의 굴곡 등에서 선의 미학은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띈다.
<청자의 발전과 쇠퇴>
초기 청자
햇무리굽 청자
-절강성 월주청자의 영향으로 생산
-9세기 후반~10세기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 에 집중적으로 분포 ~강진 일대의 청자가 가장 세련
햇무리굽 대접
-초기 청자를 대표하는 기형
-굽 모량이 햇부리굽 내화토비짐눈에 측사면이 직선
Ⅰ형식 ~내저에 원각이 없는 것 Ⅱ형식~ 내저에 원각이 있는 것 말기에 음각국당초문
♣ 국당 초문 출현의 단계에서 햇무리굽은 퇴화 ,작은 다리굽 나타나고 음각대선이 있음
* 햅무리굽 Ⅰ형식 대접 (높이 5~6.3 호암 미술관 ),
* 햅무리굽 Ⅱ형식 대접~회백색의 내화토받침으로 얇게 바쳐 구워지고 청자유약이 두껍게 시유되어 있음, (높이 6.2 국립중앙박물관)
* 청자음각국당초문대접 (10세기 ~11세기 높이 8.4 호암미술관 소장)
* 청자음각국당초문대접 (왼쪽 높이 4 오른쪽 높이 4.8 개인소장)
녹청자
-지방의 수요에 대한 공급용 ( 일반 시민과 지방민 사용 )
-10세기 후반~ 11세기 점차 양질의 청자에 흡수
-태도가 거칠고 유약 표면이 안정되지 못하여 우툴두툴하며 표면색은 고운 청자색이 아닌 녹갈색 계통의 조질 청자
- 기다란 주름무늬와 주름 무늬연판 특수음양각 연판문 등이 공통적인 요소
* 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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