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복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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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의 복식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백제의 복식 구조
1) 삼국 시대 복식의 기본 구성
2) 상의(上衣) : 유(襦). 포(袍)
3) 외의(外衣)
4) 머리모양
5) 빗
6) 관 모( 冠帽:모자)
7) 수건형 쓰개
8) 입자형 관모(笠子形 冠帽)
9) 금동관 (金銅冠)
10) 중국식 관모
11) 목걸이
12) 이식(耳飾)
13) 팔찌
14) 띠(帶)
15) 과대
16) 요패(腰佩)
17) 신과 버선
18) 왕족의 복식
19) 귀족의 복식
20) 일반인의 복식
21) 복식관련 유물
22) 백제의 직조와 염색
23) 백제 복식의 일본 전파
24) 과제를 정리하며

본문내용

오색사로 물들여 무늬를 넣는 선염법으로 , 면주와 견은 후염법으로 염색하였다. 당시의 색관념은 상당히 발달되었는데 홍색계통은 비색 적색 자색으로 구별되었고 청색계통은 녹색 청색 벽색으로 구별되었으며 희색과 검정색 황색도 사용되어 상당히 다양하게 색상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포(布)·견(絹)·마(麻) 등을 조세로 낼만큼 직조가 일반화되었다. 금(錦)은 5세기 중국 북위에 보냈던 조공(朝貢) 품목에도 보일 뿐만 아니라 직공(職工) 안정나(安定那 )는 일본에 건너가 한금(韓錦 )을 만들어 일본 금부련(錦部連)의 선조가 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백제의 직조기술을 말하여주는 유물은 가락바퀴나 바늘 등 재질의 특성상 오랜세월 유지되는 것 외에 나무로 제작하였을 직기 등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당시의 직조 기술이나 구체적 재현은 어렵다. 단지 능산리 36호분에서 직조편이 일부 출토되었는데 펑직과 라(羅)로 밝혀졌는데, 라는 관식과 함께 출토되어 라관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다.
또한 백제 기와 뒷면에 포목흔이 뚜렷히 남아있는데 비록 기와 제작을 목적으로 만든 천이지만 백제의 직조물이기도하여 주목된다. 이들 포목흔을 보면 평직이고 실의 두께차이에 의해 3종류로 구별되는데 기와 제작 용으로 올이 성글고 올과 올 사이의 간격도 큰 마직물로 보인다. 백제의 염색 기술을 보여주는 있는 유물은 없으나 관직에 품계를 설치하여 색의(色衣)로 구별한 점은 여러가지 색상으로 염색하는 기술이 이미 발달하였음을 이야기해주고 다. 또한 백제의 염색기술이 일본 효독기( 645~654)에 전해져 피혁을 봉제하고 혁(革)을 염색하였다는 사실이 『령집해(令集解)』에 전해지고 있어 염색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시대 고구려 통일신라 관영(官營) 공장에서 염직이 생산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의 우수한 염직 기술도 조부와 같은 중앙관서에서 관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23) 백제 복식의 일본 전파
일본의 고대문화는 백제의 직접적인 영향아래 세워진 것이다. 일본의 일본에 있는 백제와 관련된 유물 중에는 복식사에 많은 점을 시사해주는 것들이 있어 백제 복식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꾸준한 성장을 거듯한 백제가 4세기 중반경에 이르러 야마토 정권으로 짐작되는 왜와의 공식적인 교섭이 시도되었다. 나아가 백제는 366년에 오색채견(五色彩絹 ) 등 복식문물을 선물하여 백제의 복식문화에 대한 욕구를 촉발시키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문화적 교류는 4세기 이후 출현하는 하니와(埴輪 )를 통해 볼 수 있는데 백제의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토기와 연관성이 있으며, 인물 하니와의 경우 삼국의 복식을 반영하고 있다.
백제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는 두번째 큰 시점은 광대토왕대 고구려의 남진으로 백제가 고전하던 5세기 초반과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는 5세기 말경이다. 국내의 불안함으로 백제 주민들은 일본 열도로 진출에 활기를 띠는데 일부 백제 귀족은 가와찌 아스카( 飛鳥)에서 그 기반을 다졌다. 아스카일대는 고대문헌에 나타난 가와찌 아스카의 전체 씨족수를 통해볼때 한국계가 36%를 점하고 있거니와 삼국계주민 가운데 무려 백제계가 무려64%에 이르듯이 그 비중이 지대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아스카 석인상의 복식은 백제 복식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백제의 일본으로의 문화전파에 있어 세번째 계기는 성왕대이다. 성왕대 백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고 일본으로 불교와 사원건축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자를 비롯하여 오경박사와 같은 유학자까지 파견되었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를 중심으로 전래된 이 문화는 야마토 정권의 소재지이자 일본고대국가형성의 주요무대였던 아스카에서 취하여 아스카 문화라고 일컫는다. 이곳에서 백제문화의 압도적인 영향을 현재 남아있는 많은 유물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복식의 경우 천수국수장과 같은 유물에서 백제 나아가 삼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24) 과제를 정리하며
이상의 백제의 복식에 대하여 복장사 중심으로 개관을 하여 보았다. 그리고 백번 설명하자니 한번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다 생각하므로 더군데나 복식과 같은 것은 시각적인 효과가 더욱 크리라 생각하고. 많은 사진자료를 삽입하였다. 백제는 고이왕 27년 (260년)에 공복제도를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옷과 허리띠의 빛깔, 관의 장식으로 16품의 등급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복식에 관해서는 유물이나 기록이 많지 않아, 그 형태를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백제의 지배 계급이 고구려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고구려 복식과 거의 같았으리라고 추축할 뿐이다. 양나라의 '직공도'는 백제 복식의 귀중자료로 백제 사신이 입고 있는 가선된 저고리, 통 넓은 바지, 두루마기는 고구려와 거의 같은 모양이었다. 단지 옷단이자 허리띠가 고구려보다 넓은 것으로 보아 신분의 표시로 옷단이나 허리띠가 더욱 강조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아무튼 백제의 복식을 조사하며, 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에 대한 노고를 짙게 느낄 수 있었으며, 우리 나라의 옛 복식과 현대의 우리가 입고 있는 모습의 복식들을 비교 상상하건데, 이 과제는 내게 독특한 흥미를 유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으로 과제를 마친다. 마지막으로 이직도 미흡한 백제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복식사의 확고한 발전을 기원한다.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김동욱, 『백제의 복식』, 백제문화연구원, 1985 < 책의 사진 스캔>
이순애, 『한국복식사』, 한국방송통신대학21, 1983
안명숙 김용서, 『한국복식사』, 예향사, 1998,
권태열, 「백제복식에 관한 고찰」, 『백제연구3』, 충남대백제연구소, 1972 3~5
권주순, 『한대복식과 한복의 교류관계에 대한 연구』, 효성여대논문집, 1971
백영자, 『한국의 복식』, 경춘사, 1996
맹인제, 「백제의 공예」,『마한백제문화7』,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85
충청남도, 『백제재현단지조성조사연구보고서-문화예술』,
충남대학교 백제역사문화관 홈페이지
http://paekche.provin.chungnam.kr/ie/new_hist/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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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12
  • 저작시기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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