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평전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몽양 여운형 평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ⅰ. 왜 몽양 여운형 선생을 선택하였는가?
ⅱ. 왜 이기형 시인의 평전을 선택했는가?
ⅲ. 보고서를 어떻게 작성할 것인가?

Ⅱ. 본 론
ⅰ. 저자 이기형
ⅱ. 평전의 내용
(ⅰ) 출생 및 성장배경
(ⅱ) 일제강점(日帝强占)과 독립운동
(ⅲ) 해방조국의 하늘밑
ⅲ. 평 가
(ⅰ) 평전에 대한 평가
(ⅱ) 몽양에 대한 평가

Ⅲ. 결 론

본문내용

을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ⅱ) 주관적인 평가
몽양에 대하여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얼마 전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몽양을 처음 접했으니 중 고등학교 때에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중적으로도 이승만, 김구, 박헌영, 김일성 같은 사람은 잘 알지만 몽양은 잘 모르는 편인 것 같다. 몽양은 그 정치적인 무게가 이들에 비해 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잊혀진 정치가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무엇보다 몽양이라는 정치가의 현대적인 면모에 주목했다. 몽양이야말로 타고난 민족주의자 민주주의자였다. 이 시대에 몽양 같은 사람이 태어난다고 해도 전혀 옛날 인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 사람이 몽양이다. 그만큼 몽양은 당대를 뛰어넘는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사람이 멋있었으면 따르는 사람들이 몽양을 '사랑했다'는 비정치적인 용어까지 썼겠는가! 몽양은 지나가듯 만난 사람에게도 참 좋고 든든한 인상을 남길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통일을 앞둔(개인적인 희망이자 국민 모두의 염원이라고 생각하며) 오늘의 시점에서 몽양의 민족주의 민주주의를 다시 고려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며, 그의 타협노선은 평화노선으로 그의 좌우합작노선은 남북통일노선으로 확대되어 평화통일운동의 한 선구적 사례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인 평가에 있어서 몽양에 대해 '너무 찬양적이지 않은가?', '비판할 점은 없는가?' 등의 질문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한 사람에 대해 비판할 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한 가지 이상은 분명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몽양에게서 그러한 단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몽양은 그 당시 시대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을 택하여 자신의 희생을 무릎 쓰고서라도 조국과 민족을 구하려 했던 참 민족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몽양을 사랑한다. 그의 생애와 정치사상을 살펴본 후에도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우리 조국과 민족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생각한 참 민족주의자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쉽고 한탄스러운 점이 있다면 테러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그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마감하셨다는 점, 그 것 뿐이다."
Ⅲ. 결 론
몽양 선생이 살다 간 62년의 세월은 조선민족 근 현대사에서 망국-식민-분단의 시작이라는 비운의 소용돌이 한복판이었다. 그 속에서 그의 명성과 경력은 그 누구보다 화려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차장, 일본 제국의회에서 조선 독립을 주장한 식민지의 청년 애국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특별당원, 레닌 트로츠키 손문과 한국 독립운동을 논의했던 좌파 지식인,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처음 주도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자 조선체육회 회장, 해방공간을 뜨겁게 달군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 좌우합작 운동의 선봉, 남북연대 연합을 위해 38선을 5차례나 넘나든 최초의 정치인, 그리고 한국 역사상 12번이라는 가장 많은 테러
몽양이 당한 테러 중 알려진 것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몽양의 테러일지>
1. 1945년 8월 18일 오전 1시경 : 계동 자택 앞에서 곤봉으로 피습
2. 1945년 9월 7일 저녁 : 원서동에서 계동으로 넘어오다가 괴한들에게 밧줄로 묶임, 행인이 구제
3. 1945년 12월 상순 : 배천온천 여관에서 피습, 사전에 여관을 옮겨 무사
4. 1946년 1월 : 창신동 친구집을 괴한 5명이 습격, 출타중으로 위기 모면
5. 1946년 4월 18일 오전 9시 : 관수교에서 괴한들이 포위, 행인이 구출
6. 1946년 5월 8일 : 서울운동장에서 수류탄 테러, 사전 발각
7. 1946년 5월 하순 10시경 : 종로에서 괴한들에 포위, 격투 끝에 행인이 구출
8. 1946년 7월 17일 : 신당동 산에서 교살 직전 벼랑에서 낙하 도피
9. 1946년 10월 7일 저녁 : 자택 문전에서 납치
10. 1947년 4월 17일 밤 : 계동 침실 폭파, 출타로 구명
11. 1947년 5월 12일 하오 7시 30분 : 혜화동 로타리에서 권총으로 승용차 피습
12.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 혜화동 로타리에서 저격, 서거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pp. 416)
를 당한 비운의 정치가가 바로 몽양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은 몽양을 은도끼(silver ax)로 불렀다. 겉으로는 윤기가 나지만 은도끼로 나무를 자를 수 없듯이, 몽양도 언뜻 보기엔 유용하게 써먹을 만한데 도무지 써먹을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몽양에 대한 미군정의 시선은 늘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국 신사 같은 차림새와 준수한 외모, 뛰어난 웅변술, 인간적 매력으로 많은 미국인들을 매료시켰지만, 정치적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수수께끼에 답이 있듯이 몽양의 정치적 입장에도 답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 독립이었다. 그에게 익(翼)의 좌우와 친미 친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몽양은 미국과 소련을 한반도에 찾아온 '손님'이라 불렀고, 손님은 대접해 되돌려 보내고 한반도의 통일 독립은 한국인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관했다.
이렇듯 몽양은 20세기 세계적인 큰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인물이라고 하면 레닌, 손문, 간디, 모택동 등을 들 수 있지만 여기에 몽양도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준수한 인품과 학식, 정치철학과 지조, 그리고 독립운동의 활동역량은 분명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면에서 몽양은 요즘같이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요구되는 정치인 상이라 생각된다. 실로 좌 우를 초월하는 몽양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이다.
■ 참고자료
이기형, 『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 1984.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 머리가 희일수록 혁명 더욱 붉어졌다』, 한울, 1995.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http://mongyang.org).
<몽양 여운형>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4.06.19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608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