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문화제 답사 및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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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부산의 문화제 답사 및 기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충렬사

2.부산시립박물관

3.척화비

4.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5.고분동 고분과 박물관

본문내용

안의 아라가야는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풍부한 철산지의 보유로 신라, 백제의 계속적인 영토확장의 공격목표가 되어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권력을 한 국가에 응집시키지 못한 채 금관가야는 고구려를 배경으로 삼은 신라세력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으며 후기가야연맹 역시 백제의 강압과 회유에 의하여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동원되어 백제, 가야 연합군을 구성하여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 참여하게 되나 이 전쟁의 패배로 대가야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계속적인 영토확장을 꾀하여온 신라, 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야연맹 국가들은 하나의 통일된 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급성장하는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복천동 고분박물관 티켓)
박물관은 2개의 상설전시실과 야외전시관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제1전시실에는 복천동 고분군의 무덤형태를, 제2전시실에는 발굴된 각종 유물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었다.
먼저, 무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복천동 고분군의 무덤은 덧널무덤에서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그리고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변하였는데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 내에서도 여러 단계의 변화를 보인다. 복천동 고분군의 무덤의 변화는 여러 가야지역의 어느 가야군보다도 뚜렷하기 때문에 가야무덤의 구조와 변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하나의 지표가 되는 고분군이라고 할 수 있다.
(삼한 전기 무덤) (삼한 전기 독널무덤)
고분군에서 조사된 덧널무덤의 구조를 보면 각재 또는 판제로 덧널을 만들었는데, 각재로 덧널을 짜는 방법과 돌을 까는 것은 낙랑 덧널무덤과 같다. 그러나 덧널이 무너지지 않도록하기 위해 나무기둥을 세운 것이며, 널이 확인되지 않은 것은 요녕과 길림지역 등에서 발견된 덧널무덤과도 유사성이 있다. 부산 지역의 경우, 복천동 고분군에만 있어 내 시선을 끈 게 있었는데, 주인공을 안치하는 주덧널 외에 여러 가지 물품들을 넣기 위해 딸린덧널이 있는 덧널무덤이었다.
순장을 한 무덤도 있었다. 순장이란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묻는 장례행위를 가르키는 것이다. 가야지역의 순장이 확인된 것은 복천동 38호묘 주곽이고 가장 오래된 예라고 한다. 물론 옛날에 행해지던 인간의 인간에 대한 강한 지배와 예속의 관계를 나타내는 풍습이었지만, 지금 현재로 생각해볼 때 좀 끔찍한 장례풍습이라는 생각이 들어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구덩식돌덧널무덤도 나오는데, 4세기 후반 무렵, 지금까지 축조되어 온 덧널무덤으로만 된 무덤들에 돌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역에만 나타나는 특징적인 현상이다. 독널무덤과 앞트기식돌방무덤도 볼 수 있었다. 실제처럼 만든 모형들을 보면서 내가 그동안 글로만 보던 무덤 형태를 다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삼한 후기 목곽 묘)
3층으로 올라가서 이번엔 발굴된 유물들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삼국시대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 중에서 토기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무덤에 시신과 함께 넣는 부장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인데, 4세기 대에 들어서면서 새롭고 다양한 여러 종류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4세기 초에서 5세기 후반대까지 만들어진 복천동 고분군의 토기류 변천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중에서 특이한 모양 토기를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죽은 사람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는 장례의식에 사용되거나 신앙행위와 관련된 유물이라 생각된다. 오리, 말, 거북 등의 동물 모양 토기가 눈에 띄었는데 이것은 각기 동물이 가진 속성 에 대한 숭배신앙과 결부되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삼한 전기 목기, 철기) (삼한 전기 유적)
토기 유물은 시기별로 차이가 있었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 때까지의 함안의 아라비야계 토기와 고대 일본계 토기, 그리고 5세기 후반대의 창녕의 비화 가야계 토기가나와 당시 부산 지역과 이들 지역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5세기 전반대 이 후의 부산 고유의 지역 토기와 신라 토기의 혼재, 시기다 지날수록 신라토기의양이 많아지는 현상들은 부산 지역이 점차 신라의 지배로 편입되는 과정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삼한 전기 토기) (삼한 후기 생활 토기)
(삼한 전기 철기) (삼한 후기 철기)
부장품 중에서 토기를 제외하면 무기가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갑옷과 투구, 목가리개, 화살촉과 화살통, 고리자루큰칼 등을 볼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에 생활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비늘로 만든 갑옷이며 22호에서 출토된 표면이 얇은 청동판에 금박을 입혀 금동제 못으로 고정시킨 화살통들은 결코 지금에 비해 뒤쳐지지 않았다. 한없이 무지하고 투박한 삶을 살 거라고 상상했던 가야 시대의 사람들은 한없이 지혜롭고 또 섬세한 생활을 살아가고 있었다.
(부산 지역 삼국시대 갑옷) (무장 착용 모델)
박물관에는 거푸집을 이용하여 철을 만드는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많은 장신구를 볼 수 있었다. 신라처럼 화려하고 다양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부산 지역 삼국시대 시대별 토기) (부산 지역 삼국시대 장신구)
박물관 안에서의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고분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멀리서부터 푸른 잔디로 잘 정리된 고분을 보면서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저 정도로 깨끗하게 잔디로 고분을 가꾸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산에도 이렇게 좋은 문화재가 이렇게 좋은, 시민들의 산책로도 이용되고 있음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야외전시장에는 무덤 발굴 현장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는데, 관리하시는 분들의 정성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이번 리포터 제출을 위해 다시 내가 떠나는 여행길을 시작할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한다. 그리고 미흡하지만, 부산의 유적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좋았다. 작은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모르고 볼 때는 낯선 이름의 낯선 공간이지만, 그 역사적 의미를 알고 보면, 우리 나라의 공간, 우리의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인 듯 했다. 이런 조그마한 관심으로 시작하여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널린 민족의 문화 유산을 간직하고 가까이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키워드

부산,   역사,   문화재,   답사,   기행문,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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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26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7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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