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목차…………………………………………2
* 들어가며……………………………………3
Ⅰ. 미・중 관계의 역사……………………3
Ⅱ. 미・중 관계의 쟁점……………………5
Ⅲ. 전망………………………………………7
Ⅳ. 동북아 다자안보협력……………………8
* 참고문헌……………………………………10
* 들어가며……………………………………3
Ⅰ. 미・중 관계의 역사……………………3
Ⅱ. 미・중 관계의 쟁점……………………5
Ⅲ. 전망………………………………………7
Ⅳ. 동북아 다자안보협력……………………8
* 참고문헌……………………………………10
본문내용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아의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양국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 앞으로의 양상에 대한 예측을 통해 바람직한 동북아 정치질서를 위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았으면 한다.
Ⅰ. 미중관계의 역사
1. 냉전시대의 미중관계
중공정권 수립 이전기(~ 1949)
일본의 군사적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은 중국의 장개석 국민당정부를 지원하여 항일전을 유리하게 전개시키고 장차 미국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중국을 이끌어 가려고 하였다. 이후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은 친미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전의 결과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정국은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게 일방적으로 지원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국 공산당은 상대적으로 미국에 불만을 가졌다. 한때 모택동은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려고 하였으나 미국의 정책은 변화가 없었으며 이러한 결과는 1949년 중국 정권 수립후에도 지속되어 중국의 대미정책은 최초부터 미국에 적대적인 경향을 띄게 되었다.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과 중국의 적대적 대미정책기(1949~1961)
2차대전 종식후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양분된 세계하에서 중국은 미국을 주적으로 단정하고 소련과 밀월관계를 형성하였다. 이후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중국은 친소정책을 재확인하고, 미국은 이러한 중국에 대해 소련에게 실시하던 봉쇄정책을 중국에게도 확대하였다. 당시 미국은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면서 한국과 대만을 태평양방어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대중국 현상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였으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양국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미국의 당시 대중국 봉쇄정책은 중국에 대한 군사, 정치, 경제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즉 아시아·태평양 제국과 방위조약체결 및 전략기지에 대한 군사기지 설치, 중국의 유엔회원국이나 국제기구 가입 저지 및 미국의 우방국에 대해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저지, 중국에 대한 금수조치 및 우방국에 대한 공동보조 요구 등이었다. 동 시기에 미국은 상대적으로 대만과는 우호·협력관계를 형성하였다.
대미 적대정책 변환기(1961~1971)
1960년대부터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갈등관계로 변화(56년 10월 헝가리와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소련의 직접 개입과 후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으로)였고, 이후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자로 비난하고 스스로 정통 마르크스주의 국가임을 자처하며 혁명수출에 전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대미정책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으니 중국지도부는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대항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느끼고 전략적인 대미접근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65년 12월부터 중국 여행 제한을 점차 해제하였다. 이는 미국이 동 시기에 점차 강력해지는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중국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반소정책과 대미 국교수립기(1972~1979)
1971년에는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하여 핑퐁외교를 전개하였고 1972년 2월21일에는 닉슨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역사적으로 실시되었다. 상해공보가 발표되고 중국과 미국은 20년간의 벽을 허물게 되었던 것이다. 상해공보의 주요 골자는 중국과 미국의 쌍무관계에 대한 합의와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단정하는 것과 패권주의에 대한 반대로서 양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어떠한 세력권의 구축에도 반대한다는데 동의하였다. 이후 1978년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인 브레진스키는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전략적 역할을 더욱 중시하고 대소련 대항을 제의하였으며, 이러한 것은 중국 지도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 대한 소련의 압력은 더욱 거세어지고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이후 1978년 7월에 쌍방은 북경에서 국교수립을 위한 회담을 가졌으며 12월 16일에는 ‘건교연합공보’의 발표로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게 되었다. 이로써 미국과 대만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임을 미국이 승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79년부터 88년까지 10년간 양국 관계는 대체로 개선되었고 발전하였다. 우선 등소평, 레이건, 부시, 이선념, 조자양의 상호 방문을 통한 고위급 회담의 진전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1979년 7월 7일 무역협정 체결, 최혜국 규정, 중미 상업 무역 공동위원회, 경제위원회, 과학기술 위원회 설립하는등 무역의 신장을 도모하였다. 안보협력도 점진적 강화하여 1980년 1월 미 국방장관 브라운의 중국방문, 1981년 미 상무부의 수출규제 완화, 대만문제에 대해서도 3개 공동성명을 준수하는데 원칙적인 합의를 보고 있었다.
2. 탈냉전 시대의 미중관계
89년 천안문 사태를 맞으면서 양국관계는 다시 경색되었다. 1989년 6월 5일과 20일 부시 대통령은 64천안문 사태에 대해서 성명을 발표하고, 고위급 방문 연기, 고기술 상품 수출 금지, 무기 판매 금지, 군사 기술 협력 금지, 대중국 투자 금지 등을 포함하는 대중국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등으로 원만하지 못했던 미중관계는 92년말 각료급 수준의 대화를 재개함으로써 다소 긴장이 완화되었다. 이어서 클린턴 행정부는 93년에 인권과 무역문제를 연계시켜 중국에 제재를 가하려는 입장을 견지하였고 중국이 파키스탄에 미사일을 보내고 있다고 비난하고 대중국 경제 제재조치를 취하였다. 94년 미국 정부는 대만과의 관계증진을 선언하고 고위급 방문을 추진했으나 동시에 중국의 인권문제와 최혜국대우 문제의 연계를 해소함으로써 다시 양국이 접근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95년 대만의 이등휘 총통의 방미 사건으로 96년에 대만해협에서의 긴장이 촉발되고 이후 미일간의 협력증진의 필요성을 느끼는 미일이 미일 동맹을 강화하는 96년 8월 17일 안전보장에 관한 미일 공동선언을 발표하자 양국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중국은 미일방위협력 지침 체결에 지침에 반대해왔다. 새로운 미일방위협력지침의 목적은 양국의 군사동맹관계를 강화하고 아태지역에서의 미국 이익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Ⅰ. 미중관계의 역사
1. 냉전시대의 미중관계
중공정권 수립 이전기(~ 1949)
일본의 군사적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은 중국의 장개석 국민당정부를 지원하여 항일전을 유리하게 전개시키고 장차 미국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중국을 이끌어 가려고 하였다. 이후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은 친미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전의 결과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정국은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게 일방적으로 지원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국 공산당은 상대적으로 미국에 불만을 가졌다. 한때 모택동은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려고 하였으나 미국의 정책은 변화가 없었으며 이러한 결과는 1949년 중국 정권 수립후에도 지속되어 중국의 대미정책은 최초부터 미국에 적대적인 경향을 띄게 되었다.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과 중국의 적대적 대미정책기(1949~1961)
2차대전 종식후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양분된 세계하에서 중국은 미국을 주적으로 단정하고 소련과 밀월관계를 형성하였다. 이후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중국은 친소정책을 재확인하고, 미국은 이러한 중국에 대해 소련에게 실시하던 봉쇄정책을 중국에게도 확대하였다. 당시 미국은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면서 한국과 대만을 태평양방어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대중국 현상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였으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양국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미국의 당시 대중국 봉쇄정책은 중국에 대한 군사, 정치, 경제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즉 아시아·태평양 제국과 방위조약체결 및 전략기지에 대한 군사기지 설치, 중국의 유엔회원국이나 국제기구 가입 저지 및 미국의 우방국에 대해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저지, 중국에 대한 금수조치 및 우방국에 대한 공동보조 요구 등이었다. 동 시기에 미국은 상대적으로 대만과는 우호·협력관계를 형성하였다.
대미 적대정책 변환기(1961~1971)
1960년대부터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갈등관계로 변화(56년 10월 헝가리와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소련의 직접 개입과 후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으로)였고, 이후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자로 비난하고 스스로 정통 마르크스주의 국가임을 자처하며 혁명수출에 전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대미정책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으니 중국지도부는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대항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느끼고 전략적인 대미접근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65년 12월부터 중국 여행 제한을 점차 해제하였다. 이는 미국이 동 시기에 점차 강력해지는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중국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반소정책과 대미 국교수립기(1972~1979)
1971년에는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하여 핑퐁외교를 전개하였고 1972년 2월21일에는 닉슨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역사적으로 실시되었다. 상해공보가 발표되고 중국과 미국은 20년간의 벽을 허물게 되었던 것이다. 상해공보의 주요 골자는 중국과 미국의 쌍무관계에 대한 합의와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단정하는 것과 패권주의에 대한 반대로서 양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어떠한 세력권의 구축에도 반대한다는데 동의하였다. 이후 1978년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인 브레진스키는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전략적 역할을 더욱 중시하고 대소련 대항을 제의하였으며, 이러한 것은 중국 지도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 대한 소련의 압력은 더욱 거세어지고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이후 1978년 7월에 쌍방은 북경에서 국교수립을 위한 회담을 가졌으며 12월 16일에는 ‘건교연합공보’의 발표로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게 되었다. 이로써 미국과 대만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임을 미국이 승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79년부터 88년까지 10년간 양국 관계는 대체로 개선되었고 발전하였다. 우선 등소평, 레이건, 부시, 이선념, 조자양의 상호 방문을 통한 고위급 회담의 진전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1979년 7월 7일 무역협정 체결, 최혜국 규정, 중미 상업 무역 공동위원회, 경제위원회, 과학기술 위원회 설립하는등 무역의 신장을 도모하였다. 안보협력도 점진적 강화하여 1980년 1월 미 국방장관 브라운의 중국방문, 1981년 미 상무부의 수출규제 완화, 대만문제에 대해서도 3개 공동성명을 준수하는데 원칙적인 합의를 보고 있었다.
2. 탈냉전 시대의 미중관계
89년 천안문 사태를 맞으면서 양국관계는 다시 경색되었다. 1989년 6월 5일과 20일 부시 대통령은 64천안문 사태에 대해서 성명을 발표하고, 고위급 방문 연기, 고기술 상품 수출 금지, 무기 판매 금지, 군사 기술 협력 금지, 대중국 투자 금지 등을 포함하는 대중국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등으로 원만하지 못했던 미중관계는 92년말 각료급 수준의 대화를 재개함으로써 다소 긴장이 완화되었다. 이어서 클린턴 행정부는 93년에 인권과 무역문제를 연계시켜 중국에 제재를 가하려는 입장을 견지하였고 중국이 파키스탄에 미사일을 보내고 있다고 비난하고 대중국 경제 제재조치를 취하였다. 94년 미국 정부는 대만과의 관계증진을 선언하고 고위급 방문을 추진했으나 동시에 중국의 인권문제와 최혜국대우 문제의 연계를 해소함으로써 다시 양국이 접근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95년 대만의 이등휘 총통의 방미 사건으로 96년에 대만해협에서의 긴장이 촉발되고 이후 미일간의 협력증진의 필요성을 느끼는 미일이 미일 동맹을 강화하는 96년 8월 17일 안전보장에 관한 미일 공동선언을 발표하자 양국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중국은 미일방위협력 지침 체결에 지침에 반대해왔다. 새로운 미일방위협력지침의 목적은 양국의 군사동맹관계를 강화하고 아태지역에서의 미국 이익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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