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종전 이전 소련의 한국문제 인식과 정책 구상
3. 종전 이후 소련의 대한 정책 (1945. 8~12. 말)
1) 런던 외상회의 (1945. 9~10) 전후 소련의 대일본·한국정책
2) 모스크바 3상회의 (1945. 12) 에서의 한국문제 결정과 그 성격
4. 소군정하 북한에서 분단질서의 맹아 형성 (1945. 8~12. 말)
5.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와 분단질서의 형성 (1946. 1~6)
1) ‘탁치정국’과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출범
2)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정책 변화
6. 결론
2. 종전 이전 소련의 한국문제 인식과 정책 구상
3. 종전 이후 소련의 대한 정책 (1945. 8~12. 말)
1) 런던 외상회의 (1945. 9~10) 전후 소련의 대일본·한국정책
2) 모스크바 3상회의 (1945. 12) 에서의 한국문제 결정과 그 성격
4. 소군정하 북한에서 분단질서의 맹아 형성 (1945. 8~12. 말)
5.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와 분단질서의 형성 (1946. 1~6)
1) ‘탁치정국’과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출범
2)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정책 변화
6. 결론
본문내용
우호적인 성격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 사회주의 진영 및 중도진영으로서 3상회의 결의를 지지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정부 구성 문제를 논의하기도 전에,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에 참여할 정당 사회단체들의 자격문제를 미·소간에 합의하지 못하여 결렬에 이르게 된다.
2)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정책 변화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5월 7일 결렬되면서 소련주둔군은 사실상 분단국가 수립의 방향을 현실화하는 제반 조치를 모색하게 된다. 소련군 지도부는 인민위원회 선거, 산업시설의 한국측 이양, 산업 재건 지원, 군대 창설등 북한지역에서의 국가건설을 위한 중요 조치를 모두 실현에 옮길 것을 소련 본국에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요청은 상당부분 현실화 되었다.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소련측은 이 위원회의 재개에 소극성을 보이면서, 사실상 북한지역에서의 분단국가 수립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6. 결론
소련의 전후 대한 정책이 한국 분단질서 형성에 미친 영향과 그 성격, 그리고 그러한 정책에 대응한 북한 사회주의 세력의 '민주기지론'형성 문제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군이 어떠한 이해관계나 장기 계획도 없이 단지 일본군 무장해제만을 위해 북한 지역에 주둔하였다는 해석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대로 소련이 처음부터 또는 해방초기부터 이미 분단국가 수립 방침을 세운 상태에서 북한 주둔 정책을 취한 것도 아니다. 종전 전후한 시점에 소련의 대한정책의 기본 원칙은 한반도가 다른 국가들에 의해 소련 국가를 위협하는 전진기지로 또다시 이용되는 일이 없도록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한반도에서 창출하기 위하여 다른 연합국들과 합의를 도출해낸다는 것이었다. 종전 이후 미·소 양국 군대가 한반도를 분할 주둔하게 되면서 소련의 대한정책에는, 위의 기본 원칙이 실현될 때까지 주둔지인 북한 지역에서 먼저 자신의 지지 기반을 창출해간다는 방침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해방 초기 대한정책은 사회주의체제의 확대라고 하는 이념적 성격보다는 소련이라고 하는 국가의 한반도에서의 이해 관계 - 특히 군사 전략적 이해관계 - 를 보장한다고 하는 현실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소련은 자신의 국가적 이해관계와 관련하여 한국에 세워질 국가의 장래에 대해 일정한 범위를 설정해 놓은 것이며, 그러한 범위 안에서는 통일문제에서나 건설될 국가의 체계적 성격에서나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둘째, 그러나 소련의 위와 같은 정책은 실제로는 상호 모순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소련은 국제적인 합의를 통한 한국 통일정부 수립을 기본 원칙으로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북한 지역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는 남한 지역에서 미국이 취한 그와 동일한 노력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분단질서가 조기에 형성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연합국간의 합의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의 가능성은 좁혀져갈 수 밖에 없었다.
셋째, 이와 같은 국제적 조건을 고려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세력이 '민주기지론'적인 국가 건설 방침을 세운 시점은 1945년 말의 시점으로 판단된다. 이 방침은 1946년 초 한국 정치세력들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지지 여부를 놓고 좌우 양대 진영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보다 확고한 방침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되는 1946년 여름의 시점에 한국사회주의 세력은 분단국가의 수립 가능성에 대비하게 되며, 남한 지역에서 혁명의 길이 차단되어 분단질서가 고착화됨에 따라, 1948년도에 두 개의 분단 정부 수립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2)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정책 변화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5월 7일 결렬되면서 소련주둔군은 사실상 분단국가 수립의 방향을 현실화하는 제반 조치를 모색하게 된다. 소련군 지도부는 인민위원회 선거, 산업시설의 한국측 이양, 산업 재건 지원, 군대 창설등 북한지역에서의 국가건설을 위한 중요 조치를 모두 실현에 옮길 것을 소련 본국에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요청은 상당부분 현실화 되었다.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소련측은 이 위원회의 재개에 소극성을 보이면서, 사실상 북한지역에서의 분단국가 수립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6. 결론
소련의 전후 대한 정책이 한국 분단질서 형성에 미친 영향과 그 성격, 그리고 그러한 정책에 대응한 북한 사회주의 세력의 '민주기지론'형성 문제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군이 어떠한 이해관계나 장기 계획도 없이 단지 일본군 무장해제만을 위해 북한 지역에 주둔하였다는 해석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대로 소련이 처음부터 또는 해방초기부터 이미 분단국가 수립 방침을 세운 상태에서 북한 주둔 정책을 취한 것도 아니다. 종전 전후한 시점에 소련의 대한정책의 기본 원칙은 한반도가 다른 국가들에 의해 소련 국가를 위협하는 전진기지로 또다시 이용되는 일이 없도록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한반도에서 창출하기 위하여 다른 연합국들과 합의를 도출해낸다는 것이었다. 종전 이후 미·소 양국 군대가 한반도를 분할 주둔하게 되면서 소련의 대한정책에는, 위의 기본 원칙이 실현될 때까지 주둔지인 북한 지역에서 먼저 자신의 지지 기반을 창출해간다는 방침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해방 초기 대한정책은 사회주의체제의 확대라고 하는 이념적 성격보다는 소련이라고 하는 국가의 한반도에서의 이해 관계 - 특히 군사 전략적 이해관계 - 를 보장한다고 하는 현실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소련은 자신의 국가적 이해관계와 관련하여 한국에 세워질 국가의 장래에 대해 일정한 범위를 설정해 놓은 것이며, 그러한 범위 안에서는 통일문제에서나 건설될 국가의 체계적 성격에서나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둘째, 그러나 소련의 위와 같은 정책은 실제로는 상호 모순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소련은 국제적인 합의를 통한 한국 통일정부 수립을 기본 원칙으로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북한 지역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는 남한 지역에서 미국이 취한 그와 동일한 노력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분단질서가 조기에 형성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연합국간의 합의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의 가능성은 좁혀져갈 수 밖에 없었다.
셋째, 이와 같은 국제적 조건을 고려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세력이 '민주기지론'적인 국가 건설 방침을 세운 시점은 1945년 말의 시점으로 판단된다. 이 방침은 1946년 초 한국 정치세력들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지지 여부를 놓고 좌우 양대 진영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보다 확고한 방침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되는 1946년 여름의 시점에 한국사회주의 세력은 분단국가의 수립 가능성에 대비하게 되며, 남한 지역에서 혁명의 길이 차단되어 분단질서가 고착화됨에 따라, 1948년도에 두 개의 분단 정부 수립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