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한국사에 봉건제가 존재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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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한국사에 봉건제가 존재하였는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序 論

Ⅱ. 本 論
1. 봉건제 의미
2. 서양의 봉건제
3. 중국의 봉건제
4. 한국의 봉건제

Ⅲ. 結 論

본문내용

토지소유
조선전기에 양반 사대부는 국가로부터 자득하는 세력이었다. 양반의 자득은 국왕국가와의 관계에서, 의리의 유무에서 찾는 사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군신관계는 양자 사이에 의리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명분에서만 절대성을 가졌다. 이는 단순히 사사의 계약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양반 사대부는 존재의 우월성특권성지배성을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나라 양반 사대부의 자존의식의 발현으로서 자타가 ‘봉건’으로서 비견하고 간주하고 있던 데서 극명하다. 이 봉건은 원래의 봉국건후의 제도가 가진 기능과 정신에서 의미가 그렇다는 것이다.
양반 사대부는 국왕국가에 대해 통치에 참여하고 협조하는 만큼의 대우를 당연스럽게 요구하여 봉건의 기능을 지녔다. 이러한 봉건은 과전의 분급, 녹봉의 절급등으로 대표된다. 농장은 이런 기반을 사대부 양반이 사적 소유를 통해 조성한 것이고, 따라서 으레 녹조를 취식해 농과 스스로 차별하고 이들을 지배하는 요건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전기, 토지소유와 연관한 양반의 봉건은 지배신분으로서 토지의 사적 소유와 노비제전호제에 입각해 스스로 식녹식조하고 농민을 지배하며 이를 기반으로 왕조국가에 대해 자기 처신의 독자성 곧 진퇴의 자득을 보지한 채 국가권력에 참여하고 만인을 통치하고 향촌을 주도하는 그러한 봉건이었다. 집권관료제와 군현제 속에서 봉건은 그 원리로서 운영의 전제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수령을 제후에 비기고 지주토주로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를 주축으로 이뤄진 조선전기의 사회는 체계상 중세봉건의 연속이었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집권봉건사회집권봉건국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봉건은 시대의 진전에 따라 구체내용은 변모하면서도 그 원리와 기능은 장구한 기간에 걸쳐 작용하였다. 고려 시기나 그 이전 시기에는 조선전기에 비해 더욱 전형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조선후기를 거치고 근대 개혁기에 들어오면서는 변혁의 대상이 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전화하고 있었다.
Ⅲ. 結 論
세세한 부분을 제쳐두고 봉건제의 특징인 지배예속적 특징을 두고 본다면 한국사에도 봉건제적 특징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집권국가가 최초로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는 삼국 시대이후 조선시대까지 그 시대마다의 많은 정치, 사회, 문화적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결국 그러한 변화도 시대가 흘러가면서 점차 제도가 수정보완되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이든지 봉건제의 포괄적 특징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통일 신라 이후에 비로소 사적 토지 소유의 형태가 나타났으며 그 당시의 토호 계층인 촌주호장 등이 소유주체로 등장하고 있으나 지주라고 부를 수 있는 계층은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에 걸친 기간을 통하여 나타났다. 이 기간에는 휴한농법에서 연작농법으로 완만하게 진행되었으며, 민전에 대한 소유권의 강화를 국가가 인정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상품경제의 진전에 따라 토지매매가 성행하여 소유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개별적 지주에 의한 완전한 사적 예속관계가 아닌, 국가적으로 집약, 편성된 존재로서 지주와 전호와의 관계가 나타나고 있어서, 유럽 봉건제도 아래에서의 영주와 농노와의 관계와는 차이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인 지주를 식민지 지배의 사회적 기반으로 삼고자 한 지주제의 보호육성책으로 말미암아 지주적 권리가 강화되어 농민이 토지로부터 급격히 이탈되었으며 기생지주가 현저히 나타났다. 그러나 지주는 경제 외적 강제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소작 농민도 이주, 전업의 자유가 있어서 언제든지 임금노동자로 변신 할 수 있었던 점에서 기존의 봉건적 토지소유와는 다르다.
한국사에 있어서 봉건적 특징은 거의 전 시대를 걸쳐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것이 서양적 봉건제도와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한국 사회에 봉건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한국은 한국 나름의 특이성을 포함한 ‘한국적 봉건제도’가 존재한다. 주제와는 조금 벗어나는지도 모르겠지만 식민주의 사관 중에는 ‘정체성론’을 통해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는 주장이 있다. ‘정체성론’이라는 주장의 핵심은 한국은 자본주의의 전 단계인 봉건제도를 겪어보지 못했으므로 한국의 사회경제는 자력으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론’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한국의 한국적 봉건제도를 증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일부 학자들 중에는 봉건제도란 말 자체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봉건주의 사회에 대한 본질을 밝히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한국적인 특성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먼저 전형적인 서구 봉건주의 사회만이 봉건주의 사회의 전부일 수는 없다는 데서 아시아적인 특수성을 살펴, 아시아적 봉건주의 사회의 개념이 따로 설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여 한국에 있어서의 봉건주의 사회의 성립을 검토해야 될 것이다. 한국사에 있어서 봉건제적 성격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많지 않다. 그러나 봉건제의 서양적 의미를 한국사에 그대로 투영시키는 데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서양의 봉건제가 그대로 우리 역사에 반영 될 순 없다고 생각하지만 큰 특징적인 면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된다. 서양적 봉건제의 한국사주입에 대해 비판하는 학자들을 보면 서양의 봉건제와 우리 나라 생활 방식의 몇 가지 차이점을 들면서 서양식 봉건제는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봉건제적 특징을 가진 시대는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 것인가? 역시 서양 봉건제를 한국사에 바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역사에 맞는 봉건적 특징을 갖는 시대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말을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당장 ‘라면’을 ‘김치’로 부르자고 한다면 큰 혼란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점은 그 때 그 때 고쳐나가야 한다. 그런 혼란의 문제는 단지 적응기간의 차이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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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30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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