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도서 소개
2. 저자의 생애와 사상
3. 서평
4. 느낌
관련서적
2. 저자의 생애와 사상
3. 서평
4. 느낌
관련서적
본문내용
성취에 대한 은총, 또는 관계의 좌절이나 오해에 대한 형벌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신은 죽었다"라는 슬로건에서 모든 초월적 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듯 현대의 신학은 자기 쇄신과 인간의 해방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와 포이에르바하 간의 근본적 일치점과 상이점은 우리를 현대인의 종교생활의 중심적 쟁점으로 이끌어 낸다. 양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치한다. 즉 종교를 믿는 것은 인간을 믿는 것이고,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이며, 기독교를 믿는 것 자체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어떤 인간적인 것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포이에르바하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냐 비존재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을 인간에게 돌려주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하여 인간을 한없이 믿는데 반해, 바르트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19세기와 20세기의 차이점이다.
4. 느낌
예수님은 우리에게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이 말씀은 "빵도 필요하지만, 그러나"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기독교 인간학이 가지는 가장 구체적이고 피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 현실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반성하여야 한다. 자고 초라한 교회가 문제가 아니다. 소위 잘 나간다는 대형교회, 부와 권세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바로 그 교회가 문제다. 신문지상에 소개되는 교회의 갖가지 문제를 이 글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교인들이 성서는 들고 다니지만, 얼마나 하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지, 아니면 한국의 재래 토속신앙의 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구원의 정복과 기복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마귀들의 역사가 한 판 굿을 치는 지도 모르면서 눈만 뜨면 수 천 억의 대형교회가 숲을 이루도록 지어가면서 세 불림에만 혈안이 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성서를 착실하게 가르쳐서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이 성서의 빛에 따라 꾸준히 형성된에 따라 교회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연예인을 동원하여 부흥회를 연다든가, 열광적인 산기도 등을 통하여 성도들의 감정을 뜨겁게 하여 열심을 내게함으로써 교회부흥
을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최면술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빈곤 때문에 빵의 현실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의 형편없는 자질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 빛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150년 전에 이러한 갖가지 종교와 신앙의 모순을 뿌리 깊게 파헤치면서 오직 인간을 위한 인간의 종교를 구가하고자 하였던 포이에르바하를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 한번 오늘의 교회현상과 비견해 볼 수 있는 기회로 맞이하고자 한다.
관련 서적
기독교의 본질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 강대성 / 한길사 / 1992
바르트와 포이에르바하 간의 근본적 일치점과 상이점은 우리를 현대인의 종교생활의 중심적 쟁점으로 이끌어 낸다. 양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치한다. 즉 종교를 믿는 것은 인간을 믿는 것이고,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이며, 기독교를 믿는 것 자체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어떤 인간적인 것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포이에르바하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냐 비존재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을 인간에게 돌려주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하여 인간을 한없이 믿는데 반해, 바르트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19세기와 20세기의 차이점이다.
4. 느낌
예수님은 우리에게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이 말씀은 "빵도 필요하지만, 그러나"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기독교 인간학이 가지는 가장 구체적이고 피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 현실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반성하여야 한다. 자고 초라한 교회가 문제가 아니다. 소위 잘 나간다는 대형교회, 부와 권세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바로 그 교회가 문제다. 신문지상에 소개되는 교회의 갖가지 문제를 이 글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교인들이 성서는 들고 다니지만, 얼마나 하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지, 아니면 한국의 재래 토속신앙의 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구원의 정복과 기복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마귀들의 역사가 한 판 굿을 치는 지도 모르면서 눈만 뜨면 수 천 억의 대형교회가 숲을 이루도록 지어가면서 세 불림에만 혈안이 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성서를 착실하게 가르쳐서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이 성서의 빛에 따라 꾸준히 형성된에 따라 교회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연예인을 동원하여 부흥회를 연다든가, 열광적인 산기도 등을 통하여 성도들의 감정을 뜨겁게 하여 열심을 내게함으로써 교회부흥
을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최면술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빈곤 때문에 빵의 현실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의 형편없는 자질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 빛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150년 전에 이러한 갖가지 종교와 신앙의 모순을 뿌리 깊게 파헤치면서 오직 인간을 위한 인간의 종교를 구가하고자 하였던 포이에르바하를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 한번 오늘의 교회현상과 비견해 볼 수 있는 기회로 맞이하고자 한다.
관련 서적
기독교의 본질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 강대성 / 한길사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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