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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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본론
1. 시대배경
2. 무인 정권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
3. 무인 정권 하의 농민 천민 난
4. 사회사적 의의

결론

본문내용

공격하여 함락시키었다. 적이 경손이 나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주성(州城)을 포위하는데 적이 수풀처럼 빽빽히 모였다. 경손이 말하기를, "적이 비록 많으나 모두 짚신을 신은 촌 백성 뿐이다." 라 하고, 곧 별초가 될 만한 자 30여 명을 모집하여 부로(父老)들을 모아놓고 울면서 말하기를, "너희 고을은 어향인데 다른 고을에 따라 적에게 항복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하니, 부로가 땅에 엎드려 울었다. 경손이 출전하기를 재촉하니 좌우에서 말히기를, "오늘의 일은 우리 군사는 적고, 적은 많으니, 청하건대 다른 주군(州郡)의 군사를 기다려 싸우게 하소서." 하였다. 경손이 노하여 꾸짖었다. 이보다 먼저 연년이 그 도당에게 말하기를, "지휘사는 귀주에서 성공한 대장이라 인망이 매우 중하니 내가 마땅히 산 채로 잡아서 도통(都統)을 삼을 것이니 활로 쏘지 말라." 하였다. 이 날도 적이 또 경손이 흐르는 살에 맞게 될까 두려워하여 모두 궁시(弓矢)를 갖지 않고 짧은 칼로 싸웠다. 전투가 시작되자 연년이 곧장 앞으로 나와 경손의 말고삐를 잡고 나가려고 하였다. 경손이 칼을 빼어 싸움을 동독하니, 별초들이 죽기로써 싸워 연년을 베이고 이긴 기세를 타 쫓으니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고려사절요』16, 고종 24년)
★. 부흥운동들 역시 난에 일반 민중의 참여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농민 천민 난와 한 맥락으로 생각 할 수 있다.
⑨ .이 밖에도 남적에 의한 최초의 민란이라는 석령사의 난, 손청의 난 등 문헌상에 알려지지 않은 크고 작은 많은 민란 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 신라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표면적으로 제시한 것들도 있으나 무신정권하의 하극상적 분위기와 농민 천민 층의 자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 남적이란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민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반대로 북쪽을 중심으로 민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서적이라고 불려졌다.
4. 사회사적 의의
① 민중들의 항쟁이었다는 데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서양은 시민 혁명을 통해 민주화를 크게 진작시키고 발전시켜 나갔다. 물론 이 시기에 발생했던 민란이 그 정도의 힘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지만 민중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무단적인 권력에 항거했다는 에 큰 의의 가 있다.
② 민란을 통해 권익을 진작시켰다는 데 또한 큰 의의가 있다. 민란을 통해 집권 무신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그로 하여금 대책을 마련케 함으로서 자신들의 권익을 신장 시켰다는데 의의가 있다.
③ 중세를 무너뜨리고 한 단계 앞선 근세를 태동시킬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는 데 의의가 깊다. 사회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것은 큰 사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물론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가장 직접적 계기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루어진 무신정변과 그 아래에서 이루어진 민란 역시 근세로 가는 길을 마련해준 계기가 되었다.
④ 특히 천민에 의해 이루어진 민란은 신분해방운동의 성격까지 뜨고 있었다. 비록 신분의 해방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향소부곡 민들이 현으로 승격되는 등 일부의 성과도 나타났다.
결론
양수척
양수척이여
너도 사람의 자식인데
어째서 남자는 나면 종이 되고
여자는 나서 종년이 되는가
양수척이여
너도 하늘의 백성인데
어째서 남자는 시와 예를 배우지 못하고
여자는 옷하고 베 짜기를 못하는가
소 잡고 고리 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사람 속에 끼지 못하니 누구 탓인가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거란의 부대가 동쪽 나루로 침범했던 일을
또 듣지 못했는가
왜구로 꾸며 연등 놀이 저자에서 행패를 무린 일을
양수척이여
진실로 하늘의 백성 사람의 자식이
속에 원한의 독을 품은 것이 마땅하도다
위시는 조선시대 사람 이학규가 지은 양수척이란 작품이다. 작자는 조선시대 사람이지만 내용은 고려 시대의 것이다. 위시의 내용으로 볼 때 그 당시 농민 특히 천민의 어려움 한이 대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고려 시대는 문벌 귀족의 사회였다. 이 귀족 사회가 계속되면서 많은 모순이 대두했다. 이것이 폭발한 것이 무신정변이었다. 귀족 사회에서보다 더심한 착취가 농민 천민 계급에게 지워 졌고 그 결과 민중들은 난을 일으켰다. 난은 여러 가지 성격으로 발생했다. 문신이 주축이 되었던 조위총의 난에서도 일반 농민 천민이 참여했으며 만적의 난 이나 명학소의 난에서처럼 천민이 중심에 서서 일으킨 난이 있는가 하면 동경민란처럼 대규모의 난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백제, 고구려의 부흥운동의 성격을 띈 것도 있었다 이러한 농민 천민 난은 그 발생방식의 성격은 다를지라도 민란의 원인은 하나였다.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천민 신분에 대한 차별이었다. 물론 이러한 민란들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민중의식의 성장을 보여준 점. 그리고 미약하지만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향 소 부곡의 현 승격), 근세로 발전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등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 느낀 점
① 역사가 발전하는데 있어 많은 사람들의 피와 용기가 작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안정되고 앞선 사회를 가꾸고 지켜야 한다는 점
② 우리에게도 서양의 시민혁명과 비슷한 일반민중의 자각과 함께 이루어진 항쟁이 있었다는 점 그러나 아쉽게 서양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에 그친 점이 아쉬웠다.
③ 교과서로만 배우고 암기하기 급급했던 역사교육이 직접 자료를 찾아보고 느낌으로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우리 민족으로서 느낄 수 있는 자긍심을 함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를 왜곡하려하는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우리역사를 바로 아는 것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④ 이제 까지 알고 있던 역사적 지식들이 단편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예로 고려시대 민란이라 하면 망이 망소이 만적의 난등 이름만 알거나 간략한 개요만 알고 있었을 뿐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고등교육을 통해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알아 가는 기쁨을 앞으로 맛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⑤ 많은 자료를 찾아보게 되면서 같은 역사라 할지라도 사관에 따라 그 내용이 많이 달라짐을 알수 있었다. 긍정적으로 기술한 책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 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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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6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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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8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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