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발해의 건국
발해의 발전
발해의 혼란
발해의 멸망
발해의 정치기구
발해의 사회경제
발해의 문화
발해의 발전
발해의 혼란
발해의 멸망
발해의 정치기구
발해의 사회경제
발해의 문화
본문내용
강한 나라에서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팽창 정책은 문왕때 이르러 일단락되고,내부 정비가 시작되었다.
발해의 발전
문왕은 무왕의 대. 내외 정책을 계승하면서 국내 문제에 집중하였는데, 수도를 동모산에서 300리 떨어진 상경용 천부(대흥 18년:755년)로 옮기면서 발해는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 활동 규모가 커지자, 국토의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5경15부 62주라는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 등 문왕 시대에 이르러 발해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신라는 발해에 의식하여 경덕왕 21년 (762) 여름 5월에 황해도 지역에 6성을 축조하고 성에 태수를 두는 등 발해에 대비하였고, 발해는 북청 지역의 남경남해부를 중심으로 동해안 지역을 방어하였다.
문왕 시기에 발해는 일본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면서 신라를 견제하였고, 요동 지역 및 남부 지역의 영토 확장에도 주력하였다.
758년 일본이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협공계획\'을 제의하였고, 적극적인 일본은 5차례나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이 신라 침공 계획을 세웠던 것은 일본사신이 신라 정부에 무시당하고 돌아온 이유였지만, 실상은 내부 문제를 대외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발해는 당의 안록산 난(755-763)을 계기로 신라보다는 요동 지역 진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또한 발해는 안록산의 난으로 수도 방어의 부담을 벗어나고자 상경용 천부로 천도하였다. 무엇보다도 군사력을 두 군데 나뉜다는 부담이 크게 작용하였다.
발해는 일본의 파견 사신을 무관(759)에서 문관(762)으로 바꾸어 사실상 신라 협공 계획을 포기하였다. 일본 역시 그 이후 흐지부지 되어 침공 계획은 무산되었다. 790년 문왕 말년 적대국이던 신라에서 사신이 파견되었다.
문왕은 대흥48년(785년) 수도를 동경용원부로 옮겼으며,794년 수도를 다시 상경용 천부 옮기는 등 정치적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문왕 말기의 귀족들과 왕족들간의 내부 투쟁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발해의 혼란
문왕 말기부터 시작된 정치적 내분은 문왕의 사망 후 더욱 심화되었다.
문왕 이후, 발해는 귀족들의 내부 문제로 25년 동안 왕이 6명이 바뀌는 등 정치적인 혼란에 빠졌는데,4대 원의 왕의 재위는 1년,5대(중흥) 성왕은 1년도 안 되었으며 6대(정력) 강왕은 15년,7대(영덕) 정왕은 2년,8대(주작) 희왕은 4년,9대(태시)간왕 역시 1년도 안 되어 물러났다.1)
성왕때 수도를 동경 용원부에서 다시 상경용 천부 돌아온 이유는 정치적 이유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문왕 말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겼지만, 그 뒤 상경용 천부 출신의 귀족(국인 세력)들이 강력히 반발하여 돌아온 것으로 생각된다.795년 일본에 파견되었던 발해 사신이 휴대했던 국서를 통해서 발해 내부 사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강왕은 즉위하기 전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관제들이 의로움을 생각하여 뜻과 감정을 억누르고 협력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선 왕의 업적을 계승했다고 하였다. 이것은 강왕
팽창 정책은 문왕때 이르러 일단락되고,내부 정비가 시작되었다.
발해의 발전
문왕은 무왕의 대. 내외 정책을 계승하면서 국내 문제에 집중하였는데, 수도를 동모산에서 300리 떨어진 상경용 천부(대흥 18년:755년)로 옮기면서 발해는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 활동 규모가 커지자, 국토의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5경15부 62주라는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 등 문왕 시대에 이르러 발해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신라는 발해에 의식하여 경덕왕 21년 (762) 여름 5월에 황해도 지역에 6성을 축조하고 성에 태수를 두는 등 발해에 대비하였고, 발해는 북청 지역의 남경남해부를 중심으로 동해안 지역을 방어하였다.
문왕 시기에 발해는 일본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면서 신라를 견제하였고, 요동 지역 및 남부 지역의 영토 확장에도 주력하였다.
758년 일본이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협공계획\'을 제의하였고, 적극적인 일본은 5차례나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이 신라 침공 계획을 세웠던 것은 일본사신이 신라 정부에 무시당하고 돌아온 이유였지만, 실상은 내부 문제를 대외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발해는 당의 안록산 난(755-763)을 계기로 신라보다는 요동 지역 진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또한 발해는 안록산의 난으로 수도 방어의 부담을 벗어나고자 상경용 천부로 천도하였다. 무엇보다도 군사력을 두 군데 나뉜다는 부담이 크게 작용하였다.
발해는 일본의 파견 사신을 무관(759)에서 문관(762)으로 바꾸어 사실상 신라 협공 계획을 포기하였다. 일본 역시 그 이후 흐지부지 되어 침공 계획은 무산되었다. 790년 문왕 말년 적대국이던 신라에서 사신이 파견되었다.
문왕은 대흥48년(785년) 수도를 동경용원부로 옮겼으며,794년 수도를 다시 상경용 천부 옮기는 등 정치적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문왕 말기의 귀족들과 왕족들간의 내부 투쟁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발해의 혼란
문왕 말기부터 시작된 정치적 내분은 문왕의 사망 후 더욱 심화되었다.
문왕 이후, 발해는 귀족들의 내부 문제로 25년 동안 왕이 6명이 바뀌는 등 정치적인 혼란에 빠졌는데,4대 원의 왕의 재위는 1년,5대(중흥) 성왕은 1년도 안 되었으며 6대(정력) 강왕은 15년,7대(영덕) 정왕은 2년,8대(주작) 희왕은 4년,9대(태시)간왕 역시 1년도 안 되어 물러났다.1)
성왕때 수도를 동경 용원부에서 다시 상경용 천부 돌아온 이유는 정치적 이유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문왕 말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겼지만, 그 뒤 상경용 천부 출신의 귀족(국인 세력)들이 강력히 반발하여 돌아온 것으로 생각된다.795년 일본에 파견되었던 발해 사신이 휴대했던 국서를 통해서 발해 내부 사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강왕은 즉위하기 전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관제들이 의로움을 생각하여 뜻과 감정을 억누르고 협력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선 왕의 업적을 계승했다고 하였다. 이것은 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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