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간행의 배경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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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와 목적
2. 훈민정음의 창제자
3. 한글의 명칭과 유래
4. 한글창제에 관한 공박
5. 세종대왕의 한글정책
6. 한글창제의 역사적 의미

본문내용

았고 따라서 백성글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15세기에 와서는 갑자기 글 모르는 백성들의 처지를 치자층이 동정하게 되었으며, 또 왜 지금까지 없었던 백성들과의 의사 소통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 던가 하는 점에 의문이 남는다.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하여 대체로 두가지 대답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이 시기에는 이미 치자층만이 문자생활을 누리고서는 더 지탱할 수 없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이 백성의 세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고, 둘째는 15세기 이전의 전체 역사 시대를 통하여 어느 군왕도 가질 수 없었던 백성에 대한 어여삐 여김을 세종대왕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글 모르는 백성의 불편함을 이때 처음 알게 되었고 백성과의 의사 소통도 비로소 생각하게 된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대답 가운데 어느 것이 역사적 대답이 될 수 있는가를 가려내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세종대왕의 백성에 대한 어여삐 여김이 한글 창제의 동기라고 보는 생각을 음미해보자.
한글 창제와 같은 우리 문화사상 최대의 사실이 비록 전제권력을 가진 군주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자애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역사적인 해석이 될 수 있겠는가?
어느 개인의 능력이나 심리상태가 역사적 사실의 중요 원인으로 부각되면 역사가 우연의 소산물로 이해되거나 영웅주의적 역사관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글창제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시 의문이 재게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첫째는 한글을 만든 것은 분명히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한글을 만들지 않을수 없게 한 것은 누구인가하는 의문이며, 둘째는 한글이 정말 전적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우선 한글을 만들게 한 것은 백성 세계의 변화이며 그것은 또 15세기 우리의 역사조건이다. 15세기에도 양반때문에는 전혀 새로운 문자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이 만들어진 뒤에도 양반들의 문자생활은 한문중심으로 계속되었다. 15세기에 와서 한글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왕조의 훈민정책에 일환이었다.
고려시대까지도 글을 가르쳐서까지 백성을 훈도하지 않아도 다스릴 수 있었는데, 조선초에 와서는 글을 가르쳐서 다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었거나 혹은 글을 가르치지 않고는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될만큼 백성의 세계에 변화가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가 바로 한글, 즉 훈민정음을 만들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성립초기의 조선 왕권이 안정을 얻고 중세적 지배질서를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할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고려 중기의 무신의 난까지 소급되어 이후 천민의 난과 몽고의 침입 및 고려의 몰락 등을 통해 한 단계 높아진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을 간구하는 일이었다. 이 중 자의식이 한 단계 높아진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이익 조건 중의 하나로 문자생활의 영위를 가능케 할 수 있는 한글이라는 글자의 창제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치자층의 자애심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백성세계가 스스로의 자의식을 높여감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전리품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이 정말 백성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글이 만들어진 후 그것이 조선시대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하는 문제를 추적해보면 한글이 본래 지배층의 지배목적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음이 한층 더 분명해질 것이다.
지배목적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한글은 창제 당초부터 백성들을 대상으로 조선 왕조의 정당성과 존엄성을 고취하는데 사용되었다. 한글로써 무엇보다 먼저 <용비 어천가>를 지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왕조의 왕권을 뿌리깊은 나무와 샘 깊은 물에 비유한 일종의 왕실찬양가로서, 한글로 지어 널리 읽혀지기를 목적한 것이다.
한글의 창제보급은 또 정부의 정책을 관료들의 해석없이 백성들에게 직접 전달 할수 있는 지름길을 마련하였다. 이제까지 한문으로 내려오던 정부의 교서나 방문이 창제 이후 언문교서와 같이 내려옴으로써 이것을 통하여 백성과 정부가 직결될 수 있었다. 특히 한글로 된 방문, 즉 언문방문은 그 효과가 대단히 높았는데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란이 일어났을 때는 정부가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하여 각 지방마다 언문방문을 붙여 소위 '효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부역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왜군의 진영에서 나와 아군을 도우면 부역죄를 용서할 것이라 알린 왕이 내린 방문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렇듯 한글은 지배권력의 처지에서 보면 통치수단의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지 만, 그것을 만들지 않을수 없게한 백성의 처지에서 보면 값높은 전리품이었다. 한글을 배운 백성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정치적, 사회적 의사표시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스스로의 의식수준을 한층 더 높여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글이 반포된 지 3년 후에 벌써 대신들을 비방하는 언문벽서가 나왔고,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연산군 시대에는 그의 폭정에 항거하는 언문투서, 언문패서가 빈번하여 한글 사용 금지령이 내리고 한글책이 불태워졌다. 패서나 문학작품 등을 통하여 백성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요구와 주장을 펼치는 수단이 됨으로써 중세 양반사회를 무너뜨리고 근대 민중사회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의 구실을 다했던 것이다.
한문이 진서의 자리를 잃어가고 한글이 언문의 위치를 탈피하면서 국문의 자리를 굳혀가는 과정은 바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며 우리 역사가 근대화해 가는 과정이었던 것이었다.(<분단시대의 역사 인식> 강만길)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의미는 최만리의 상소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결국 한글의 창제가 세종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최만리보다 물리적 힘이 우세한 탓도 있지만, 근거와 결과의 타당성이 훨씬 높았고 역사의 합법칙적인 발전 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세종은 백성의 처지, 통치자의 처지, 언어 모순에 대한 객관적 인식, 한자음 정리 등의 모든 목적을 합리적으로 해결해 주는 최상의 문자 창제에 성공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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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5.01.13
  • 저작시기2005.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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