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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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무신난의 배경과 원인
1. 귀족사회의 동요
(1) 이자겸(李資 )의 난
(2) 묘청의 난
(3)의종의 즉위와 정치상황 - 내적인 요인
2. 무신에 대한 차별대우 - 외적인 요인

Ⅱ. 무신란의 발발

Ⅲ. 문신귀족의 몰락

본문내용

하게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면, 이소응이 한뢰에게 당한 모욕은 개인적인 것으로 그쳤을런지도 모른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 국왕이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했을 때에 이미 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졌다. 왕을 시종한 무신들이 노골적으로 불평을 토로하자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는 소변을 보기 위해 자리를 피한 정중부를 뒤쫓아가 난을 일으킬 것을 제의했던 것이다. 정중부가 여기에 동의함으로써 난은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난을 계획한 인물은 이의방ㆍ이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 부터 난을 모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중부는 그들의 각본에 따랐을 뿐이었지 그 자신이 직접 난을 모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Ⅲ. 문신귀족의 몰락
의종대의 무신정변은 문신귀족정권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 요인으로 내적요인과 외적요인을 들 수 있다. 의종의 失政은 내적 요인이요, 무신·일반군인들의 불평·불만 등은 외적 요인이 될 것이다. 종래의 통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의종대 권력구조의 내부사정에서 비롯된다. 즉 의종이 국정을 돌보지 않고 날마다 유흥·오락의 풍류생활을 탐하게 된 것이 의종의 경박한 성격과 정치적 무관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시 권력구조의 내부사정을 보면, 의종은 국왕이면서도 정치적 권력은 거의 행사할 수 없었다. 정치권력은 귀족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왕권은 극도로 쇠약한 상태에 있었다. 의종은 국정에 있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는커녕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껴 국왕으로서의 지위보전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고려사』에서 毅宗世家의 기사를 통해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첫째, 의종이 '變'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고 멀리 피할 수밖에 없었던 데서 왕권의 미약(微弱) 정도를 측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의종이 재위 중 자주 자리를 옮겨 다니며 놀이에 빠지게 된 숨은 이유를 밝히는 데에도 참고가 될 것이다. 결국 의종대 정치의 주도세력은 귀족층이었지 의종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정의 책임을 의종에게 묻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당시 집권층의 자신들이 이익을 우선하는 데서 오는 정치지도력의 상실, 왕권과 귀족세력간의 정치적인 대립갈등과 더욱 심화된 왕권의 권위 실추, 그리고 귀족들 상호간의 대립 갈등 등으로 귀족정권은 그 정치적 구심점을 찾지 못해 정치적 불안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고, 이와 같은 정치적 파탄이 먼저 무신정변 발생의 소지를 제공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상황은 의종대의 실정에 못지 않게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킬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이 아닌가 한다. 집권귀족층이 실추시킨 고려왕실의 권위는 귀족정권의 권위 실추와 연결되어 뒤에 무신들이 귀족정권과 왕실의 권위를 능멸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는데 매우 인색했던 귀족정권은 뒤에 자신들의 권위도 짓밟히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엄청난 대가를 치른 셈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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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4.25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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