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국전과 아카데미즘
2. 앵포르멜 미술의 전후
3. 집단의 시대, 선언의 시대
4. 현대미협, 60년미협, 악튀엘
5. 앵포르멜의 성격과 비평
6. 1960년대 말의 집단운동
7. 순화된 양식
8. 기하학적 추상
9. 고조된 실험의지 -행위, 개념미술
10. 형식논리의 극대화 : 70년대 중후반의 모노크롬
11. 다원주의 : 모더니즘, 탈모던, 반모던의 역학관계
12. 오늘의 시점 : 포스트모더니즘의 풍향
2. 앵포르멜 미술의 전후
3. 집단의 시대, 선언의 시대
4. 현대미협, 60년미협, 악튀엘
5. 앵포르멜의 성격과 비평
6. 1960년대 말의 집단운동
7. 순화된 양식
8. 기하학적 추상
9. 고조된 실험의지 -행위, 개념미술
10. 형식논리의 극대화 : 70년대 중후반의 모노크롬
11. 다원주의 : 모더니즘, 탈모던, 반모던의 역학관계
12. 오늘의 시점 : 포스트모더니즘의 풍향
본문내용
양한 양식, 실험의 천착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 중에 「제2기 추상」으로 부를 만한 현대미술은 분명 기하학적 추상으로 모아지고 있다. 비록 「AG」가 기하학적 추상을 공식적으로 표방한 것은 아니었으며, 설치, 퍼포먼스, 평면 등 각기 다른 작업을 해가고 있었지만 그들 중에는 회화의 평면성을 의식하면서 보다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어휘로 대상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작가들도 있었다. AG운동에 참가하면서 오래전부터 새로운 경향의 추상회화를 천착해 오던 「오리진」작가들이 그들이었다. 63년에 결성된 오리진 그룹은 「차가운 추상」을 암중모색해온 단체로 그들이 일관되게 지켜온 것은 「지성의 회화」와 「정연한 조형의 논리」였다. 창립회원은 김택화, 권영우, 최명영, 이승조, 이상락, 서승원, 신기옥, 김수익 등이다. 따라서 동시대의 젊은 작가들 중에서도 특히 「무동인」이나 「신전동인」에서 발견되듯이 반예술에 고무된 비논리적 경향과 사뭇 다르게, 색체구사에 있어서 엄격한 절제, 화면의 논리적 구성, 그리고 2차원적 평면성의 주목을 꾀하였음은 이들이 일찍부터 잘 다듬어진 조형의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평면 자체를 회화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Ibid, pp.161~163 참조
그러나, 이 미술이 지닌 난점은 앵포르멜의 발상 자체가 동양적인 원형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나, 기하학적 추상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하여 그 허약한 근거에 대한 의혹을 계속 받아왔다는 사실이다. 당시 사회가 맞이했던 기계화, 산업화, 근대화의 여건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기하학 회화가 정신적, 지적인 관조의 테두리를 벗어난다면 거기 남은 것은 양식의 그루터기뿐일 것이다. 사상적인 골조가 갖추어 있지 않은 기하학 회화는 단순한 도형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김인환, <한국미술 60년대의 결산>, 《AG》3호, 1970.
기하학적 추상이 단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와 같은 정신적 필연성의 결핍과 무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기로 우리 미술이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련된 감각의 조형질서를 구현해 낼 수 있었음은 하나의 성과로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기하학적 추상, 차가운 추상 등으로 불리우는 이 미술이 얼마나 그 구체성을 확보하는 데 충실했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지만, 방법론이 부재하던 상황에서 그나마 도상적 차별화를 기하고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당시 재야 미술인들에게 이념적 결속을 꾀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서성록 著, op. cit., p.166, 168
9. 고조된 실험의지 -행위, 개념미술
1960년대부터 국제미술 무대에서 행해지기 시작한 퍼포먼스는 사전적으로는 “관객 앞에서 행하는 일시적인 이벤트, 즉 행위, 신체미술, 그리고 해프닝 등의 공연예술”을 가리킨다. 국내 미술계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이벤트」,「해프닝」,「대지미술」,「프로쎄스 아트」란 이름과 함께 실험미술의 서막이 올려진다. 주류로 군림해온 평면회화의 막강한 힘에 눌려 과소평가 되어온 느낌마저 드는 이 미술은 엄격한 구분 없이 혼재되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신체를 표현의 적극적인 수단으로 기용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최초의 퍼포먼스는 67년 12월 당시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한국 청년작가 연립전」에 참가한 「무동인」「신전동인」「오리진」동인 등 세 그룹 중에서 「신전동인」의 회원들(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이 발표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그것이다. Ibid, pp.168~170 참조
행위미술을 천착해간 또 하나의 집단은 71년 발기된 「ST미술학회」이다. 구성원들은 평론가 김복영을 비롯하여 이건용, 박원준, 김문자, 한정문, 여운 등. 물론 이들이 행위미술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행위미술뿐 아니라 입체, 개념미술에도 손을 댔다. 이것은 미국 개념미술의 선각자 조셉 커주스의 <철학 이후의 미술>이나 이우환의 <만남의 현상학적 서설> 등을 번역함으로써 개념예술의 근본이념, 즉 형식적 성질의 미학이나 관찰된 실재의 재현과 무관한 진정한 예술을 섭취하는 데에도 부심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확인된다. 현대미술에 대한 이론적 검증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거기에 거치지 않고 이들은 1977년까지 수차례의 세미나와 토론회, 6회에 걸친 전람회를 개최, 대담한 실험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행위미술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새로운 것이라면 한번쯤 호기심을 품었던 현대작가들이 행위미술의 대열에 동참했던 탓도 있지만, 그 당시 흐름이 대체로 개념, 관념, 정신 따위를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갔던 탓도 배제할 수 없다. 퍼포먼스는 우리 미술에 있어 가장 뜨거웠던 전위미술의 현장을 보여주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던 것도 사실이다. 열려진 창조관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기대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그 이유는 행위미술이 외래 전위미술이 지닌 표피의 단순한 모방에 그칠 뿐 현대미술의 본질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소홀히 했음에 기인한다. 물론 이것은 행위미술의 출생지가 외국이기 때문에 흔히 말하듯 서구 모방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하기 위한 말은 아니다. 외국의 것을 가져오더라도 그것이 과연 현대미술의 자기 성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느냐는 문제의 검토가 아쉽게도 결여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이다. 또 하나의 아쉬움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과연 행위와 아이디어 자체만으로 미술이 성립될 수 있냐는 문제이다. 퍼포먼스가 동시대적으로 발생한 국제미술을 여과 없이 수용했다는 점을 문제삼지 않더라도 그것이 애당초 지향했던 저항문화적 성격에서 순수행위의 탐닉, 나아가 단순 방법론으로 전락할 때 호기심의 충족 이상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거기에 난해한 관념을 추가시켜 미적 정당화를 시도하기 시작한 70년대 초부터 이 미술의 실제적 효과는 크게 반감하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Ibid, pp.168~184 참조
10. 형식논리의 극대화 : 70년대 중후반의 모노크롬
1970년대는 1967년
그러나, 이 미술이 지닌 난점은 앵포르멜의 발상 자체가 동양적인 원형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나, 기하학적 추상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하여 그 허약한 근거에 대한 의혹을 계속 받아왔다는 사실이다. 당시 사회가 맞이했던 기계화, 산업화, 근대화의 여건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기하학 회화가 정신적, 지적인 관조의 테두리를 벗어난다면 거기 남은 것은 양식의 그루터기뿐일 것이다. 사상적인 골조가 갖추어 있지 않은 기하학 회화는 단순한 도형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김인환, <한국미술 60년대의 결산>, 《AG》3호, 1970.
기하학적 추상이 단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와 같은 정신적 필연성의 결핍과 무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기로 우리 미술이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련된 감각의 조형질서를 구현해 낼 수 있었음은 하나의 성과로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기하학적 추상, 차가운 추상 등으로 불리우는 이 미술이 얼마나 그 구체성을 확보하는 데 충실했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지만, 방법론이 부재하던 상황에서 그나마 도상적 차별화를 기하고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당시 재야 미술인들에게 이념적 결속을 꾀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서성록 著, op. cit., p.166, 168
9. 고조된 실험의지 -행위, 개념미술
1960년대부터 국제미술 무대에서 행해지기 시작한 퍼포먼스는 사전적으로는 “관객 앞에서 행하는 일시적인 이벤트, 즉 행위, 신체미술, 그리고 해프닝 등의 공연예술”을 가리킨다. 국내 미술계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이벤트」,「해프닝」,「대지미술」,「프로쎄스 아트」란 이름과 함께 실험미술의 서막이 올려진다. 주류로 군림해온 평면회화의 막강한 힘에 눌려 과소평가 되어온 느낌마저 드는 이 미술은 엄격한 구분 없이 혼재되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신체를 표현의 적극적인 수단으로 기용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최초의 퍼포먼스는 67년 12월 당시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한국 청년작가 연립전」에 참가한 「무동인」「신전동인」「오리진」동인 등 세 그룹 중에서 「신전동인」의 회원들(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이 발표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그것이다. Ibid, pp.168~170 참조
행위미술을 천착해간 또 하나의 집단은 71년 발기된 「ST미술학회」이다. 구성원들은 평론가 김복영을 비롯하여 이건용, 박원준, 김문자, 한정문, 여운 등. 물론 이들이 행위미술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행위미술뿐 아니라 입체, 개념미술에도 손을 댔다. 이것은 미국 개념미술의 선각자 조셉 커주스의 <철학 이후의 미술>이나 이우환의 <만남의 현상학적 서설> 등을 번역함으로써 개념예술의 근본이념, 즉 형식적 성질의 미학이나 관찰된 실재의 재현과 무관한 진정한 예술을 섭취하는 데에도 부심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확인된다. 현대미술에 대한 이론적 검증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거기에 거치지 않고 이들은 1977년까지 수차례의 세미나와 토론회, 6회에 걸친 전람회를 개최, 대담한 실험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행위미술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새로운 것이라면 한번쯤 호기심을 품었던 현대작가들이 행위미술의 대열에 동참했던 탓도 있지만, 그 당시 흐름이 대체로 개념, 관념, 정신 따위를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갔던 탓도 배제할 수 없다. 퍼포먼스는 우리 미술에 있어 가장 뜨거웠던 전위미술의 현장을 보여주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던 것도 사실이다. 열려진 창조관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기대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그 이유는 행위미술이 외래 전위미술이 지닌 표피의 단순한 모방에 그칠 뿐 현대미술의 본질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소홀히 했음에 기인한다. 물론 이것은 행위미술의 출생지가 외국이기 때문에 흔히 말하듯 서구 모방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하기 위한 말은 아니다. 외국의 것을 가져오더라도 그것이 과연 현대미술의 자기 성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느냐는 문제의 검토가 아쉽게도 결여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이다. 또 하나의 아쉬움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과연 행위와 아이디어 자체만으로 미술이 성립될 수 있냐는 문제이다. 퍼포먼스가 동시대적으로 발생한 국제미술을 여과 없이 수용했다는 점을 문제삼지 않더라도 그것이 애당초 지향했던 저항문화적 성격에서 순수행위의 탐닉, 나아가 단순 방법론으로 전락할 때 호기심의 충족 이상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거기에 난해한 관념을 추가시켜 미적 정당화를 시도하기 시작한 70년대 초부터 이 미술의 실제적 효과는 크게 반감하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Ibid, pp.168~184 참조
10. 형식논리의 극대화 : 70년대 중후반의 모노크롬
1970년대는 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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