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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공예][그림][왕의 의복][과거제도][교육제도][기녀제도][군사조직]조선시대 공예, 조선시대 그림, 조선시대 왕의 의복, 조선시대 과거제도, 조선시대 교육제도, 조선시대 기녀제도, 조선시대 군사조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조선시대의 공예

Ⅱ. 조선시대의 그림

Ⅲ. 조선시대의 왕의 의복
1. 면복(冕服)
1) 면류관(冕旒冠)
2) 곤복(袞服)
2. 조복(朝服)
3. 상복(常服)
4. 편복(便服)

Ⅳ.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Ⅴ. 조선시대의 교육제도

Ⅵ. 조선시대의 기녀제도

Ⅶ. 조선시대의 군사조직
1. 중앙군제
2. 지방군제와 김제

참고문헌

본문내용

었기 때문에 폐지는 불가능하였다. 특히 관료들 사이에 전국의 기녀제도가 폐지되면 관리들이 모두 옳지 못한 방법으로 일반 가정의 여자를 범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벌을 받게 될 것이므로 기녀제도를 폐지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많았는데, 오늘날 국가에서 윤락가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려는 인식과 유사하였다. 결국 기녀제도는 조선의 사회적 통치이념과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한말까지 유지되었다.
Ⅶ. 조선시대의 군사조직
1. 중앙군제
선초의 중앙군은 태조대에 문무관제가 반포되면서 의병친군좌위, 의병친군우위, 응양위, 금오위. 좌우위, 신호위, 병위위, 비순위, 천년위, 현문위 등 10위로 편제 되었는데 1394년(태조 3년)에 10사제로 개편되었다. 이는 조선의 군제가 고려의 2군6위를 그대로 모방했던 것에서 벗어나는 최초의 개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10사는 다시 12사로 바뀐 뒤 문종대에 5사가 되었다가 1457년(세조 3년)에 5위제로 성립되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5위의 편제는 대체로 병종과 지방분담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앙군을 이루는 병종의 편제는 의병위에 갑사와 보충대, 용여위에 별시위와 대졸, 호비위에 여친위, 친군위·팽배·충좌위에 충의위·충찬위·파적위·충무위·충순위·정병·장용대 등이 소속되어 팔직과 시위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5위는 각기 지방의 병력을 분담 관할하였다. 의병위는 서울의 동부와 경상도 호비위는 서울의 중부와 개성부 및 경기, 강원, 충청, 황해도, 용여위는 서울의 동부와 경상도, 용비위는 서울의 서부와 평안도 충좌위은 서울의 남부와 전라도, 충무위는 서울 북부와 함경도의 병력을 각각 관할하였다. 또한 5위의 각 위는 중, 좌, 우, 전, 후의 5부로 나누어 전국의 진관을 망라한 지방군사를 소속시켰다. 따라서 5위의 체제는 한편으로는 중앙군을 지칭한 구체적 부대조직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을 망라한 대간 등 훈련체제의 2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2. 지방군제와 김제
정비된 진관체제를 바탕으로 하여 각 도마다 국방상의 중요성에 따라 각 도에 필요한 병영과 수영을 두어 병사와 수사로 하여금 각기 육군과 수군을 지위케 하였다. 그리고 그 지바의 국방상 필요에 의하여 육군은 경지, 가원에 각각 1원을 두고 경상 함경에는 3원, 기타의 도에는 2원을 두었는데, 각도의 병사가 1명인 경우에는 의례 관찰사가 겸하였으며, 그 외의 도는 1명은 관찰사가 겸하고 나머지는 전담의 병사가 겸하도록 하였다. 수군은 다소의 변동은 있으나 대체로 가원 황해도에 각 1명, 함경, 경상, 전라도에는 각 3명, 기타의 도에는 각 2명의 수사를 두었으며 이것도 병사와 마찬가지로 1명인 경우에는 관찰사가 겸하고 그 이외에는 전담 수사가 배치되었다. 따라서 관찰사는 한 도의 행정과 군사 책임자로서의 방대한 권한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군역에 필요한 재정부담은 군역자가 스스로 마련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봉족제는 고려의 양호제를 계승한 것으로, 1464년(세조 10년)에 보법으로 개편되었다. 봉족제에서 호 단위이던 것이 보법에서는 인정을 기준으로 개편되어 2정을 1보로 군호의 기본단위를 삼았다. 봉족제도는 호 단위였으므로 유력자는 한 가호안에 수십 명의 솔정을 가지는 폐단이 있었다. 보법으로의 개편은 이러한 은닉솔정을 추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각 호에 솔정을 모두 군역대상으로 편성하고 말았다. 또, 보법의 시행으로 노자도 반정으로 치고, 보인의 보포는 매월 1필 이하로 규제하였으나 보법은 호와 동떨어진 것이어서 뒤에 군역제 붕괴의 원인이 되었고, 보포도 규제 이상으로 수탈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보인으로 정군을 대립시키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여 부강한 호수 대신 빈약한 보인만이 군역을 담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으로써 군역제자체의 기반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성종조 이후에는 군역의 요역화 현상이 나타나고 봉군수포가 성행하면서 군역제도가 더욱 문란해 졌으며, 조선 후기에는 부병제인 의무병역제가 무너지고 점차 모병제로 바뀌어졌고, 지방에서는 사노비까지 징발하여 속오군을 편성하였다.
참고문헌
김대용(1994), 조선초기 교육의 사회사적 연구, 한올아카데미
김원룡·안휘준(1993), 한국미술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이태진(1988), 조선시대정치사의 재조명, 범조사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중기사회와 문화(1998), 국사편찬위원회
홍미표(1999), 조선시대회화사론, 문예출판사
한국회화, 국립중앙박물관(1977), 통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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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1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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