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어제와 오늘의 교회와 윤리
2. 값싼 일치인가, 값비싼 일치인가?
3. 윤리와 에큐메니즘: 함께하는 여행
4. 예배, 윤리, 그리고 교회의 일치
5-1, 세례, 성찬, 그리고 윤리: 인도의 경우
5-2. 참된 예배와 윤리를 위한 성만찬: 한국의 경우
6, 형성, 재형성, 그리고 분별력
2. 값싼 일치인가, 값비싼 일치인가?
3. 윤리와 에큐메니즘: 함께하는 여행
4. 예배, 윤리, 그리고 교회의 일치
5-1, 세례, 성찬, 그리고 윤리: 인도의 경우
5-2. 참된 예배와 윤리를 위한 성만찬: 한국의 경우
6, 형성, 재형성, 그리고 분별력
본문내용
은 그 자체로서 도덕적 선언문이요, 또 복음에 없어서는 안될 기독교 윤리에 대한 논증과 예증이다.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목적인 전 인류의 일치라는 보다 넓은 개념에 대한 하나의 표적이다. 교회의 일치는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그 자체에 어떤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 일치는 바로 선교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선교의 목적인 것이다.
교회안에서 기독교인들은 복음이 정해 준 표준을 따라 살아간다. 이 표준은 세상의 윤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기독교인들이 지연되기를 기도하는 마지막 때에 대한기대와 연결되어 규정한다. 교회는 세속 질서에 대해 도전을 가하면서 세상과 함께가는 평행공동체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삶의 질서에 대안적인 가능성을 제시하며,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다 뛰어난 방법’의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는 도덕적 분열과 사회적 분열의 위기 속에 있으며, 위험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는 새로운 암흑의 시기라고 주장한다. 암흑의 시기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업이 정중하고 예의바른 행동을 계속하는것과 도덕적인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로마의 절대 주권의 버팀목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 때를 말한ㄷ.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의 불안전함과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또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인정하면서 미래에 대한기대를 가지고 함께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기다림의 공동체이다.
진리안에 산다는 것은 한 개인의 일이 아니며, 또 한 개인이 일이 될 수도 없다. 진리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는 결코 내적인 관심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하며, 편파적이지 말아야 하며, 그 목적이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만족적인 책임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하고, 세계를 위한 책임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가 평행공동체이며, 대안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공동체이다.
진리안에 거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은 ‘거울속에 수수께끼처럼 반사된’ 희미한 하나님의 뜻이 마지막 날에 진리와 더불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만남으로 바뀔 것이라는 소망과 더불어 자신을 지탱시켜 나가야 한다.
2. 값싼 일치인가, 값비싼 일치인가?
값비싼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화해시키고, 그리고 치유한다. 이것은 제자가 될 것을 요구하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온갖 사람들, 특별히 힘없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친교로 인도한다.
교회의 일치도 은혜와 마찬가지로 쉽게 얻어지지 않는 값비싼 선물이다. 은혜처럼 일치도 값비싼 응답을 요구하는 귀한 선물이다. 비록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것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분열, 분쟁, 의심, 적개심이 가득한 세상에서 이 일치의 실체를 증명할 필요가 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일치와 평화를 지켜 나갈 필요가 있다.
교회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 주신 일치와 조화, 화해와 정의를 모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기독교인들을 믿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분열된 교회가 세상의 분열에 영향을 주고 때로는 그 분령이 더욱 나쁜 방향으로 가게 한다.
카이로스 문서는 소위 말하는 ‘교회 신학’은 차별은 단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어 일치나 화해는 금방이라도 가능한 것처럼 말하면서 불화를 희석시켰다고 고발하였다. ‘교회 신학’은 화해가 현실화될 때 바르게 교정될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불화는 바로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회개, 회복, 그리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참된 일치를 위해 꼭 필요하다.
우리 앞에는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속이는 거짓 일치가 있고, 반면에 참된 일치도 있다. 거짓 일치는 진리와 타협하며, 불의와 억압을 가리운다. 거짓 일치는 현존하는 불의와 억압의 구조를 고착시킨다. 그러나 참된 일치는 회개와 진리, 정의, 그리고 사랑을 근거로 하고 있다. 참된 일치는 변화, 변혁, 회복, 회심을 요구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교회 신학이 내세우는 비폭력에 대한 선언은 모든 폭력을 똑같이 비난하면서도, 실제론ㄴ 무자비하게 계속 되는 국가의 제도적 폭력보다는 억압받는 자들이 절망적으로 대응하는 폭력에 대해 훨씬 엄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예언의 신학은 항상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소망과 격려의 메시지이다.
교회는 교회적인 선명성 혹은 확실한 전도만큼이나 윤리적 투쟁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입장에 주된 관심을 두는것과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은 분리될 수가 없다. 윤리적인투쟁의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영역 바깥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깊은 연대를 경험하며, 자주 기독교신앙에 대해서는 애타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 교회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지에 대해 비기독교인들에게 배운 경험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디트리히 본 회퍼는 일찍이 독일교회의 투쟁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전에 결정적인 단계가 되리라는 것, 나아가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미래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였다.
본회퍼는 독일교회가 투쟁하는 상황을 통하여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의 백성들이 처음으로 에큐메니칼운동의 실제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에큐메니칼운동을 통하여 나치주의에 반대하는 교회들 사이에서 생긴 새로운 연대 안에서 ‘하나님의 집’이 되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고백교회의 윤리적인 입장은 자시들의 고백이나 그 고백이 함축하고 있는 무엇에서 나온 결과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리적 입장에 절대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때 교리가 바로 윤리가 되며, 윤리적 행위는 교리적인 고백과 분리될 수 없다. 고백의 삶을 산다는 것은 반대편을 향해 하나의 교리적인 논제를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백한다는 것은 그 고백 안에서 사느냐 혹은 죽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목적인 전 인류의 일치라는 보다 넓은 개념에 대한 하나의 표적이다. 교회의 일치는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그 자체에 어떤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 일치는 바로 선교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선교의 목적인 것이다.
교회안에서 기독교인들은 복음이 정해 준 표준을 따라 살아간다. 이 표준은 세상의 윤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기독교인들이 지연되기를 기도하는 마지막 때에 대한기대와 연결되어 규정한다. 교회는 세속 질서에 대해 도전을 가하면서 세상과 함께가는 평행공동체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삶의 질서에 대안적인 가능성을 제시하며,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다 뛰어난 방법’의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는 도덕적 분열과 사회적 분열의 위기 속에 있으며, 위험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는 새로운 암흑의 시기라고 주장한다. 암흑의 시기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업이 정중하고 예의바른 행동을 계속하는것과 도덕적인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로마의 절대 주권의 버팀목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 때를 말한ㄷ.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의 불안전함과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또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인정하면서 미래에 대한기대를 가지고 함께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기다림의 공동체이다.
진리안에 산다는 것은 한 개인의 일이 아니며, 또 한 개인이 일이 될 수도 없다. 진리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는 결코 내적인 관심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하며, 편파적이지 말아야 하며, 그 목적이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만족적인 책임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하고, 세계를 위한 책임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가 평행공동체이며, 대안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공동체이다.
진리안에 거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은 ‘거울속에 수수께끼처럼 반사된’ 희미한 하나님의 뜻이 마지막 날에 진리와 더불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만남으로 바뀔 것이라는 소망과 더불어 자신을 지탱시켜 나가야 한다.
2. 값싼 일치인가, 값비싼 일치인가?
값비싼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화해시키고, 그리고 치유한다. 이것은 제자가 될 것을 요구하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온갖 사람들, 특별히 힘없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친교로 인도한다.
교회의 일치도 은혜와 마찬가지로 쉽게 얻어지지 않는 값비싼 선물이다. 은혜처럼 일치도 값비싼 응답을 요구하는 귀한 선물이다. 비록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것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분열, 분쟁, 의심, 적개심이 가득한 세상에서 이 일치의 실체를 증명할 필요가 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일치와 평화를 지켜 나갈 필요가 있다.
교회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 주신 일치와 조화, 화해와 정의를 모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기독교인들을 믿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분열된 교회가 세상의 분열에 영향을 주고 때로는 그 분령이 더욱 나쁜 방향으로 가게 한다.
카이로스 문서는 소위 말하는 ‘교회 신학’은 차별은 단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어 일치나 화해는 금방이라도 가능한 것처럼 말하면서 불화를 희석시켰다고 고발하였다. ‘교회 신학’은 화해가 현실화될 때 바르게 교정될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불화는 바로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회개, 회복, 그리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참된 일치를 위해 꼭 필요하다.
우리 앞에는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속이는 거짓 일치가 있고, 반면에 참된 일치도 있다. 거짓 일치는 진리와 타협하며, 불의와 억압을 가리운다. 거짓 일치는 현존하는 불의와 억압의 구조를 고착시킨다. 그러나 참된 일치는 회개와 진리, 정의, 그리고 사랑을 근거로 하고 있다. 참된 일치는 변화, 변혁, 회복, 회심을 요구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교회 신학이 내세우는 비폭력에 대한 선언은 모든 폭력을 똑같이 비난하면서도, 실제론ㄴ 무자비하게 계속 되는 국가의 제도적 폭력보다는 억압받는 자들이 절망적으로 대응하는 폭력에 대해 훨씬 엄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예언의 신학은 항상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소망과 격려의 메시지이다.
교회는 교회적인 선명성 혹은 확실한 전도만큼이나 윤리적 투쟁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입장에 주된 관심을 두는것과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은 분리될 수가 없다. 윤리적인투쟁의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영역 바깥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깊은 연대를 경험하며, 자주 기독교신앙에 대해서는 애타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 교회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지에 대해 비기독교인들에게 배운 경험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디트리히 본 회퍼는 일찍이 독일교회의 투쟁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전에 결정적인 단계가 되리라는 것, 나아가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미래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였다.
본회퍼는 독일교회가 투쟁하는 상황을 통하여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의 백성들이 처음으로 에큐메니칼운동의 실제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에큐메니칼운동을 통하여 나치주의에 반대하는 교회들 사이에서 생긴 새로운 연대 안에서 ‘하나님의 집’이 되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고백교회의 윤리적인 입장은 자시들의 고백이나 그 고백이 함축하고 있는 무엇에서 나온 결과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리적 입장에 절대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때 교리가 바로 윤리가 되며, 윤리적 행위는 교리적인 고백과 분리될 수 없다. 고백의 삶을 산다는 것은 반대편을 향해 하나의 교리적인 논제를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백한다는 것은 그 고백 안에서 사느냐 혹은 죽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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