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의병전쟁
1) 전기의병
2) 중기의병
3) 후기의병
2. 계몽운동
1) 국권회복으로서의 애국계몽운동
2) 애국계몽운동단체
3) 애국계몽운동의 기본내용
3. 의열.순국투쟁
《참고문헌》
1) 전기의병
2) 중기의병
3) 후기의병
2. 계몽운동
1) 국권회복으로서의 애국계몽운동
2) 애국계몽운동단체
3) 애국계몽운동의 기본내용
3. 의열.순국투쟁
《참고문헌》
본문내용
학이나 사회과학에 관한 서적을 발행하여 근대학문을 소개하였고, 역사물을 연재하여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이러한 언론계몽운동은 민중을 각성시키고 계몽하여 신지식의 보급과 애국심의 앙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③ 국채보상운동
일제가 침략정채의 일환으로 빌려준 1,300만원의 차관을 단연등을 통하여 모금한 의연금으로 상환하여 재정적 자립을 이루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7년 1월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서상돈 등에 의해 발기되어 곧 전국에 확대되었으며, 그 해 2월 서울에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약 20만원을 모금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통감부의 방해공작과 국권피탈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애국심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킨 대표적인 민중운동으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④ 민족종교운동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종교계를 친일화하려는 공작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일어났다. 일제는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조직케 하였으며, 유교계의 친일화를 꾀하고자 대동학회 및 공자교를 설립케 하였다. 또 불교계에 대하여도 일본 불교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종교의 일본 종속화를 시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계몽운동가들은 민족종교를 창건하거나 종교계를 개혁하여 이를 저지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상재, 전덕기 등은 황성기독교청년회, 상동청년회 등 기독교 조직을 통해 기독교의 민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손병희 등은 1905년 12월 천도교를 창건하여 일진회에 대항하였다. 한편 나철 등은 1909년 단군을 국조로 하는 단군교를 창건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함은 물론 종교운동의 일환으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⑤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안창호를 비롯한 계몽운동가들은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에서는 국내에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만들어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벌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건설계획은 1907년 호남의병이 일본군에 의해 탄압되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퇴조기에 접어들지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다. 신민회에서는 1909년 봄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만들고 무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협의하였으며, 1910년 3월에는 이를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한인이주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한 결과, 1911년 이동녕, 이회영 등은 봉천성 유하현 삼원포에 한인촌을 건설하고 경학사를 설립하였다. 또 사관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후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최초로 신민회 계통의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였다. 이어서 1913년에는 이동휘, 이종호 등이 길림성 왕청현에 동림무관학교, 이상설, 이승희 등은 밀산현에 한국민족의 부흥을 꾀하고자 한흥동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북간도지역에서는 용정촌을 중심으로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는 이상설, 김약연 등에 의해 서전서숙, 명동학교 등이 설립되어 문무겸비의 민족교육이 실시되었다. 미주에서도 안창호에 의해 1905년 공립협회가 조직되어 미주한인의 경제적 발전과 국권회복을 도모하였다. 더욱이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19909), 이근영 등은 멕시코에 숭무학교(1910)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해 갔다.
⑥ 국학운동
국문과 국사 등 국학을 진흥시켜 민족정신을 회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갑오경장 이래 국한문이 병용되는 추세에 국어사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1907년에는 학부에 국문연구서가 설치되어 국어문법을 연구하였다. 특히 주시경은 어문민족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의 흥망과 언어, 문자의 성쇠는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민족의 독립 유지와 발전을 위한 국문 연구와 보급에 매진하였다. 국사학은 1890년대 후반 전통 역사학을 벗어나 점차 근대적인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적인 역사왜곡에 대하여는 주목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또한 1909년 출판법이 제정됨에 따라 모든 출판물은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했으므로 국사관련 저술에는 국권회복이나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을 게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국사 교과서의 친일화를 비난하면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사학이 성립되었다. 특히 신채호는 을지문덕, 강감찬, 최영, 이순신 등 국난극복의 영웅들에 대한 전기를 써서 애국심을 고양하고 독사신론(1908) 등의 사론을 발표하여 역사민족주의에 입각한 민족사관을 수립하였다.
⑦ 신문화운동
신소설과 신체시가 출현하였다. 특히 창가가 널리 불려졌고, 애국독립신교육신문화 등을 고무하고 예찬하는 내용이 많아서 온 국민의 노래로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애창되었다.
⑧ 실업구국운동(민족산업진흥운동)
각종의 근대회사 설립과 한국인 상공회의소 및 경제연구단체와 실업장려단체들의 활동이 있었다. 이 시기에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일제의 경제침략을 군사침략과 마찬가지로 극히 위험시하였다.
⇒ 계몽운동의 일부 세력은 일제의 통감정치에 대하여 잘못된 기대를 갖거나 일제의 침략정책에 이용되어 심지어는 친일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의병세력과 합류하는 데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 결과 일부 계몽운동가들은 의병전쟁을 지지하기도 하였으나, 양자간에는 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상호비방하거나 심지어는 살상하는 등 대립갈등적인 면이 나타났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국권회복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진 민족운동으로 근대 민족의식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일제 식민지하에서도 끊임없는 대일 항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한 민족적 힘의 원천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 간에는 국치를 전후하여 연합전선을 위한 통합의 노력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즉 항일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의병들은 독립전쟁을 위한 민족의 각성과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계몽운동가들은 기존의 실력양성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현실적인 독립전쟁준비론을 실천해 나갔다. 이러한 두 세력의 노력은 독립전쟁을 위한 통합적인 이념과 방법을 창출해낼 수 있는 새로운 모색이었다.
3. 의열
③ 국채보상운동
일제가 침략정채의 일환으로 빌려준 1,300만원의 차관을 단연등을 통하여 모금한 의연금으로 상환하여 재정적 자립을 이루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7년 1월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서상돈 등에 의해 발기되어 곧 전국에 확대되었으며, 그 해 2월 서울에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약 20만원을 모금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통감부의 방해공작과 국권피탈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애국심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킨 대표적인 민중운동으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④ 민족종교운동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종교계를 친일화하려는 공작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일어났다. 일제는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조직케 하였으며, 유교계의 친일화를 꾀하고자 대동학회 및 공자교를 설립케 하였다. 또 불교계에 대하여도 일본 불교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종교의 일본 종속화를 시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계몽운동가들은 민족종교를 창건하거나 종교계를 개혁하여 이를 저지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상재, 전덕기 등은 황성기독교청년회, 상동청년회 등 기독교 조직을 통해 기독교의 민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손병희 등은 1905년 12월 천도교를 창건하여 일진회에 대항하였다. 한편 나철 등은 1909년 단군을 국조로 하는 단군교를 창건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함은 물론 종교운동의 일환으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⑤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안창호를 비롯한 계몽운동가들은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에서는 국내에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만들어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벌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건설계획은 1907년 호남의병이 일본군에 의해 탄압되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퇴조기에 접어들지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다. 신민회에서는 1909년 봄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만들고 무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협의하였으며, 1910년 3월에는 이를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한인이주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한 결과, 1911년 이동녕, 이회영 등은 봉천성 유하현 삼원포에 한인촌을 건설하고 경학사를 설립하였다. 또 사관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후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최초로 신민회 계통의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였다. 이어서 1913년에는 이동휘, 이종호 등이 길림성 왕청현에 동림무관학교, 이상설, 이승희 등은 밀산현에 한국민족의 부흥을 꾀하고자 한흥동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북간도지역에서는 용정촌을 중심으로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는 이상설, 김약연 등에 의해 서전서숙, 명동학교 등이 설립되어 문무겸비의 민족교육이 실시되었다. 미주에서도 안창호에 의해 1905년 공립협회가 조직되어 미주한인의 경제적 발전과 국권회복을 도모하였다. 더욱이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19909), 이근영 등은 멕시코에 숭무학교(1910)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해 갔다.
⑥ 국학운동
국문과 국사 등 국학을 진흥시켜 민족정신을 회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갑오경장 이래 국한문이 병용되는 추세에 국어사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1907년에는 학부에 국문연구서가 설치되어 국어문법을 연구하였다. 특히 주시경은 어문민족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의 흥망과 언어, 문자의 성쇠는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민족의 독립 유지와 발전을 위한 국문 연구와 보급에 매진하였다. 국사학은 1890년대 후반 전통 역사학을 벗어나 점차 근대적인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적인 역사왜곡에 대하여는 주목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또한 1909년 출판법이 제정됨에 따라 모든 출판물은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했으므로 국사관련 저술에는 국권회복이나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을 게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국사 교과서의 친일화를 비난하면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사학이 성립되었다. 특히 신채호는 을지문덕, 강감찬, 최영, 이순신 등 국난극복의 영웅들에 대한 전기를 써서 애국심을 고양하고 독사신론(1908) 등의 사론을 발표하여 역사민족주의에 입각한 민족사관을 수립하였다.
⑦ 신문화운동
신소설과 신체시가 출현하였다. 특히 창가가 널리 불려졌고, 애국독립신교육신문화 등을 고무하고 예찬하는 내용이 많아서 온 국민의 노래로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애창되었다.
⑧ 실업구국운동(민족산업진흥운동)
각종의 근대회사 설립과 한국인 상공회의소 및 경제연구단체와 실업장려단체들의 활동이 있었다. 이 시기에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일제의 경제침략을 군사침략과 마찬가지로 극히 위험시하였다.
⇒ 계몽운동의 일부 세력은 일제의 통감정치에 대하여 잘못된 기대를 갖거나 일제의 침략정책에 이용되어 심지어는 친일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의병세력과 합류하는 데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 결과 일부 계몽운동가들은 의병전쟁을 지지하기도 하였으나, 양자간에는 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상호비방하거나 심지어는 살상하는 등 대립갈등적인 면이 나타났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국권회복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진 민족운동으로 근대 민족의식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일제 식민지하에서도 끊임없는 대일 항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한 민족적 힘의 원천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 간에는 국치를 전후하여 연합전선을 위한 통합의 노력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즉 항일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의병들은 독립전쟁을 위한 민족의 각성과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계몽운동가들은 기존의 실력양성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현실적인 독립전쟁준비론을 실천해 나갔다. 이러한 두 세력의 노력은 독립전쟁을 위한 통합적인 이념과 방법을 창출해낼 수 있는 새로운 모색이었다.
3. 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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