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원효의 생애(세번의 전환점)
(2) 원효사상의 역사적 배경
(3) 원효의 주요 사상
■ 一心(한마음)사상
■ 和諍會通. 圓融會通 사상
■事事無碍 사상
원효사상과 불교의 통일관
(1) 분별심을 버린 주체적 자각에 기초한 통일론
(2) 조화와 발전이 담보되는 통일관
(3) 사회적 실천을 향한 불교의 통일관
(2) 원효사상의 역사적 배경
(3) 원효의 주요 사상
■ 一心(한마음)사상
■ 和諍會通. 圓融會通 사상
■事事無碍 사상
원효사상과 불교의 통일관
(1) 분별심을 버린 주체적 자각에 기초한 통일론
(2) 조화와 발전이 담보되는 통일관
(3) 사회적 실천을 향한 불교의 통일관
본문내용
는 것이다.
원효는 평생 2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이는 한사람의 저술작업으로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까지 전해오는 저술은 22권에 불과하다. 원효의 만년에 대해서는 역시 자세한 자료가 없다. 다만 만행으로 민중교화행을 마친 그는 소성거사가 아닌 원효대사로 다시 돌아가 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이때가 신문왕 6년, 686년 3월 30일의 일이었다.
(2) 원효사상의 역사적 배경
원효가 살았던 시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영토전쟁을 벌이던 시기와 신라에 의해 무력으로 삼국이 통일된 역동적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자연히 원효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각기 자기 국가의 이해관계에 집착해 영토전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와중에서 삼국의 민중들만이 전쟁이라는 고통의 희생자일 따름이었다. 전해지는 말에의하면 원효는 화랑으로 백제와의 전투에 참가해 친한 친구가 죽자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한다. 이때 원효는 문득 백제의 젊은이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피해자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다. 이로부터 원효는 어느 한 나라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삼국의 평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신라에 의한 삼국의 통일후 원효는 무력에 의한 강제적인 통일이 진정한 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라를 잃고 망국의 한과 설움속에 살아가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과의 진정한 통합은 모두를 아우르는 화합속에서 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전국을 누비며 민중의 아픔과 함께하는 실천행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편 원효시대의 불교의 흐름에 대해 살펴보자. 신라는 삼국중에서 가장 늦게 법흥왕 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그 수용의 주체는 국가 왕실이었다. 따라서 초기 신라불교는 자연히 수용주체인 국가의 이해관계에 부응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를 가장 잘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진평왕대의 원광법사이다. 원광법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속오계를 만든 장본인이다. 이 내용은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의 다섯가지로 그 내용의 대부분이 당시의 왕실의 내용에 부합됨을 알 수 있다. 특히 원광법사는 왕실의 명을 받들어 수나라에 원병을 요구하는 글도 쓰게 되는데 이는 당시 원광법사가 신라왕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자장율사에게서도 보인다. 신라 최고의 귀족인 진골출신인 자장스님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왕실에 친히 요청하여 나라의 부국을 위하여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다. 이처럼 자장율사에 의한 황룡사 구층탑의 건립은 단순히 종교적인 목적에서 만이 아닌 왕권강화와 국가의 발전이라는 호국불교적 성격도 띠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7세기초 신라불교는 왕실중심의 귀족불교위주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당시의 불교는 다수의 민중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이 거의 전무했음을 또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원효가 본격적으로 불교에 입문해 정진하던 시기는 귀족불교에서 점차 서민대중을 위한 불교로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 당시 대표적인 서민대중불교의 선구자로 혜숙,혜공,대안스님이 계셨다. 혜숙스님은 20여년을 신도들의 집에 제를 모셔주면서 불교를 퍼뜨리는가 하면 미타사라는 절을 지어 정토신앙에 이념을 둔 대중교화에 노력했다. 한편 혜공스님은 당시 신라 귀족의 하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님은 평소 술에 취해 거리를 누비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미치광이처럼 행동하기도 하였지만 높은 수행력으로 서민들의 병을 고처주기도 하고 앞날을 예견해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안스님은 그 형상이 특이하였다 하며 늘 시장거리에서 대안대안하고 외쳤다하여 사람
원효는 평생 2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이는 한사람의 저술작업으로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까지 전해오는 저술은 22권에 불과하다. 원효의 만년에 대해서는 역시 자세한 자료가 없다. 다만 만행으로 민중교화행을 마친 그는 소성거사가 아닌 원효대사로 다시 돌아가 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이때가 신문왕 6년, 686년 3월 30일의 일이었다.
(2) 원효사상의 역사적 배경
원효가 살았던 시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영토전쟁을 벌이던 시기와 신라에 의해 무력으로 삼국이 통일된 역동적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자연히 원효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각기 자기 국가의 이해관계에 집착해 영토전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와중에서 삼국의 민중들만이 전쟁이라는 고통의 희생자일 따름이었다. 전해지는 말에의하면 원효는 화랑으로 백제와의 전투에 참가해 친한 친구가 죽자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한다. 이때 원효는 문득 백제의 젊은이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피해자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다. 이로부터 원효는 어느 한 나라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삼국의 평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신라에 의한 삼국의 통일후 원효는 무력에 의한 강제적인 통일이 진정한 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라를 잃고 망국의 한과 설움속에 살아가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과의 진정한 통합은 모두를 아우르는 화합속에서 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전국을 누비며 민중의 아픔과 함께하는 실천행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편 원효시대의 불교의 흐름에 대해 살펴보자. 신라는 삼국중에서 가장 늦게 법흥왕 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그 수용의 주체는 국가 왕실이었다. 따라서 초기 신라불교는 자연히 수용주체인 국가의 이해관계에 부응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를 가장 잘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진평왕대의 원광법사이다. 원광법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속오계를 만든 장본인이다. 이 내용은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의 다섯가지로 그 내용의 대부분이 당시의 왕실의 내용에 부합됨을 알 수 있다. 특히 원광법사는 왕실의 명을 받들어 수나라에 원병을 요구하는 글도 쓰게 되는데 이는 당시 원광법사가 신라왕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자장율사에게서도 보인다. 신라 최고의 귀족인 진골출신인 자장스님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왕실에 친히 요청하여 나라의 부국을 위하여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다. 이처럼 자장율사에 의한 황룡사 구층탑의 건립은 단순히 종교적인 목적에서 만이 아닌 왕권강화와 국가의 발전이라는 호국불교적 성격도 띠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7세기초 신라불교는 왕실중심의 귀족불교위주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당시의 불교는 다수의 민중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이 거의 전무했음을 또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원효가 본격적으로 불교에 입문해 정진하던 시기는 귀족불교에서 점차 서민대중을 위한 불교로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 당시 대표적인 서민대중불교의 선구자로 혜숙,혜공,대안스님이 계셨다. 혜숙스님은 20여년을 신도들의 집에 제를 모셔주면서 불교를 퍼뜨리는가 하면 미타사라는 절을 지어 정토신앙에 이념을 둔 대중교화에 노력했다. 한편 혜공스님은 당시 신라 귀족의 하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님은 평소 술에 취해 거리를 누비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미치광이처럼 행동하기도 하였지만 높은 수행력으로 서민들의 병을 고처주기도 하고 앞날을 예견해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안스님은 그 형상이 특이하였다 하며 늘 시장거리에서 대안대안하고 외쳤다하여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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