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공화국의 경제대통령 - 김재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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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 5공화국의 경제대통령 - 김재익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시작하는 글

Ⅱ. 김재익은 누구인가?
1. 등장
2. 중용
3. 재무부의 장악
4. 김재익의 작품
1) 6.28 금리인하
2) 금융실명제
3) 3마리 토끼를 잡다.

Ⅲ. 김재익이 5공 경제에서 차지한 비중은?
참고.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해서

Ⅳ. 맺음말

본문내용

다.
그런 재무부가 제5공화국 내내 쪽을 못쓴다. 재무부 자체의 기능이 약화되었다기 보다도 주름잡던 토박이 재무부 사람들이 밖으로 떨려 나가거나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서 안방차지하는 경우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당장 5공 시대에 어떤 인물들이 재무장관 자리에 앉았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승윤, 나웅배, 강경식, 김만기, 정인용, 사공일등 정인용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재무부 밖에서 들어와 장관 자리에 앉았었다. 그나마 유일한 재무부출신이었던 정씨의 경우 매우 비재무부적인 인물로서 아무도 그가 장관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었다. 오히려 그랬었기에 재무장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케이스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김삼수, 오수현 < 한국경제 36년 >. 숙명여대
그 이유는 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다. 종래의 성장위주 경제정책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이에 대한 처방으로 안정화, 자율화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 과정에서 이미 재무부는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획원이 앞장섰고,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정책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재무부가 공격의 타겟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중화학 과인투자에 대한 반성은 관치금융의 폐해에 대한 맹렬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따라서 주무당국인 재무부는 그 추궁을 면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3공이 망하고 새 집권세력이 개혁적인 차원에서 기존의 정책기조를 뿌리째 뒤엎었고, 이 과정에서 기획원을 중심으로 하는 자율, 개방론자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보수적 기지르이 재무관료들의 입지는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금융자율화 문제는 일찌감치 주요 쟁점으로 부상됐다. 강경식, 김재익, 이형구등 기획원의 기둥세력들은 정부의 간섭을 과감하게 축소시킨다는 명분 아래 정책금융의 철폐와 시중은행의 민영화를 단숨에 해치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규성, 정영의, 이수휴등 정통 재무관료들은 현실론을 내세워 여기에 맞섰다.
공세의 기획원과 수세의 재무부 사이에 피할 수 없는 한판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획원은 대세를 업었으나 재무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기획원측은 김재익 경제수석이 대통령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던데다가 때마침 성안중이던 5차 5개년계획의 브리핑을 이용해 강경식 차관보 등이 총력전을 펼쳤을 뿐 아니라 KDI마저 응원을 보냈으므로 빠른 속도로 우위를 점해 나갔다.
비록 열세에 빠지기는 했으나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설 재무부가 아니었다. 특히 전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박봉환 동자부장관의 원호사격이 재무부의 상당한 뒷힘이 되어주었다. 예컨데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아예 헌법에 못을 박아 독립시킨다든지, 정책금융을 일거에 폐지시킨다는 등의 과감한 개혁안들이 확정 일보전에 뒤집어진 것도 재무부 출신인 박봉환이 버티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대통령도 처음에는 급진개혁 쪽으로 기우는 듯 했으나 ‘금융제도는 경제전체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므로 서둘지 않는게 좋겠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두 부처의 갈등은 장기화되면서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었다. 기획원은 개혁적인 정책 전환을 주장했고, 재무부는 실정 모르는 소리 말라며 이에 맞섰다. 그러던 중 82년에 들어오면서 재무부는 결정적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정초의 개강이 그 갈림길이었다. 그동안 중요한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 버텨주던 박봉환 동자부장관이 재무장관으로 옮겨 앉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뜻밖에도 완전히 내각에서 물러나는 것을 계기로 재무부는 엄청난 시련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강경식 기획원 차관보가 재무부 차관으로 승진해 가는 것을 신호로 재무부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작됐다. 뒤이어 전례없던 기획원관료들의 재무부행이 진행된다. 이진설 공정거래실장이 재무부 제2차관보로, 이형구 기획국장이 이재국장으로 전보됐다. 반면에 하동선 재무부차관보는 기획원차관보로, 정영의 기획관리실장은 공정거래실의 상임위원이라는 한직으로 옮겨졌다. 더욱이 재무부의 얼굴 국장이랄 수 있는 이수휴 이재국장을 국제금융국의 재무협력관으로 몰아낸 것은 재무부의 앞날이 어찌되어 갈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였다. 이재국장의 경우 그동안 개혁파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서 재무부측의 논리를 대변해온 터였으니 그의 좌천은 대단히 상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재무부에 대한 물갈이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나갔다. 강경식 차관과 이형구 이재국장은 공공연히 재무관료의 병폐를 비판하고 나섰고, 이 바람에 재무부는 한동안 일이 제대로 안돌아갈 정도로 심각한 내부 갈등을 빚어냈었다. 그러나 그해 5월에 터진 이석희장영자 사건은 더 이상의 시비를 필요치 않게 만들었다. 나웅배 장관이 물러나고 진주군의 사령관격인 강경식 차관이 장관자리를 차고 앉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장관은 김수석이 기획국장시절에 직속상관인 차관보로 모셨던 관계 뿐만 아니라 개혁적인 성향이나 한국경제를 진단하는 기본 시각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닌 인물이었다. 특히 기획원출신으로는 서석준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선두주자였다. 김수석은 이런 강경식을 재무장관에 앉힘으로써 그 동안 저항을 받아왔던 일련의 개혁정책을 비로소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신임 강장관은 자기식의 인사체제를 한층 더 강화해버린다. 기획원출신인 김흥기 전매청장을 차관에 앉힌 것을 비롯해 이형구 이재국장을 금융담당차관보로 승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역시 기획원 출신인 강현구 사우디재무관을 후임 이재국장에 앉힌 것이다. 심지어는 금융정책과장까지 기획원 사람으로 바꿔버렸다. 반면에 마지막까지 버티던 이규성 금융담당차관보는 명목상의 승진인 전매청장자리로 나앉고 말았다.
이런 일괄적인 물갈이는 그동안 재무부의 보수성향 관료들에 의해 번번히 저지당하던 김재익의 개혁정책을 펼치는 기반이 되었다. 개혁과 보수의 균형을 이루던 경제부처는 이로서 균형이 깨어지고 김재익을 축으로 하는 개혁성향 관료들이 장악해 버리게 된다. 이런 개각 이후 바로 발표되는 6.28 금리인하조치와 7.3 실명제 추진이 이를 대변해준다. 그리고 이 모든 인사의 뒷배경에는 김재익의 숨은 입김이 작용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허씨(허화평, 허삼수)가 83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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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7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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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1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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