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치에 있어서 상하이방의 존재와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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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정치에 있어서 상하이방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중국 정치에서 ꡐ상하이ꡑ의 의미

Ⅲ. ꡐ상하이방ꡑ의 정치적 위상

Ⅳ. ꡐ상하이방ꡑ의 존재 형태

Ⅴ, ꡐ상하이방ꡑ의 미래

참고문헌

본문내용

전위원회 주임 등 5명을 진입시킴으로써 21명의 정치국원 중 10여명 이상을 자신의 파벌인 상하이방으로 채웠다.
또한 지방 성급의 성장 인사이동에서도 강택민 계열의 인사들이 속속 성장에 취임하고 잇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다시 말해 최근 광동, 산동, 절강, 하북, 해남성 당서기를 새로 임명하면서 광동성장에 장적강(張德江:전절강성서기), 산동성 성장에 장고려(張高麗:전심천시당서기), 하북성 성장에 태자당 백극명(白克明:전해남성장), 해남성장에 왕기산(王岐山:국무원 경제체제판공실 주임), 절강성장은 습긴평(習近平)을 임명하였는데 이는 강택민의 측근인 증경홍과 가까운 인사임을 밝히고 있다.
상하이방이라고 해서 모두가 상하이 출신은 아니다. 예를 들면 15대에 권력 투쟁에서 물러난 교석(喬石)은 고향이 상하이 근처 강소성 출신이고, 부총리 전기침(錢其琛))은 상하이 출신으로 그곳에서 성장했지만 파벌로는 베이징방으로 분류한다. 이에 비하여 주용기, 오방국도 상하이에서 성장하지 않았고 특히 주용기는 상하이에서 겨우 4년만 근무했을 뿐이지만 상하이방으로 분류한다. 따라서 중국정치에서 파벌이란 출신지역이나 학교를 통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일정한 지역이나 직종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생긴 인간적 유대관계를 기초로, 개별적이고 사적인 특수한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비록 파벌이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중국문화에 기초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공산당의 특이한 인사정책과도 관련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정치엘리트들이나 관료들을 일정한 지역이나 기능 및 조직체계 내에 특화시키는 인사정책으로 말미암아 장기적인 인간관계의 형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파벌은 권력이익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책과 노선에서 공통적 지향을 지니고, 다른 파벌과 갈등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집단의 성격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상하이방도 상하이 지역 자체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중앙정계의 정치집단으로서 사고하고 결정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상하이 출신자은 강렬한 지역관념 종파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한 예로 초대 상하이 시장을 지낸 진의(陳毅)가 상해에 들어왔을 때 화야(華野:화동야전군)인은 화야인을 보살펴야만 한다라고 하여 그가 상하이 시장을 담당한 이래로 가경시, 증적추(曾荻秋), 소진화(蘇振華), 팽충(彭?), 왕도함, 강택민, 황국 등 지역적으로 화동지역을 포함한 상하이 출신들의 상호 관계로 일맥상통하여 세대간에 교분이 있고, 동료관계가 복잡하게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 현재도 황포강변의 상하이탄 입구에는 진의의 동상이 있으며 이것은 상하이방의 정신적인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역대로 상하이 시장을 역임한 장춘교, 주용기와 서광적(徐匡狄) 등 소수의 사람만이 상하이 밖의 사람들로 문화혁명 시기 장춘교를 제외하고 그들의 역정은 매우 미묘하였다. 주용기는 상해시장이 된 이후 상해와의 41년간의 인연을 강조하였다. 마찬가지로 서광적도 언론 매체가 잘 주목하지 않았다. 제5세대 지도자 그룹에 포함되고 있는 현재 상하이시장 진량우(陳良宇)도 지역관념이 매우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상하이 인맥의 연원은 화동방(華東幇)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만 한다. 소위 화동방은 하나의 정치적 속칭으로 중국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화동방의 정치적 범주와 역사 연원은 주로 상해, 강소, 절강, 안휘 지역을 경계로 하고 있다. 그 혁명 역사는 중국공산당의 1920년대 창당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화동방과 관련된 당의 원로는 진운과 이선념이다. 진운과 이선념은 중국 제3세대 영도자 핵심 구성에 영향이 매우 깊다. 강택민과 이붕은 진운과 이선념에 의해 추천되었다. 소위 화동방의 인물들은 곡목(谷牧), 장경부(張勁夫), 왕도함(汪道涵), 방의(方毅), 장애평(張愛萍), 장진(張震), 홍학지(洪學智) 등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정치 2선으로 은퇴를 하였으나 지역적으로 강택민에 확실한 지지를 보내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강택민도 화동방의 후손이다. 그의 정치적 은사 왕도함과 그의 양아버지 강상청(江上淸)의 부하였고, 왕도함이 1949년 화동군정위원회공업부장을 맡고 있을 때 강택민은 당시 지하당원신분으로 상해의 익민(益民) 식품공장을 인수하는 일을 맡았으며 이때 이미 그와 면식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왕도함은 자신을 이어 강택민을 상하이시장에 추천하였으며 강택민이 상하이 시장을 맡은 것은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것이었다. 화동방의 따뜻한 품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향후 상하이방의 중요한 인물인 증경홍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의 아버지 증산(曾山)과 화동방의 비호 하에 1979년 국가계획위원회 주임 여추리(余秋里)의 비서가 되었고 여추리는 증산과 인연이 있다. 이것은 이후 비서방의 탄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증경홍의 부친 증산은 홍군 장정시기에 주은래와 진운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한 증산은 당원로 진운과 함께 모스크바에 간 적도 있다. 진운은 코민테른 대표로, 증산은 공부를 하러갔다. 1952년 증산이 재경위원회의 부주임일 때 진운의 지도를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해방이후 증산은 화동지역에서 수십 년을 근무하였다. 화동방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 진국동, 왕도함, 호교립 등이 그의 부하였다. 진국동은 재위부주임이자 화동군정위원회 재정부장, 왕도함은 교통건설청 부청장이자 화동군구공업부장, 호교립은 화동군구정보처장이자 화동국사회부부장 및 화동국조직부장이었다. 이러한 인맥은 이후에 진국동은 상하이시 제1서기, 왕도함은 시장, 호교립 시당위 제2서기, 인대상위원회주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증경홍의 모친인 등육금(鄧六金)은 장정에 참가한 27명의 홍군전사 가운데 하나이며. 1949년 화동국에서 개설한 간부 자제의 보육원 원장으로 100여명의 아이들은 모두 화동당의 간부자식들을 가르쳤던 인연은 증경홍에게는 하나의 자산이었다.
증경홍의 인맥은 매우 광범하다. 따라서 강택민은 증경홍의 정치적 자질과 인맥을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89년 강택민이 중앙으로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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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14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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