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국어사》의 시대 구분문제
2. 국어사 연구 방법
3. 알타이어의 특징
4. 중세 국어의 언어사적 특징
5. 향약구급방과 계림유사
6. 전기 중세 국어의 자료
7. 전기 중세 국어의 모음 체계, 순경음
8. 전기 중세 국어의 자음 체계
9. 중세 국어 모음 자료 15C와 16C 분류
10. 훈민정음의 체계
11. 후기 중세 국어의 자음 체계
(1) 유무성의 대립
(2) 된소리 체계
(3) 유성 마찰음 음가의 소실과정
12. 어두자음군
13. 종성체계
14. 음절말 모음간 자음에 관한 규칙
15. 모음체계
(1) 2중모음
(2) 모음조화
16. 명사 합성
17. 동사 합성
18. 명사 파생
19. 동사 파생
20. 상태 동사
21. 파생 부사
22. 곡용
23. 활용
24. 계사의 활용
25. 후치사
2. 국어사 연구 방법
3. 알타이어의 특징
4. 중세 국어의 언어사적 특징
5. 향약구급방과 계림유사
6. 전기 중세 국어의 자료
7. 전기 중세 국어의 모음 체계, 순경음
8. 전기 중세 국어의 자음 체계
9. 중세 국어 모음 자료 15C와 16C 분류
10. 훈민정음의 체계
11. 후기 중세 국어의 자음 체계
(1) 유무성의 대립
(2) 된소리 체계
(3) 유성 마찰음 음가의 소실과정
12. 어두자음군
13. 종성체계
14. 음절말 모음간 자음에 관한 규칙
15. 모음체계
(1) 2중모음
(2) 모음조화
16. 명사 합성
17. 동사 합성
18. 명사 파생
19. 동사 파생
20. 상태 동사
21. 파생 부사
22. 곡용
23. 활용
24. 계사의 활용
25. 후치사
본문내용
어 즉 ‘음성언어’가 곧 ‘문자언어’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항상 언어 연구의 기준은 현재로 하되 그 음성 실현의 재구를 통해, 문자의 연구를 통해 보다 정확한 음성 언어 실현을 밝히는데 있으므로 이에 항상 주의하여야 한다.
3. 알타이어의 특징
알타이어라 함은 언어의 계통적 연구 즉 유사 언어를 상호 비교하는 비교연구의 과정에서 祖語의 개념 수립을 통한 분류로써 등장한 용어이다. 이 알타이어에는 몽고어, 퉁구스어, 토이기어, 한국어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들 어파의 비교에서 모두가 공통된 현상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동일하나, 다른 특질도 많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祖語에서 파생되었다 할지라도 그 기나긴 역사 속에서 각각의 서로 다른 생활 환경으로 인해 서로 다른 변화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어파를 하나의 어족 즉 알타이어족으로 묶는 것은 그 변화의 과정에서 재구와 소급 등을 통해 파악되어지는 공통적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 특징은 모음조화, 어두자음군 조직의 제약, 교착성, 모음 및 자음 교체의 부재 등을 들 수 있다. 모음조화는 전설모음으로 된 단어와 후설모음으로만 된 단어가 한 단어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규칙으로, 모든 어파에 동일한 모음조화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전설과 후설의 양계열에 기초한 구개적 조화는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두 자음군 조직의 제약은 어두에 자음군이나 유음(특히 r)을 피하는 것이고, 교착성은 특히 비교적 공통되는 특징으로 국어와 알타이 제어는 단어의 파생과 굴절이 접미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어간과 접미사의 연결이 ‘기계적’이고, ‘규칙적’이며, 모든 접미사는 단일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과 관련하여 인구어등에 존재하는 자음 및 모음 교체의 문법적 기능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 등은 언어의 재구·소급·비교 등의 방법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과학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고, 증명하기도 또한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파와 어족간의 비교로 볼 때 국어는 알타이 조어 중에서 가장 먼저 분화한 어파라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특질 이외에도 유·무성간의 대립이라든가, 관계사의 부재 등의 특징이 있기도 하다.
4. 중세 국어의 언어사적 특징
중세 국어의 시기는 10C~16C의 시기로, 전반적인 언어적 특징이 그 이전과 이후로 비교해 다소 명확하게 구분되어질 수 있다는 경험적 연구 성과를 토대로 상정된 것이다.
10C는 고려 건국의 시기이다. 이 때를 기준으로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언어적 중심권이 개성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중세 국어의 기초적 틀이 재편성되었으며, 이후 이조 건국, 근·현대 국어에 이르기까지 개성·경기 지방의 방언이 중앙어로서의 위치를 갖게 하는 언어사적 발단이 되었다.
중세 국어의 근간이 된 개경 지방의 언어는 신라어의 변방 언어이며, 그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고구려어의 저층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예: 고구려어의 ‘*nam 乃勿(鉛)’이란 단어가 13C에 간행된 향약구급방에도 ‘鉛 俗云 那勿’이라 나타남) 그러나 고구려어의 요소는 옛 신라 중앙어의 영향으로 점차 쇠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15C 훈민정음 문헌에 신라어의 계통으로 보이는 ‘납’만이 나타남)
중세 국어는 14C 경에 나타난 광범위한 음운 체계의 변화를 근거로, 다시 전기와 후기로 하위 구분된다. 전기와 후기의 구분은 당시 음운 체계(특히, 모음 체계)의 일대 변화에 의해 상정된 것으로, 조선 건국이나 훈민정음 창제에 의해 구분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 건국은 단지 정치적 변화로서 문화중심권의 이동이 거의 없고, 훈민정음의 출현은 단지 시각적 문자 체계를 확립한 것으로 국어의 음운·문법·어휘 체계와는 직접적 영향 관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중세 국어는 고구려어를 바탕으로 300여 년간 남방어(신라어)에 의해 중화되었던 특수한 언어가 현대어에까지 이르는 중심 언어로 자리잡은 이후 약 7세기간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고대 국어와 근대 국어와 비교해 언어 각 부문에 걸쳐 상당한 상이성을 지닌 시대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5. 향약구급방과 계림유사
국어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자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즉, 자료는 당시의 언어적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재구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과학적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의 역사에 있어 10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전기 중세 국어만큼 자료가 빈약한 역사도 없다. 그러나, 그 빈약한 자료 중에서도 鄕藥救急方과 林類事는 그 자료적 가치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국어사 특히 전기 중세 국어 연구에 있어 제일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자료는 상당한 차이와 대별점을 찾아볼 수가 있다.
우선 계림유사는 송나라 사람인 손목이 12세기에 저술한 것으로, 원래는 3권으로 구성되어 土風, 朝制, 方言으로 되어 있고 부록으로 ‘口宜刻石等文’과 ‘大同韻府群玉’에 30여 항목의 인용이 보인다. 이 계림유사는 ‘天曰漢’와 같이 한자로 국어 단어 또는 어구를 기록했다. 계림유사에 사용된 한자의 용법은 우리나라 고유의 한자음 차용 표기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한자음만을 이용하였을 뿐이다. 단지 ‘豆曰太’, ‘升曰刀’등에서만 고유의 이두가 사용되었다. 또한 여기에 사용된 한자들은 순수히 표음적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犬曰家’와 같이 표의성을 띠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방언이라는 말에서도 풍기듯이 우리 나라 말을 중국의 한 지방어로서 설명하려는 작자의 중화주의적 사고를 반영하며, 그리하여 우리말을 한자로써 설명하려 하는 의도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계림유사는 전기 중세 국어의 ‘음운 체계’의 체계화에 도움을 주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入聲字’의 사용이 주목된다. 入聲字는 본래 중국에 후내·설내·순내 입성이 있으나 이미 신라 말의 자료를 볼 때, 중국에서 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후내입성은 어미가 *k인 자들로 ‘低曰則(나)’과 같이 어미가 ‘그’로 나타나며, ‘尺曰作(
3. 알타이어의 특징
알타이어라 함은 언어의 계통적 연구 즉 유사 언어를 상호 비교하는 비교연구의 과정에서 祖語의 개념 수립을 통한 분류로써 등장한 용어이다. 이 알타이어에는 몽고어, 퉁구스어, 토이기어, 한국어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들 어파의 비교에서 모두가 공통된 현상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동일하나, 다른 특질도 많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祖語에서 파생되었다 할지라도 그 기나긴 역사 속에서 각각의 서로 다른 생활 환경으로 인해 서로 다른 변화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어파를 하나의 어족 즉 알타이어족으로 묶는 것은 그 변화의 과정에서 재구와 소급 등을 통해 파악되어지는 공통적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 특징은 모음조화, 어두자음군 조직의 제약, 교착성, 모음 및 자음 교체의 부재 등을 들 수 있다. 모음조화는 전설모음으로 된 단어와 후설모음으로만 된 단어가 한 단어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규칙으로, 모든 어파에 동일한 모음조화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전설과 후설의 양계열에 기초한 구개적 조화는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두 자음군 조직의 제약은 어두에 자음군이나 유음(특히 r)을 피하는 것이고, 교착성은 특히 비교적 공통되는 특징으로 국어와 알타이 제어는 단어의 파생과 굴절이 접미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어간과 접미사의 연결이 ‘기계적’이고, ‘규칙적’이며, 모든 접미사는 단일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과 관련하여 인구어등에 존재하는 자음 및 모음 교체의 문법적 기능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 등은 언어의 재구·소급·비교 등의 방법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과학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고, 증명하기도 또한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파와 어족간의 비교로 볼 때 국어는 알타이 조어 중에서 가장 먼저 분화한 어파라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특질 이외에도 유·무성간의 대립이라든가, 관계사의 부재 등의 특징이 있기도 하다.
4. 중세 국어의 언어사적 특징
중세 국어의 시기는 10C~16C의 시기로, 전반적인 언어적 특징이 그 이전과 이후로 비교해 다소 명확하게 구분되어질 수 있다는 경험적 연구 성과를 토대로 상정된 것이다.
10C는 고려 건국의 시기이다. 이 때를 기준으로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언어적 중심권이 개성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중세 국어의 기초적 틀이 재편성되었으며, 이후 이조 건국, 근·현대 국어에 이르기까지 개성·경기 지방의 방언이 중앙어로서의 위치를 갖게 하는 언어사적 발단이 되었다.
중세 국어의 근간이 된 개경 지방의 언어는 신라어의 변방 언어이며, 그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고구려어의 저층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예: 고구려어의 ‘*nam 乃勿(鉛)’이란 단어가 13C에 간행된 향약구급방에도 ‘鉛 俗云 那勿’이라 나타남) 그러나 고구려어의 요소는 옛 신라 중앙어의 영향으로 점차 쇠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15C 훈민정음 문헌에 신라어의 계통으로 보이는 ‘납’만이 나타남)
중세 국어는 14C 경에 나타난 광범위한 음운 체계의 변화를 근거로, 다시 전기와 후기로 하위 구분된다. 전기와 후기의 구분은 당시 음운 체계(특히, 모음 체계)의 일대 변화에 의해 상정된 것으로, 조선 건국이나 훈민정음 창제에 의해 구분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 건국은 단지 정치적 변화로서 문화중심권의 이동이 거의 없고, 훈민정음의 출현은 단지 시각적 문자 체계를 확립한 것으로 국어의 음운·문법·어휘 체계와는 직접적 영향 관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중세 국어는 고구려어를 바탕으로 300여 년간 남방어(신라어)에 의해 중화되었던 특수한 언어가 현대어에까지 이르는 중심 언어로 자리잡은 이후 약 7세기간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고대 국어와 근대 국어와 비교해 언어 각 부문에 걸쳐 상당한 상이성을 지닌 시대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5. 향약구급방과 계림유사
국어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자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즉, 자료는 당시의 언어적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재구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과학적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의 역사에 있어 10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전기 중세 국어만큼 자료가 빈약한 역사도 없다. 그러나, 그 빈약한 자료 중에서도 鄕藥救急方과 林類事는 그 자료적 가치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국어사 특히 전기 중세 국어 연구에 있어 제일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자료는 상당한 차이와 대별점을 찾아볼 수가 있다.
우선 계림유사는 송나라 사람인 손목이 12세기에 저술한 것으로, 원래는 3권으로 구성되어 土風, 朝制, 方言으로 되어 있고 부록으로 ‘口宜刻石等文’과 ‘大同韻府群玉’에 30여 항목의 인용이 보인다. 이 계림유사는 ‘天曰漢’와 같이 한자로 국어 단어 또는 어구를 기록했다. 계림유사에 사용된 한자의 용법은 우리나라 고유의 한자음 차용 표기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한자음만을 이용하였을 뿐이다. 단지 ‘豆曰太’, ‘升曰刀’등에서만 고유의 이두가 사용되었다. 또한 여기에 사용된 한자들은 순수히 표음적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犬曰家’와 같이 표의성을 띠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방언이라는 말에서도 풍기듯이 우리 나라 말을 중국의 한 지방어로서 설명하려는 작자의 중화주의적 사고를 반영하며, 그리하여 우리말을 한자로써 설명하려 하는 의도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계림유사는 전기 중세 국어의 ‘음운 체계’의 체계화에 도움을 주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入聲字’의 사용이 주목된다. 入聲字는 본래 중국에 후내·설내·순내 입성이 있으나 이미 신라 말의 자료를 볼 때, 중국에서 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후내입성은 어미가 *k인 자들로 ‘低曰則(나)’과 같이 어미가 ‘그’로 나타나며, ‘尺曰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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