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시의 방황과 모색
1. 주요한·김억·황석우
(1-1) 주요한 작가의 이해
시 경향
작품분석
(1-2) 김억 작가의 이해
시 경향
작품분석
(1-3) 황석우 작가의 이해
2. <폐허>와 <백조>의 시인들
(2-1) 폐허의 시인들
(2-2) 백조의 시인들
3. <금성>이후의 변모
(3-1) 양주동
(3-2) 유춘섭
(3-3) 백기만
(3-4) 손진태, 이상백
(3-5) 이장희
(3-6) 김동환
4. 김소월과 한용운
<김소월>
(4-1.1) 등단과 시집 ‘진달래꽃’ 발표
(4-1.2) 민요시와 김소월
(4-1.3) 김소월의 작품세계
<한용운>
(4-2.1) 시인, 독립운동가, 스님 한용운
(4-2.2) ‘님’과 한용운
(4-2.3) 한용운의 작품세계
5. 조명희·김형원·이상화
<조명희>
(5-1.1) 초기시의 기본구조
(5-1.2) 망명 후 시세계의 변모 양상
<김형원>
(5-2.1) 현실지향과 점진성
(5-2.2) 평등, 포옹, 민주성
(5-2.3) 미래지향열과 인습·제도의 배격
(5-2.4) 새로움에의 동경
(5-2.5) 한계
<이상화>
(5-3.1) <백조> 시절의 시
(5-3.2) <개벽> 시절의 시
Ⅲ. 결론
Ⅱ. 시의 방황과 모색
1. 주요한·김억·황석우
(1-1) 주요한 작가의 이해
시 경향
작품분석
(1-2) 김억 작가의 이해
시 경향
작품분석
(1-3) 황석우 작가의 이해
2. <폐허>와 <백조>의 시인들
(2-1) 폐허의 시인들
(2-2) 백조의 시인들
3. <금성>이후의 변모
(3-1) 양주동
(3-2) 유춘섭
(3-3) 백기만
(3-4) 손진태, 이상백
(3-5) 이장희
(3-6) 김동환
4. 김소월과 한용운
<김소월>
(4-1.1) 등단과 시집 ‘진달래꽃’ 발표
(4-1.2) 민요시와 김소월
(4-1.3) 김소월의 작품세계
<한용운>
(4-2.1) 시인, 독립운동가, 스님 한용운
(4-2.2) ‘님’과 한용운
(4-2.3) 한용운의 작품세계
5. 조명희·김형원·이상화
<조명희>
(5-1.1) 초기시의 기본구조
(5-1.2) 망명 후 시세계의 변모 양상
<김형원>
(5-2.1) 현실지향과 점진성
(5-2.2) 평등, 포옹, 민주성
(5-2.3) 미래지향열과 인습·제도의 배격
(5-2.4) 새로움에의 동경
(5-2.5) 한계
<이상화>
(5-3.1) <백조> 시절의 시
(5-3.2) <개벽> 시절의 시
Ⅲ. 결론
본문내용
징주의 투의 기이한 상상을 일본식한자어 표로 나타냈다며 비판하고, 마지막 구절을 <태양의 침몰>로써 세기말적 분위기를 나타낸것에 대해 신란한 비판을 한다.
<장미촌>에 발표한 <장미촌의 향연> 두 편은 둔탁한 관념어를 즐겨 쓰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시세계를 구축하려는 조짐을 나타낸다고 본다.
조선시단에서 발간되었다. 창작시129편과동경시대의 것 15편, 일문시 7편 등 총 151편이 수록되어 있다.
2. 폐허와 백조의 시인들
20년대 초의 시단은 동인지 활동이 주도했다. 그 대표적인 것들에는 창조, 폐허, 백조, 장미촌 등을 들 수 있다. 동인지의 작품 경향을 살펴보면 대체로 창조는 자연주의를, 폐허는 톼폐주의를, 백조는 낭만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다. 그 중에서도 폐허와 백조는 많은 시인의 활동무대였다. 시인이 적극적인 변모를 보이지 않을 때 폐허파, 백조파의 지칭이 타당성을 가진다. 이러한 연유로 페허의 시인으로는 남궁벽, 오상순, 변영로를 백조의 시인으로는 노자영, 박종화, 박영희 , 홍사용을 들 수 있다.
(2-1) 폐허의 시인들
1920년대 초기는 우리 근대 문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는 데서 일찍부터 문학사적 주목을 받아왔다. 1910년대 말에 계시가 된 문예 동인 활동이 2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층 본격화하여 동인지 문학시대로 발전하였다. 폐허는 창조 다음을 이은 문예 동인지이다.
페허는 1920년 7월 폐허가에서 긴행되었다. 편집과 발행인은 회동서관 주인 고경상이 맡았고, 동인으로 시에 김억,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변영로 등이고, 소설에는 염상섭, 이익상, 민태원 등이다. 창간호는 1000부를 발행하였고, 다음 호는 이병조에 의하여 시반도사에서 발행하였다.
폐허라는 제호는 독일의 시인 J.C.F.실러의 \"옛 것은 멸하고 시대는 변한다. 새 생명은 이 폐허에서 피어난다\"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후기에 “우리가 荒凉落寞한 조선의 예원을 개척하여 거기다 무엇을 건설하고 부활하고 이식하여 백화난만한 화원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세계 예원의 내용, 외완을 더 풍부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폐허를 발행한 취지라고 할 수 있다.
문학적 경향은 퇴폐적 낭만주의였다. 퇴폐주의란 문학이 인간 생활의 이상에 참여하지 않게 되고, 안이한 생활 의 식을 만족시키기 위해 몰이성적 간성에 호소하게 되면서 감각적인 만족을 주는 것을 그 기능으로 삼게 된다. 그리하여 美 그 자체를 찾아 관능적인 미를 추구하게 되고, 괴기한 것과 이상한 것에서 오는 미를 좋아하며, 퇴폐 그 자체를 미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퇴폐주의는 3·1운동의 좌절과 극도의 경제적 궁핍을 경험한 식민지 청년 지식인들의 불안의식과 세기말 사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28세에 요절한 시인 남궁벽은 페허를 내는데 적극 참여해 편집후기를 쓰고, 제 2호에 시 네 편을 실었다. 일본어와 영어시를 발표하기도 하고 번역을 하기도 하였다. 국어로 쓴 시는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 페허에 발표한 ‘풀’에서는 대지의 생명이 자기의 마음과 이어져 있다고 했다. 신생활에 실린 ‘별의 아픔’은 님이라고 한 생명의 주재자에게 어린아이가 뒹굴면 “感應的으로 깜짝 놀나신 일이 업스심니가”하고, 지상의 꽃이 꺽일 때 천상의 별이 아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마’에서는 체념하는 표정만 하고서 웃음이 없는 말을 동정해 사람이 말이 될 때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생명이건 끔찍이도 사랑하는 이채로운 사상을 찾다가 표현의 성숙은 꾀하지 못하고 요절했다.
하루 200개비의 줄담배를 피우며 일생을 독신으로 외롭게 살다 세상을 떠난 공초(供招) 오상순은 폐허 창간호에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논설을 싣고, 제 2 호에 시를 17편이나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시는 대부분 짤막한 수상록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거창한 문제를 제기하고서 착상은 단순하다. ‘힘의 숭배’에서 ‘혁명’까지의 몇 작품은 적중하지 못한 열변을 토로했고, 돌을 보고 말을 자유롭게 할 날이 있으리라고 한 ‘돌아’는 범속한 설명으로 흘렀다. 동명에 발표한 ‘방랑의 마음’은 어디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혼이 바다의 소리나 냄새를 그리워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일제 치하라는 현실의 질곡을 벗어난 이상향을 그리워하며 정처없이 떠도는 마을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오상순은 그의 작품의 제목처럼 평생을 ‘방랑의 마음’으로 전국을 떠돌며 일제 식민지 치하의 삶을 ‘허무와 세속에서의 일탈’을 영위하려 하였다.
변영로는 폐허에서 서양문학을 소개하는 논설을 발표하고, 장미촌의 권두언을 쓴 다음, 1924년 1월에 창간되어 통권 1호로 종간되었다. 편집인은 염상섭, 발행인은 아놀드이고, 페허이후사에서 발행하였다. 폐허의 뒤를 이은 문예동인지로 《창조》, 《폐허》, 《백조》등의 동인이 고루 참여하였는데, 《폐허》의 동인이 주를 이루었다.
폐허이후에 비로소 시 두 편을 선보였다. 남궁벽이나 오상순처럼 거추장스러운 문제를 놓고 번민하지 않고, 잃어버린 조선의 마음을 되살려야 한다면서 그 방법을 강구하는데 정성을 모았다. 폐허이후에 발표한 ‘생시에 못 뵈올 님을’에서부터 말을 잘 다듬어 미묘한 느낌을 주는 표현을 개척하였다. “꿈조차 흔들니우고 흔들니여 / 그립든그대 갓가울들 머러라”에서 볼 수 있듯이 생경한 한자에 의존하지 않고, 전통적인 율격을 받아들여 형식의 안정을 꾀한 점도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율격의 변형을 적게 하고 단조로운 반복을 즐겼으며, 시상의 폭을 좁혔다. 그러나 논개에서는 느낌을 조절하는 작업의 범위를 넘어서서, 논개를 기리는 애국의 정열을 유려한 가락에 실어 인상 깊게 나타냈다. 진주 남강의 푸른 물결과 논개의 붉은 마음을 거듭 대조시킨 수법이 단순하기는 하지만 적절한 효과를 거두었다. 백조 동인들이 암울한 시대 상황에 굴복하여 한숨과 눈물만을 토로한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시를 쓴 데 비해, 변영로는 민족적 폐배감에 젖어 있는 식민지 뱃성들에게 ‘논개’의 우국 충절을 보여 줌으로써 민족 의식을 고취시켜 주었다. 논개의 시는 저항적인 색채로 말미암아 이 작품이 수록된 시짐 ‘조선의 마음’은 발간 직후 일제로부터 판매 금지
<장미촌>에 발표한 <장미촌의 향연> 두 편은 둔탁한 관념어를 즐겨 쓰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시세계를 구축하려는 조짐을 나타낸다고 본다.
조선시단에서 발간되었다. 창작시129편과동경시대의 것 15편, 일문시 7편 등 총 151편이 수록되어 있다.
2. 폐허와 백조의 시인들
20년대 초의 시단은 동인지 활동이 주도했다. 그 대표적인 것들에는 창조, 폐허, 백조, 장미촌 등을 들 수 있다. 동인지의 작품 경향을 살펴보면 대체로 창조는 자연주의를, 폐허는 톼폐주의를, 백조는 낭만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다. 그 중에서도 폐허와 백조는 많은 시인의 활동무대였다. 시인이 적극적인 변모를 보이지 않을 때 폐허파, 백조파의 지칭이 타당성을 가진다. 이러한 연유로 페허의 시인으로는 남궁벽, 오상순, 변영로를 백조의 시인으로는 노자영, 박종화, 박영희 , 홍사용을 들 수 있다.
(2-1) 폐허의 시인들
1920년대 초기는 우리 근대 문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는 데서 일찍부터 문학사적 주목을 받아왔다. 1910년대 말에 계시가 된 문예 동인 활동이 2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층 본격화하여 동인지 문학시대로 발전하였다. 폐허는 창조 다음을 이은 문예 동인지이다.
페허는 1920년 7월 폐허가에서 긴행되었다. 편집과 발행인은 회동서관 주인 고경상이 맡았고, 동인으로 시에 김억,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변영로 등이고, 소설에는 염상섭, 이익상, 민태원 등이다. 창간호는 1000부를 발행하였고, 다음 호는 이병조에 의하여 시반도사에서 발행하였다.
폐허라는 제호는 독일의 시인 J.C.F.실러의 \"옛 것은 멸하고 시대는 변한다. 새 생명은 이 폐허에서 피어난다\"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후기에 “우리가 荒凉落寞한 조선의 예원을 개척하여 거기다 무엇을 건설하고 부활하고 이식하여 백화난만한 화원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세계 예원의 내용, 외완을 더 풍부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폐허를 발행한 취지라고 할 수 있다.
문학적 경향은 퇴폐적 낭만주의였다. 퇴폐주의란 문학이 인간 생활의 이상에 참여하지 않게 되고, 안이한 생활 의 식을 만족시키기 위해 몰이성적 간성에 호소하게 되면서 감각적인 만족을 주는 것을 그 기능으로 삼게 된다. 그리하여 美 그 자체를 찾아 관능적인 미를 추구하게 되고, 괴기한 것과 이상한 것에서 오는 미를 좋아하며, 퇴폐 그 자체를 미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퇴폐주의는 3·1운동의 좌절과 극도의 경제적 궁핍을 경험한 식민지 청년 지식인들의 불안의식과 세기말 사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28세에 요절한 시인 남궁벽은 페허를 내는데 적극 참여해 편집후기를 쓰고, 제 2호에 시 네 편을 실었다. 일본어와 영어시를 발표하기도 하고 번역을 하기도 하였다. 국어로 쓴 시는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 페허에 발표한 ‘풀’에서는 대지의 생명이 자기의 마음과 이어져 있다고 했다. 신생활에 실린 ‘별의 아픔’은 님이라고 한 생명의 주재자에게 어린아이가 뒹굴면 “感應的으로 깜짝 놀나신 일이 업스심니가”하고, 지상의 꽃이 꺽일 때 천상의 별이 아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마’에서는 체념하는 표정만 하고서 웃음이 없는 말을 동정해 사람이 말이 될 때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생명이건 끔찍이도 사랑하는 이채로운 사상을 찾다가 표현의 성숙은 꾀하지 못하고 요절했다.
하루 200개비의 줄담배를 피우며 일생을 독신으로 외롭게 살다 세상을 떠난 공초(供招) 오상순은 폐허 창간호에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논설을 싣고, 제 2 호에 시를 17편이나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시는 대부분 짤막한 수상록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거창한 문제를 제기하고서 착상은 단순하다. ‘힘의 숭배’에서 ‘혁명’까지의 몇 작품은 적중하지 못한 열변을 토로했고, 돌을 보고 말을 자유롭게 할 날이 있으리라고 한 ‘돌아’는 범속한 설명으로 흘렀다. 동명에 발표한 ‘방랑의 마음’은 어디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혼이 바다의 소리나 냄새를 그리워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일제 치하라는 현실의 질곡을 벗어난 이상향을 그리워하며 정처없이 떠도는 마을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오상순은 그의 작품의 제목처럼 평생을 ‘방랑의 마음’으로 전국을 떠돌며 일제 식민지 치하의 삶을 ‘허무와 세속에서의 일탈’을 영위하려 하였다.
변영로는 폐허에서 서양문학을 소개하는 논설을 발표하고, 장미촌의 권두언을 쓴 다음, 1924년 1월에 창간되어 통권 1호로 종간되었다. 편집인은 염상섭, 발행인은 아놀드이고, 페허이후사에서 발행하였다. 폐허의 뒤를 이은 문예동인지로 《창조》, 《폐허》, 《백조》등의 동인이 고루 참여하였는데, 《폐허》의 동인이 주를 이루었다.
폐허이후에 비로소 시 두 편을 선보였다. 남궁벽이나 오상순처럼 거추장스러운 문제를 놓고 번민하지 않고, 잃어버린 조선의 마음을 되살려야 한다면서 그 방법을 강구하는데 정성을 모았다. 폐허이후에 발표한 ‘생시에 못 뵈올 님을’에서부터 말을 잘 다듬어 미묘한 느낌을 주는 표현을 개척하였다. “꿈조차 흔들니우고 흔들니여 / 그립든그대 갓가울들 머러라”에서 볼 수 있듯이 생경한 한자에 의존하지 않고, 전통적인 율격을 받아들여 형식의 안정을 꾀한 점도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율격의 변형을 적게 하고 단조로운 반복을 즐겼으며, 시상의 폭을 좁혔다. 그러나 논개에서는 느낌을 조절하는 작업의 범위를 넘어서서, 논개를 기리는 애국의 정열을 유려한 가락에 실어 인상 깊게 나타냈다. 진주 남강의 푸른 물결과 논개의 붉은 마음을 거듭 대조시킨 수법이 단순하기는 하지만 적절한 효과를 거두었다. 백조 동인들이 암울한 시대 상황에 굴복하여 한숨과 눈물만을 토로한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시를 쓴 데 비해, 변영로는 민족적 폐배감에 젖어 있는 식민지 뱃성들에게 ‘논개’의 우국 충절을 보여 줌으로써 민족 의식을 고취시켜 주었다. 논개의 시는 저항적인 색채로 말미암아 이 작품이 수록된 시짐 ‘조선의 마음’은 발간 직후 일제로부터 판매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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