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김동인의 생애와 활동
2. 동인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 톨스토이와 인형조종술
3. 그의 문학세계
4. 김동인의 주요 작품
(1) 감자
(2) 배따라기
5. 김동인의 유미주의와 한계
(1) 광염소나타
(2) 광화사
6. 결론
보충. 사실주의
자연주의
이광수와 김동인의 비교 분석
일본 문학이 김동인에 미친 영향
2. 동인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 톨스토이와 인형조종술
3. 그의 문학세계
4. 김동인의 주요 작품
(1) 감자
(2) 배따라기
5. 김동인의 유미주의와 한계
(1) 광염소나타
(2) 광화사
6. 결론
보충. 사실주의
자연주의
이광수와 김동인의 비교 분석
일본 문학이 김동인에 미친 영향
본문내용
김 동 인에 대해서
김동인연보.
1900. 10. 2 평양~1951. 1. 5 서울.
소설가.
[개요]
초기 근대문학의 확립과정에서 문단을 주도했던 이광수류의 계몽적 교훈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본관은 전주. 호는 금동(琴童)금동인(琴童人)춘사(春士).
1.[생애와 활동]
평양교회 장로였던 아버지 대윤(大潤)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옥씨(玉氏)는 후실로 전실에게서 장남 동원이 있었고, 동인동평동선은 옥씨 소생이다.
1912년 평양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학원 중학부에 입학, 학원이 문을 닫자 메이지 학원[明治學院]에 편입해 1916년에 졸업했다. 이때부터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던 꿈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했다.
1917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잠시 귀국했다가 이듬해 4월 김혜인(金惠仁)과 결혼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美術學校]에 들어갔다.
1919년 2월 주요한전영택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1919. 2)을 비롯해 〈배따라기〉(1921. 5) 등을 발표했다. 31운동 파문으로 귀국한 뒤, 아우 동평의 부탁으로 격문을 써주었다가 출판법 위반혐의로 6개월 징역을 살았다.
1921년 경영이 어려워 〈창조〉를 제9호로 폐간한 후, 방탕한 생활을 했다.
1924년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펴냈고, 같은 해 8월 〈창조〉의 후신격이라 할 수 있는 〈영대 靈臺〉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제5호로 폐간했다.
1925년 단편 〈감자〉(조선문단, 1925.1)〈정희〉(조선문단, 1925. 58)〈시골 황서방〉(개벽, 1925.6) 등을 발표했다.
1926년 재산을 탕진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수리사업을 시작했지만 당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 실패, 이때의 차용금으로 전재산을 날렸으며 이로 인해 부인 김혜인이 가출했다.
1928년 아우 동평을 도와 영화제작에도 손을 댔으나 역시 실패하여 극도로 궁핍해졌다. 잠시 조선일보 사 학예부장을 지낸 뒤, 1930년 김경애(金瓊愛)와 재혼하고,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신문잡지 에 많은 소설과 사담을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으로 〈광염 소나타〉(중외일보, 1930. 1. 1~10)〈젊은 그들〉(동아일보, 1930. 9. 2~1931. 11. 10)〈발가락이 닮았다〉(동광, 1932. 1)〈붉은 산〉(삼천리, 1932. 4) 〈운현궁의 봄〉(조선일보, 1933. 4. 26~1934. 2. 15) 등이 있다.
1935년 12월에는 손수 〈야담〉을 창간했으며 그후 〈광화사 狂畵師〉(야담, 1935.12) <김연 실전〉(문장, 1939. 3)〈대수양〉(조광, 1941. 2~12) 등을 발표했다.
1942년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명으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빈곤과 불면증, 약물중독으로 고통 받는다.
1951년 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에 죽었다.
1955년 사상계사에서 \'동인문학상\'을 제정시행했으나, 19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2.[동인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한국의 근대문학사에서 김동인의 문학이 지니는 중요성은
<첫째로> 그의 반공리주의적 예술관에 있다. 그는 예술이 어떤 다른 목적에 의해 침해 당하는 것을 거부했다. 예술지상주의와 순수문학을 주장하고 나선다. 예술의 순수성에 대해 동인의 집념은 사재를 통해 최초의 종인지 <창조>를 통해 구현된다. 한국의 초창기 문학은 동인지를 통하여 뿌리를 내리는 만큼 창조는 근대문학의 기반형성에 기여한 바가 많다. <창조>를 통하여 동인은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려 노력했고, 언문일치를 지향했다.
<두번째> 소설을 문예의 중심장르로 격상시킨데 있다. 그는 통속소설이나 역사소설은 소설로 보지 않았다. 순수소설에만 해당된다. 인형조정술에 대한 집착, 간결의 미학 등이 그의 순수소설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있지만, 소설의 지위격상, 순수소설에 대한 정열, 단편형식의 확립 등은 한국소설에 끼친 동인의 공적이다. 그러나 천대한 역사소설이 순수소설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한 것은 동인문학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세번째> 평론가로서의 동인이다. 형식주의적 접근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가로서의 동인의
김동인연보.
1900. 10. 2 평양~1951. 1. 5 서울.
소설가.
[개요]
초기 근대문학의 확립과정에서 문단을 주도했던 이광수류의 계몽적 교훈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본관은 전주. 호는 금동(琴童)금동인(琴童人)춘사(春士).
1.[생애와 활동]
평양교회 장로였던 아버지 대윤(大潤)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옥씨(玉氏)는 후실로 전실에게서 장남 동원이 있었고, 동인동평동선은 옥씨 소생이다.
1912년 평양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학원 중학부에 입학, 학원이 문을 닫자 메이지 학원[明治學院]에 편입해 1916년에 졸업했다. 이때부터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던 꿈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했다.
1917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잠시 귀국했다가 이듬해 4월 김혜인(金惠仁)과 결혼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美術學校]에 들어갔다.
1919년 2월 주요한전영택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1919. 2)을 비롯해 〈배따라기〉(1921. 5) 등을 발표했다. 31운동 파문으로 귀국한 뒤, 아우 동평의 부탁으로 격문을 써주었다가 출판법 위반혐의로 6개월 징역을 살았다.
1921년 경영이 어려워 〈창조〉를 제9호로 폐간한 후, 방탕한 생활을 했다.
1924년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펴냈고, 같은 해 8월 〈창조〉의 후신격이라 할 수 있는 〈영대 靈臺〉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제5호로 폐간했다.
1925년 단편 〈감자〉(조선문단, 1925.1)〈정희〉(조선문단, 1925. 58)〈시골 황서방〉(개벽, 1925.6) 등을 발표했다.
1926년 재산을 탕진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수리사업을 시작했지만 당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 실패, 이때의 차용금으로 전재산을 날렸으며 이로 인해 부인 김혜인이 가출했다.
1928년 아우 동평을 도와 영화제작에도 손을 댔으나 역시 실패하여 극도로 궁핍해졌다. 잠시 조선일보 사 학예부장을 지낸 뒤, 1930년 김경애(金瓊愛)와 재혼하고,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신문잡지 에 많은 소설과 사담을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으로 〈광염 소나타〉(중외일보, 1930. 1. 1~10)〈젊은 그들〉(동아일보, 1930. 9. 2~1931. 11. 10)〈발가락이 닮았다〉(동광, 1932. 1)〈붉은 산〉(삼천리, 1932. 4) 〈운현궁의 봄〉(조선일보, 1933. 4. 26~1934. 2. 15) 등이 있다.
1935년 12월에는 손수 〈야담〉을 창간했으며 그후 〈광화사 狂畵師〉(야담, 1935.12) <김연 실전〉(문장, 1939. 3)〈대수양〉(조광, 1941. 2~12) 등을 발표했다.
1942년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명으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빈곤과 불면증, 약물중독으로 고통 받는다.
1951년 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에 죽었다.
1955년 사상계사에서 \'동인문학상\'을 제정시행했으나, 19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2.[동인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한국의 근대문학사에서 김동인의 문학이 지니는 중요성은
<첫째로> 그의 반공리주의적 예술관에 있다. 그는 예술이 어떤 다른 목적에 의해 침해 당하는 것을 거부했다. 예술지상주의와 순수문학을 주장하고 나선다. 예술의 순수성에 대해 동인의 집념은 사재를 통해 최초의 종인지 <창조>를 통해 구현된다. 한국의 초창기 문학은 동인지를 통하여 뿌리를 내리는 만큼 창조는 근대문학의 기반형성에 기여한 바가 많다. <창조>를 통하여 동인은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려 노력했고, 언문일치를 지향했다.
<두번째> 소설을 문예의 중심장르로 격상시킨데 있다. 그는 통속소설이나 역사소설은 소설로 보지 않았다. 순수소설에만 해당된다. 인형조정술에 대한 집착, 간결의 미학 등이 그의 순수소설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있지만, 소설의 지위격상, 순수소설에 대한 정열, 단편형식의 확립 등은 한국소설에 끼친 동인의 공적이다. 그러나 천대한 역사소설이 순수소설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한 것은 동인문학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세번째> 평론가로서의 동인이다. 형식주의적 접근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가로서의 동인의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