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세계문화유산 화성이란?
화성의 특징과 우수성화성 축성 개요 화성 개요
"화성성역의궤"로 본 화성공사......
나의 화성답사 코스
1.장안문(4대문)
2. 북동포루
3. 화홍문(북수문)
4. 동북각루(방화수류정)
5. 북암문
6. 동북포루(각건대)
7. 동암문8.동장대(연무대)
9. 동북공심돈
10. 창룡문(4대문)
11. 치성(동일치)
12. 봉돈
13. 남수문
14. 화령전
15. 팔달문(4대문)
16. 화성행궁
17. 서남각루
18. 서장대
19. 서노대
20. 화서문(4대문)
21. 서북공심돈
22. 북서적대
화성답사 후 느낀 점...
화성의 특징과 우수성화성 축성 개요 화성 개요
"화성성역의궤"로 본 화성공사......
나의 화성답사 코스
1.장안문(4대문)
2. 북동포루
3. 화홍문(북수문)
4. 동북각루(방화수류정)
5. 북암문
6. 동북포루(각건대)
7. 동암문8.동장대(연무대)
9. 동북공심돈
10. 창룡문(4대문)
11. 치성(동일치)
12. 봉돈
13. 남수문
14. 화령전
15. 팔달문(4대문)
16. 화성행궁
17. 서남각루
18. 서장대
19. 서노대
20. 화서문(4대문)
21. 서북공심돈
22. 북서적대
화성답사 후 느낀 점...
본문내용
)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혜경궁의 자리는 행궁 내전의 북벽에 남쪽을 향해 놓여졌고 왕의 자리는 동쪽에 배치되었다. 혜경궁 자리에는 연꽃무늬 방석이 깔리고 뒤에는 십장생 병풍이 둘러 쳐졌으며 왕의 자리에는 표피방석과 진채병풍이 놓여졌다. 왕이 술잔을 올리고 치사를 드리자 혜경궁은 \"전하와 더불어 경사를 함께 한다.\"는 선지(宣旨)를 내리고 술을 마셨고 여민락과 천세만세곡이 연주되자 왕은 절하는 자세로 가서 경의를 표한 다음 천세(千歲), 천세, 천천세를 불렀다.
여섯째 날 - 새벽에 화성주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다.
이 날은 새벽에 신풍루(新豊樓)에서 화성부의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인 사민(四民)과 가난한 사람인 진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진정1각(辰正一刻, 8시 15분경)에는 낙남헌(洛南軒)에서 양로연을 열어 비단 한 단씩을 나눠 주었는데 이것은 화성주민에게 인정을 베풀어 어머니 회갑의 기쁨을 함께 갖고자 원했던 것이다.
일곱째 날 - 귀경길에 오르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려올 때와 같았는데 사근평참에서 점심을 들고 시흥행궁에서 밤을 지내 는 것이 이 날의 일정이었다. 진정3각(辰正三刻, 오전 8시 45분경)3취에 왕은 군복을 입고 출발하여 미륵현(彌勒峴, 지지대고개)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오늘날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선에 해당하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화성은 물론 아버지 무덤인 현륭원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에 왕은 \"이곳이 오면 떠나기 싫어 나도 모르게 방황하게 되니 이곳을 지지(遲遲)라고 이름 지으라\"고 했다. 이 때부터 이 고개를 지지대 고개로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그 유래를 적은 비각(碑閣)이 서 있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소재)
여덟째 날 - 시흥에서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다
이 날 아침 왕은 시흥행궁을 떠나 궁에 돌아가기 앞서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 민생의 질고(疾苦)를 듣고자 묘정3각(卯正三刻時, 오전 6시 45분경)에 부로(父老)와 민인(民人)을 만나 백성들의 소망을 듣고 이 자리에서 환곡을 탕감해 주는 시혜를 베풀었으며, 노량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고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서 저녁에 창덕궁으로 돌아옴으로써 8일간의 장엄한 효행의 화성 어가행차가 막을 내렸다.
17. 서남각루
각루는 성곽의 돌출된 요지 중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을 세워서 성곽주변을 감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물입니다. 서남각루는 일명 화양루라고 하며 서남암문 밖170m 지점의 외성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의 높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로 정망이 매우 좋습니다. 서남암문에서 이곳까지 이어지는 통로를 용도라고 부르며 통로 좌우축에는 치가 각 1개씩 설치되어 있습니다.
18. 서장대
정대는 주변의 사방을 내려다 보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화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 2개소가 있습니다.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는 일명 화성장대라고도 하며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2층으로 오르면 사방 100리가 보여 성안에 있는 군사를 한눈에 보고 지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곳은 정조대왕께서 화산 능 참배를 위해 화성을 방문할 때 직접 오셔서 군사를 지휘하셨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오방색이란 깃발이 있는데 이는 방위별 색깔을 말하며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에는 황색 등으로 이에 따라 깃발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앞의 큰 깃발은 각각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 황색기는 장수기로 군의 지휘관이 이곳에 있다는 표시이며 흰색기는 병권을 상징하는 깃발로 병조판서 등이 이곳에 있을 때 게양하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임금님이 오셨을 때는 용기를 달게 됩니다.
19. 서노대
노대란 누각이 없이 잔돌을 쌓아 높은 대를 만든 시설물로 적의 공격을 항상 감시해서 대와 성 전체에 오방색 기로 신호를 하며 적이 근접 했을 때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진지입니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등 2개의 노대가 있는데 서노대는 서장대 옆에 팔각형으로 약 3m의 높이로 여장을 쌓아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곳에 오르면 성밖의 서쪽이 한눈에 들어오며 적으로부터 군사 지휘소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20. 화서문(4대문)
화서문은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성의 서쪽 문입니다. 이 문은 석축으로 된 무지개 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으며 사방은 여장으로 둘러졌고, 팔달문이나 장안문과는 다르게 문의 전면에는 벽돌로 쌓은 반월형 옹성이 한쪽이 터진 모양으로 설치되었습니다. 문루 안에는 중앙에 마루를 깔았으며 지붕은 팔작 지붕으로 아담하고 우아한 멋을 풍기고 있습니다.
※ 동쪽문인 창룡문과 규모와 형식이 거의 같습니다.
21. 서북공심돈
공심돈은 일종의 망루와 같은 것으로 4면을 벽체로 하고 벽체 내부는 3층으로 사다리를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고 중앙부는 빈 공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외부벽체에는 구멍을 뚫어 바깥의 동정을 엿볼수 있고 백자총, 불랑기 등 총을 발사하여 적으로서는 어느 곳에서 날아오는지 알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서북공심돈은 전돌로 벽체를 4각으로 쌓았으며, 3층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층에는 단층 망루를 세워 4면에 판문을 설치 하였으며 성벽과 망루의 판문에는 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층과 층사이는 마루판을 여닫도록 하는 문을 만들어 나무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리게 되어 있고 출입문은 작은 무지개문으로 하였습니다.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설비로서 구조도 특수하고 화서문과 잘 어울려 성곽 경관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하고 있습니다.
22. 북서적대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입니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 되어 있습니다.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 하였으며 총안등을 만들어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장안문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서적대라고 합니다.
화성답사 후 느낀 점...
어릴 때 2번 와보고 오랜만에 와본 수원 화성은 참으로 생소했다. 어릴 때는 수박 겉즙기 식으로
여섯째 날 - 새벽에 화성주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다.
이 날은 새벽에 신풍루(新豊樓)에서 화성부의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인 사민(四民)과 가난한 사람인 진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진정1각(辰正一刻, 8시 15분경)에는 낙남헌(洛南軒)에서 양로연을 열어 비단 한 단씩을 나눠 주었는데 이것은 화성주민에게 인정을 베풀어 어머니 회갑의 기쁨을 함께 갖고자 원했던 것이다.
일곱째 날 - 귀경길에 오르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려올 때와 같았는데 사근평참에서 점심을 들고 시흥행궁에서 밤을 지내 는 것이 이 날의 일정이었다. 진정3각(辰正三刻, 오전 8시 45분경)3취에 왕은 군복을 입고 출발하여 미륵현(彌勒峴, 지지대고개)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오늘날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선에 해당하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화성은 물론 아버지 무덤인 현륭원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에 왕은 \"이곳이 오면 떠나기 싫어 나도 모르게 방황하게 되니 이곳을 지지(遲遲)라고 이름 지으라\"고 했다. 이 때부터 이 고개를 지지대 고개로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그 유래를 적은 비각(碑閣)이 서 있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소재)
여덟째 날 - 시흥에서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다
이 날 아침 왕은 시흥행궁을 떠나 궁에 돌아가기 앞서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 민생의 질고(疾苦)를 듣고자 묘정3각(卯正三刻時, 오전 6시 45분경)에 부로(父老)와 민인(民人)을 만나 백성들의 소망을 듣고 이 자리에서 환곡을 탕감해 주는 시혜를 베풀었으며, 노량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고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서 저녁에 창덕궁으로 돌아옴으로써 8일간의 장엄한 효행의 화성 어가행차가 막을 내렸다.
17. 서남각루
각루는 성곽의 돌출된 요지 중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을 세워서 성곽주변을 감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물입니다. 서남각루는 일명 화양루라고 하며 서남암문 밖170m 지점의 외성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의 높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로 정망이 매우 좋습니다. 서남암문에서 이곳까지 이어지는 통로를 용도라고 부르며 통로 좌우축에는 치가 각 1개씩 설치되어 있습니다.
18. 서장대
정대는 주변의 사방을 내려다 보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화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 2개소가 있습니다.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는 일명 화성장대라고도 하며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2층으로 오르면 사방 100리가 보여 성안에 있는 군사를 한눈에 보고 지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곳은 정조대왕께서 화산 능 참배를 위해 화성을 방문할 때 직접 오셔서 군사를 지휘하셨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오방색이란 깃발이 있는데 이는 방위별 색깔을 말하며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에는 황색 등으로 이에 따라 깃발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앞의 큰 깃발은 각각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 황색기는 장수기로 군의 지휘관이 이곳에 있다는 표시이며 흰색기는 병권을 상징하는 깃발로 병조판서 등이 이곳에 있을 때 게양하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임금님이 오셨을 때는 용기를 달게 됩니다.
19. 서노대
노대란 누각이 없이 잔돌을 쌓아 높은 대를 만든 시설물로 적의 공격을 항상 감시해서 대와 성 전체에 오방색 기로 신호를 하며 적이 근접 했을 때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진지입니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등 2개의 노대가 있는데 서노대는 서장대 옆에 팔각형으로 약 3m의 높이로 여장을 쌓아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곳에 오르면 성밖의 서쪽이 한눈에 들어오며 적으로부터 군사 지휘소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20. 화서문(4대문)
화서문은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성의 서쪽 문입니다. 이 문은 석축으로 된 무지개 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으며 사방은 여장으로 둘러졌고, 팔달문이나 장안문과는 다르게 문의 전면에는 벽돌로 쌓은 반월형 옹성이 한쪽이 터진 모양으로 설치되었습니다. 문루 안에는 중앙에 마루를 깔았으며 지붕은 팔작 지붕으로 아담하고 우아한 멋을 풍기고 있습니다.
※ 동쪽문인 창룡문과 규모와 형식이 거의 같습니다.
21. 서북공심돈
공심돈은 일종의 망루와 같은 것으로 4면을 벽체로 하고 벽체 내부는 3층으로 사다리를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고 중앙부는 빈 공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외부벽체에는 구멍을 뚫어 바깥의 동정을 엿볼수 있고 백자총, 불랑기 등 총을 발사하여 적으로서는 어느 곳에서 날아오는지 알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서북공심돈은 전돌로 벽체를 4각으로 쌓았으며, 3층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층에는 단층 망루를 세워 4면에 판문을 설치 하였으며 성벽과 망루의 판문에는 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층과 층사이는 마루판을 여닫도록 하는 문을 만들어 나무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리게 되어 있고 출입문은 작은 무지개문으로 하였습니다.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설비로서 구조도 특수하고 화서문과 잘 어울려 성곽 경관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하고 있습니다.
22. 북서적대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입니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 되어 있습니다.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 하였으며 총안등을 만들어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장안문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서적대라고 합니다.
화성답사 후 느낀 점...
어릴 때 2번 와보고 오랜만에 와본 수원 화성은 참으로 생소했다. 어릴 때는 수박 겉즙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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