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악령에게 기도까지해 가면서 애써 비정해지려 노력하고, 남편을 선동하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맥베스를 영웅적으로 만드는 것은 세상의 혼돈과 불확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투쟁과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태도이다. 극의 결말에서 마녀들의 모호한 예언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모두 허구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도 그는 굴복하지 않는다. 죽을 때 까지 그는 혼돈의 세력에 맞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성취한다. 하지만 맥베스가 보여주는 용기는 비극적이다. 그 이유는 그 용기가 결코 이 세상의 혼돈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자신의 존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맥더프가 맥베스를 죽였지만, 삶의 허무함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던진 것은 맥베스 자신이었다.
자신의 부인이 죽었음을 알았을 때, 맥베스는 아무런 슬픔이나 놀람을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세상에서의 지위를 포함하여 모든 욕망과 투쟁이 무의미함을 깨닫게 한다. 그는 결국 혼돈과 불안, 고통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존재 상황임을 깨닫게 된 거이다. 맥베스의 비극적인 인식은 그가 살인자라 할지라도, 극에서 보인 그의 고통과 투쟁은 그가 죄인일 뿐만 아니라, 실제와 허구사이의 혼돈에 직면해 투쟁하는 비극적 영웅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Ⅴ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가 처해있던 중세의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그 갈등을 그대로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기독교문화로서 해석을 한다면 이 작품은 성경 창세기 3장의 인간의 타락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데, 맥베스는 아담에, 맥베스는 이브에, 마녀는 뱀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선악과'를 준 이유는 인간과 신의 인력적인 사랑의 관계를 원했기 때문임을 모르는 인간은 신과 같이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하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고 마녀의 예언에 빠져 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는 죄를 범한다.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했듯이 왕위에 오른 맥베스도 만족하고 행복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계속해서 살인을 저질러야했고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끝내 아담과 이브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처럼 맥베스와 그의 부인도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성경의 이야기 구조와 같을 수 있는 것은 당대 사회의 기독교문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욕망의 과정을 극화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은 이러한 기독교 문화에 대한 저항에서 나왔다. 인간의 신에 대한 거부감을 이처럼 악의 구현으로 표현했지만 결말에는 선이 악을 이기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신본주의 내지는 절대 선에 대한 개념이 무너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한 인간이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헛된 욕망에 이끌려 지신의 삶을 허비하고 끝내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셰익스피어의 이 작품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여 준다. 인간의 끊임없는 권력에의 욕구는 단지 맥베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과 악에 대한 자유의지는 누구에게나 있다. 만약에 맥베스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영주로서 장군으로서 선한 의지만을 구현하면서 살았다면 그의 운명은 이처럼 비극적인 파멸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존재론적인 한계를 갖고 있음은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부질없이 헛된 욕망을 쫓으며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의미 있는 그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까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맥베스를 영웅적으로 만드는 것은 세상의 혼돈과 불확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투쟁과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태도이다. 극의 결말에서 마녀들의 모호한 예언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모두 허구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도 그는 굴복하지 않는다. 죽을 때 까지 그는 혼돈의 세력에 맞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성취한다. 하지만 맥베스가 보여주는 용기는 비극적이다. 그 이유는 그 용기가 결코 이 세상의 혼돈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자신의 존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맥더프가 맥베스를 죽였지만, 삶의 허무함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던진 것은 맥베스 자신이었다.
자신의 부인이 죽었음을 알았을 때, 맥베스는 아무런 슬픔이나 놀람을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세상에서의 지위를 포함하여 모든 욕망과 투쟁이 무의미함을 깨닫게 한다. 그는 결국 혼돈과 불안, 고통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존재 상황임을 깨닫게 된 거이다. 맥베스의 비극적인 인식은 그가 살인자라 할지라도, 극에서 보인 그의 고통과 투쟁은 그가 죄인일 뿐만 아니라, 실제와 허구사이의 혼돈에 직면해 투쟁하는 비극적 영웅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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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셰익스피어가 처해있던 중세의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그 갈등을 그대로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기독교문화로서 해석을 한다면 이 작품은 성경 창세기 3장의 인간의 타락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데, 맥베스는 아담에, 맥베스는 이브에, 마녀는 뱀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선악과'를 준 이유는 인간과 신의 인력적인 사랑의 관계를 원했기 때문임을 모르는 인간은 신과 같이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하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고 마녀의 예언에 빠져 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는 죄를 범한다.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했듯이 왕위에 오른 맥베스도 만족하고 행복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계속해서 살인을 저질러야했고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끝내 아담과 이브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처럼 맥베스와 그의 부인도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성경의 이야기 구조와 같을 수 있는 것은 당대 사회의 기독교문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욕망의 과정을 극화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은 이러한 기독교 문화에 대한 저항에서 나왔다. 인간의 신에 대한 거부감을 이처럼 악의 구현으로 표현했지만 결말에는 선이 악을 이기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신본주의 내지는 절대 선에 대한 개념이 무너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한 인간이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헛된 욕망에 이끌려 지신의 삶을 허비하고 끝내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셰익스피어의 이 작품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여 준다. 인간의 끊임없는 권력에의 욕구는 단지 맥베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과 악에 대한 자유의지는 누구에게나 있다. 만약에 맥베스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영주로서 장군으로서 선한 의지만을 구현하면서 살았다면 그의 운명은 이처럼 비극적인 파멸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존재론적인 한계를 갖고 있음은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부질없이 헛된 욕망을 쫓으며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의미 있는 그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까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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