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신라 불교 수용의 시대적 배경 ············· <2p>
(지증왕, 법흥왕 중심)
Ⅱ. 본론
♣.신라의 불교 전래와 수용, 그리고 공인 ········· <3p>
⊙.신라 불교의 중심 사상 ··············· <5p>
1.호국불교사상
2.미륵사상
3.정토사상
⊙.신라 불교의 승려 ················· <7p>
1.원광
2.안홍
3.자장
4.원효
5.의상
Ⅲ. 결론
♣.불교가 신라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 <10p>
♣.신라 불교 수용의 시대적 배경 ············· <2p>
(지증왕, 법흥왕 중심)
Ⅱ. 본론
♣.신라의 불교 전래와 수용, 그리고 공인 ········· <3p>
⊙.신라 불교의 중심 사상 ··············· <5p>
1.호국불교사상
2.미륵사상
3.정토사상
⊙.신라 불교의 승려 ················· <7p>
1.원광
2.안홍
3.자장
4.원효
5.의상
Ⅲ. 결론
♣.불교가 신라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 <10p>
본문내용
干 6년
.
법흥왕대는 이러한 지증왕대의 업적들을 토대로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율령(律令)의 반포이다. 일반적으로 율령의 반포는 고대 국가 체제의 완성을 알려주는 지표로 삼는다. 이 시기 율령 반포에 대해 이를 부정하거나, 공복제의 실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긍정하고 있다. 더욱이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 冷水里 新羅碑)나 울진 봉평 신라비(蔚殄 鳳坪 新羅碑)와 같은 금석문이 발견되어 연구되면서 기정 사실화 되어 있는 추세이다 주보돈은 율령 반포전에(지증왕 4년, 503)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일 냉수리 신라비>와 율령 반포 이후 건립된(법흥왕 11년, 524) <울진 봉평 신라비>의 관등명을 조사하여, 경의제가 지증왕 이후 법흥왕대에 이르는 사이에 완성되었으며, 이는 법흥왕 7년(520)에 반포된 율령 속에 법제화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주보돈, 「6세기초 신라 왕권의 위상과 관등제의 성립」 『역사교육론집』 13.14, 경북대, 1990)
. 이러한 율령의 반포는 당시 성장하는 신라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법흥왕 4년에는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三國史記 券4, 新羅本紀4, 法興王 4년
. 신라 군사 제도의 본격적인 정비는 진흥왕대라고는 하나 군사 제도 정비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이때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는 군대 동원에 있어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로 동원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국적인 규모의 지방민을 대상으로 한 군사 제도의 개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더군다나 병부의 설치는 군정(軍政)과 군영(軍令)을 분리시킴으로 인해 연맹단계 이래의 병권(兵權)의 분산성을 극복하고 이를 왕권하(王權下)에 종속시키기 위한 조처라고 한다 『역사교육론집』이우태, 100쪽
. 병부의 설치는 율령반포와 함께 전국적인 군사력 동원을 이뤄 이후 비약적 영토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법흥왕 18년(531)에는 상대등이라는 관직이 설치되었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 관직이며 신라 귀족회의의 주재로서 신라 귀족의 대표적 존재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왕권이 강화되면 서 왕이 귀족회의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어 감에 따라 왕의 밑에서 귀족들은 거느리는 지위였다. 그러므로 상대등은 귀족들의 대표자이면서 동시에 강화된 왕권과도 조화되는 독특한 관직이었다 「상대등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이기백
. 이러한 상대등의 설치는 이전시기보다 강력해진 왕권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법흥왕 23년(536)에는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웠다 三國史記 券4, 新羅本紀4, 法興王 23년
. 이 시기는 이미 율령이 반포된 후의 시기이며, 더불어 불교의 공인도 이루어진 다음의 시기이다. 그러한 시기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신라가 대내적으로는 왕권이 확립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Ⅱ. 본론
♣.신라불교의 전래와 수용, 그리고 공인
삼국시대에는 선사시대 이래의 샤머니즘이 널리 퍼져있었고 또한 각 부족의 가조신(始祖神)도 주요 신앙으로 널리 신봉되었다. 신라의 경우 불교 전래사료는 비교적 자세하다 『韓國佛敎史의 재조명』 김병무, 61쪽
.
불교 전래 이전의 신라 사회는 앞서 언급했듯이 샤머니즘 사회였다. 불교 전래 당시의 고유문화가 비교적 높은 수준에 있었고, 재래종교가의 세력도 무시 못할 정도였음을 염두에 둘 때 불교수용에 대한 샤머니즘측의 거센 반발을 이해하게 된다 『新羅思想史硏究』 李基白, 65쪽
.
그러나 원시종교나 조상숭배만으로 점차 발전해 가는 삼국의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시대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고등종교는 갈구되었으며, 이에 부응하여 전래수용된 것이 불교였다.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것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진나라의 순도(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肖門寺), 이불란사(伊弗蘭寺)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新羅思想史硏究』 李基白, 4쪽
.
신라의 공인 이전 불교는 주로 왕실 중심으로 수용되었다.
신라에서는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417~458)대에 고구려를 거쳐 온 아도(묵호자)에 의해 불교가 파급되었으나 박해로 인해 법흥왕 14년(527)에 가서야 ‘이차돈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차돈의 순교’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야 한다 『韓國史槪論』 배용일 43쪽
.
그런데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 이차돈에 대한 서술은 차이가 있다.
『三國史記』의 법흥왕 15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왕과 이차돈은 불교를 공인하고자 하나 군신들의 반대로 인하여 뜻을 이루기 힘들게 되어, 왕과 이차돈이 밀약을 맺고 이차돈이 처형됨으로서 불교가 공인을 이룬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밀약의 내용이 정확히 어떠한 것이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들고, 이차돈을 처형하는 명분도 그다지 명확하게 나와있지 못하다. 『三國遺事』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차돈이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하여 신에게 벌하여 머리를 베라”고 하자 왕은 사원을 지으라는 명령을 고의로 지체시켰다는 이유로 이차돈을 처형했다고 한다 『韓國古代史』 文定昌, 240쪽
. 결국 사건의 발단은 법흥왕의 흥불정책에 있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법흥왕이 흥불을 위해 사찰을 건립코자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소지왕대 사찰이 있었으나 그것은 왕실을 상대로 한 것이었음) 여기서 법흥왕의 의도는 왕실 밖의 공개적인 곳에 사찰을 건립함으로써 불교를 공식화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국왕세력이 권력 성장이 늦었기 때문에 이차돈의 순교사건을 계기로 공인되었다 이차돈 ― 신라의 승려, 한국 불교사상 최초의 순교자. 별칭은 거차돈, 처도, 자는 염촉, 염도
습보 갈문왕의 증손. 속성은 박. 법흥왕의 근신으로서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벼슬은 내사사인이었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재래의 토착신앙에 젖은 조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
.
법흥왕대는 이러한 지증왕대의 업적들을 토대로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율령(律令)의 반포이다. 일반적으로 율령의 반포는 고대 국가 체제의 완성을 알려주는 지표로 삼는다. 이 시기 율령 반포에 대해 이를 부정하거나, 공복제의 실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긍정하고 있다. 더욱이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 冷水里 新羅碑)나 울진 봉평 신라비(蔚殄 鳳坪 新羅碑)와 같은 금석문이 발견되어 연구되면서 기정 사실화 되어 있는 추세이다 주보돈은 율령 반포전에(지증왕 4년, 503)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일 냉수리 신라비>와 율령 반포 이후 건립된(법흥왕 11년, 524) <울진 봉평 신라비>의 관등명을 조사하여, 경의제가 지증왕 이후 법흥왕대에 이르는 사이에 완성되었으며, 이는 법흥왕 7년(520)에 반포된 율령 속에 법제화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주보돈, 「6세기초 신라 왕권의 위상과 관등제의 성립」 『역사교육론집』 13.14, 경북대, 1990)
. 이러한 율령의 반포는 당시 성장하는 신라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법흥왕 4년에는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三國史記 券4, 新羅本紀4, 法興王 4년
. 신라 군사 제도의 본격적인 정비는 진흥왕대라고는 하나 군사 제도 정비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이때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는 군대 동원에 있어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로 동원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국적인 규모의 지방민을 대상으로 한 군사 제도의 개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더군다나 병부의 설치는 군정(軍政)과 군영(軍令)을 분리시킴으로 인해 연맹단계 이래의 병권(兵權)의 분산성을 극복하고 이를 왕권하(王權下)에 종속시키기 위한 조처라고 한다 『역사교육론집』이우태, 100쪽
. 병부의 설치는 율령반포와 함께 전국적인 군사력 동원을 이뤄 이후 비약적 영토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법흥왕 18년(531)에는 상대등이라는 관직이 설치되었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 관직이며 신라 귀족회의의 주재로서 신라 귀족의 대표적 존재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왕권이 강화되면 서 왕이 귀족회의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어 감에 따라 왕의 밑에서 귀족들은 거느리는 지위였다. 그러므로 상대등은 귀족들의 대표자이면서 동시에 강화된 왕권과도 조화되는 독특한 관직이었다 「상대등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이기백
. 이러한 상대등의 설치는 이전시기보다 강력해진 왕권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법흥왕 23년(536)에는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웠다 三國史記 券4, 新羅本紀4, 法興王 23년
. 이 시기는 이미 율령이 반포된 후의 시기이며, 더불어 불교의 공인도 이루어진 다음의 시기이다. 그러한 시기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신라가 대내적으로는 왕권이 확립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Ⅱ. 본론
♣.신라불교의 전래와 수용, 그리고 공인
삼국시대에는 선사시대 이래의 샤머니즘이 널리 퍼져있었고 또한 각 부족의 가조신(始祖神)도 주요 신앙으로 널리 신봉되었다. 신라의 경우 불교 전래사료는 비교적 자세하다 『韓國佛敎史의 재조명』 김병무, 61쪽
.
불교 전래 이전의 신라 사회는 앞서 언급했듯이 샤머니즘 사회였다. 불교 전래 당시의 고유문화가 비교적 높은 수준에 있었고, 재래종교가의 세력도 무시 못할 정도였음을 염두에 둘 때 불교수용에 대한 샤머니즘측의 거센 반발을 이해하게 된다 『新羅思想史硏究』 李基白, 65쪽
.
그러나 원시종교나 조상숭배만으로 점차 발전해 가는 삼국의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시대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고등종교는 갈구되었으며, 이에 부응하여 전래수용된 것이 불교였다.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것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진나라의 순도(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肖門寺), 이불란사(伊弗蘭寺)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新羅思想史硏究』 李基白, 4쪽
.
신라의 공인 이전 불교는 주로 왕실 중심으로 수용되었다.
신라에서는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417~458)대에 고구려를 거쳐 온 아도(묵호자)에 의해 불교가 파급되었으나 박해로 인해 법흥왕 14년(527)에 가서야 ‘이차돈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차돈의 순교’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야 한다 『韓國史槪論』 배용일 43쪽
.
그런데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 이차돈에 대한 서술은 차이가 있다.
『三國史記』의 법흥왕 15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왕과 이차돈은 불교를 공인하고자 하나 군신들의 반대로 인하여 뜻을 이루기 힘들게 되어, 왕과 이차돈이 밀약을 맺고 이차돈이 처형됨으로서 불교가 공인을 이룬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밀약의 내용이 정확히 어떠한 것이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들고, 이차돈을 처형하는 명분도 그다지 명확하게 나와있지 못하다. 『三國遺事』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차돈이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하여 신에게 벌하여 머리를 베라”고 하자 왕은 사원을 지으라는 명령을 고의로 지체시켰다는 이유로 이차돈을 처형했다고 한다 『韓國古代史』 文定昌, 240쪽
. 결국 사건의 발단은 법흥왕의 흥불정책에 있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법흥왕이 흥불을 위해 사찰을 건립코자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소지왕대 사찰이 있었으나 그것은 왕실을 상대로 한 것이었음) 여기서 법흥왕의 의도는 왕실 밖의 공개적인 곳에 사찰을 건립함으로써 불교를 공식화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국왕세력이 권력 성장이 늦었기 때문에 이차돈의 순교사건을 계기로 공인되었다 이차돈 ― 신라의 승려, 한국 불교사상 최초의 순교자. 별칭은 거차돈, 처도, 자는 염촉, 염도
습보 갈문왕의 증손. 속성은 박. 법흥왕의 근신으로서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벼슬은 내사사인이었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재래의 토착신앙에 젖은 조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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