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삼국시대의 불상
⑴초기의 불상조각
⑵고구려
⑶백제
⑷신라
2.통일신라시대의 불상
⑴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성립
⑵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여러형식
⑶통일신라시대 조각양식의 변천
①7세기 후반
②8세기
③9세기 초
결론
본론
1.삼국시대의 불상
⑴초기의 불상조각
⑵고구려
⑶백제
⑷신라
2.통일신라시대의 불상
⑴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성립
⑵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여러형식
⑶통일신라시대 조각양식의 변천
①7세기 후반
②8세기
③9세기 초
결론
본문내용
표현 되었고 군의의 자락이 발등을 덮고 사실적인 주름이 나있다. 두 손은 모두 없어졌으나 팔의 위치로 보아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이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어서 약 항아리를 받들었던 듯하다. 뒤는 공동을 이루었고 광배를 달았던 꼭지가 아래 위에 있다. 지금 전신에 채색이 되어 있으나 원래는 도금을 하였던 듯 금색이 남아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고 있지만, 볼륨이나 탄력성은 이미 없어지고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 등 곳곳에서 형식화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8세기 중엽의 절정기 양식에서 벗어난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당(唐)요소는 이제 거의 없어지고 그런 점에서 완전 신라양식화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금동 약사 여래입상은 나발의 머리와 육계가 얼굴에 비해 너무 커서 오히려 기이한 감을 준다. 좁아진 얼굴에는 반개한 눈과 작은 코와 입이 분명히 표현 되었고 귀는 귓밥이 작아 뾰족하게 표현 되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하체에 비해 넓은 어깨의 통견의가 걸쳐 있다. 가슴에는 엄액의(掩腋衣)의 선이 비스듬히 보이고 그 밑에 세줄 융기선 반원 옷주름이 있고 밑으로 두 다리에는 크게 타원형 주름이 융기선으로 여러 단 표현 되었다. 어깨에 늘어진 옷자락은 밑에서 약간 외반 되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서 엄지와 장지를 맞대었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어서 약 항아리를 받치고 있다. 발은 가지런히 앞을 향하였고 발 밑에는 원형 복련(伏蓮) 대좌가 있는데 그 위에 한 줄과 밑에 세 줄의 연주문이 있다. 이 불상의 연대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나 양식적으로 8세기 양식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③9세기
9세기에 접어들면서 불상 조각은 뚜렷한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얼굴에 표현된 자비의 상징인 오묘한 미소도 사라지고 경직된 목석같은 표정이 많아지며 신체의 비례도 균형을 잃게 되어 생명감과 미감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강우방, 『한국 불교조각의 흐름』,대원사, 1995,5.p402
그리고 재료면 에서는 필시 동 부족에서 오는 철의 사용을 들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과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이다.
도피안사 비로자나여래은 불신대좌 모두 철제로서 보기 드문 불상의 일례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의 표현은 분명하지 않다. 얼굴은 기름한데 눈은 반개 하였고 코와 입은 작으나 입은 큰 편이다. 긴 목은 1조 선으로 삼도(三道)를 표현 하였고 법의는 통견인데 밀집된 평행선으로 나타낸 옷주름은 매우 형식적이다. 손은 가슴 앞에서 지권인을 결하고 있으나 몸에 비해 작다. 대좌는 팔각형인데 상단에는 단판앙련(單瓣仰蓮)이 이 중으로 있고 중단에는 팔각의 우주의 표시가 있으며 하단에는 큰 단판복련팔엽이 있는데 모두 귀꽃이 표현 되었다. 조각수법이 형식화 되었고 대좌의 연판 조각 수법도 힘이 빠져있음은 시대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은 광배와 대좌를 잃고 있으나 철불로서 대작이며 명문이 있는 점에서 주목되는 불상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도 크다. 얼굴은 기름한데 눈은 반개 하였고 작은 콧날에서 연장되는 눈썹은 깊은 단층으로 나타내어 매우 인상적이다. 입은 큰 편이며 귀도 커서 어깨에 닿았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법의는 통견인데 노출된 가슴에 군의의 일단이 표현 되어있다. 옷주름은 약간 사실성이 있기는 하나 형식적인 밀집 평행선이 주가 되고 있다. 무릎은 불신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지권인의 손은 반대로 지나치게 작아서 비례의 불균형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하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철불의 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불상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삼국의 불상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크게 보아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나 민족성과 풍토성에 의하여 각각 독특한 양식을 확립하여 하였다. 즉 고구려의 미술 양식은 힘차고 백제는 부드러우며 ,신라는 유머러스하다. 통일신라시대에서도 성당(盛唐)의 영향을 받는 한편 독창적 형식을 창안하고 인도지향적인 양식을 추구하였다. 예를 들어 8세기 중엽의 양식은 중국 천룡산 석굴의 것보다는 인도의 굽타 양식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유사성일 뿐이지 우리의 것이 생명력의 표현에 있어 훨씬 앞서 있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 미술을 표현할 때 첫째로 생명력, 둘째 자연성, 셋째 기술에 대한 무관심등으로 일관되어 왔다. 김원용, 『한국 고미술의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9.p11~16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력은 우리선조들이 가진 힘 이였다. 그것은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힘에서 보여 지는 선조들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자연성은 말 그대로 자연에의 순응이다. 인공적인 것은 회피하고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기술에 대한 무관심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한다. 삼국시대 전이나 삼국시대에 와서도 불상들은 섬세하고 정교하지 못하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조각이 가질 수 있는 멋을 찾아내기가 힘들다. 그러나 삼국시대때 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고 자체적으로 발전하면서 통일신라시대에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과연 선조들이 기술에 대해 무관심 했다면 그러한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또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다. 비록 삼국시대부터 당(唐)의 영향을 받으면서 불상의 모습은 중국화 경향이 되고 있지만 표정이라든가 그 정신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우리의 것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중국의 문화가 아니라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태어난 우리의 문화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 미술을 알아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문헌
강우방,『한국 불교 조각의 흐름』,서울대학교출판부,1995,7.p246~323 p375~417
김원용, 『한국 고미술의 이해』,서울대학교출판부,1980,9 p48~91
김이나, 『한국고대 불교 조각사 연구』일호각, 1989 p36~40
문명대, 『한국 조각사』 열화당, 1980 p91~104
진홍섭,『한국의 불상』,1976,4.p231~287
최완수, 『불상연구』, 지식산업사, 1984.
금동 약사 여래입상은 나발의 머리와 육계가 얼굴에 비해 너무 커서 오히려 기이한 감을 준다. 좁아진 얼굴에는 반개한 눈과 작은 코와 입이 분명히 표현 되었고 귀는 귓밥이 작아 뾰족하게 표현 되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하체에 비해 넓은 어깨의 통견의가 걸쳐 있다. 가슴에는 엄액의(掩腋衣)의 선이 비스듬히 보이고 그 밑에 세줄 융기선 반원 옷주름이 있고 밑으로 두 다리에는 크게 타원형 주름이 융기선으로 여러 단 표현 되었다. 어깨에 늘어진 옷자락은 밑에서 약간 외반 되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서 엄지와 장지를 맞대었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어서 약 항아리를 받치고 있다. 발은 가지런히 앞을 향하였고 발 밑에는 원형 복련(伏蓮) 대좌가 있는데 그 위에 한 줄과 밑에 세 줄의 연주문이 있다. 이 불상의 연대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나 양식적으로 8세기 양식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③9세기
9세기에 접어들면서 불상 조각은 뚜렷한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얼굴에 표현된 자비의 상징인 오묘한 미소도 사라지고 경직된 목석같은 표정이 많아지며 신체의 비례도 균형을 잃게 되어 생명감과 미감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강우방, 『한국 불교조각의 흐름』,대원사, 1995,5.p402
그리고 재료면 에서는 필시 동 부족에서 오는 철의 사용을 들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과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이다.
도피안사 비로자나여래은 불신대좌 모두 철제로서 보기 드문 불상의 일례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의 표현은 분명하지 않다. 얼굴은 기름한데 눈은 반개 하였고 코와 입은 작으나 입은 큰 편이다. 긴 목은 1조 선으로 삼도(三道)를 표현 하였고 법의는 통견인데 밀집된 평행선으로 나타낸 옷주름은 매우 형식적이다. 손은 가슴 앞에서 지권인을 결하고 있으나 몸에 비해 작다. 대좌는 팔각형인데 상단에는 단판앙련(單瓣仰蓮)이 이 중으로 있고 중단에는 팔각의 우주의 표시가 있으며 하단에는 큰 단판복련팔엽이 있는데 모두 귀꽃이 표현 되었다. 조각수법이 형식화 되었고 대좌의 연판 조각 수법도 힘이 빠져있음은 시대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은 광배와 대좌를 잃고 있으나 철불로서 대작이며 명문이 있는 점에서 주목되는 불상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도 크다. 얼굴은 기름한데 눈은 반개 하였고 작은 콧날에서 연장되는 눈썹은 깊은 단층으로 나타내어 매우 인상적이다. 입은 큰 편이며 귀도 커서 어깨에 닿았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법의는 통견인데 노출된 가슴에 군의의 일단이 표현 되어있다. 옷주름은 약간 사실성이 있기는 하나 형식적인 밀집 평행선이 주가 되고 있다. 무릎은 불신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지권인의 손은 반대로 지나치게 작아서 비례의 불균형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하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철불의 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불상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삼국의 불상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크게 보아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나 민족성과 풍토성에 의하여 각각 독특한 양식을 확립하여 하였다. 즉 고구려의 미술 양식은 힘차고 백제는 부드러우며 ,신라는 유머러스하다. 통일신라시대에서도 성당(盛唐)의 영향을 받는 한편 독창적 형식을 창안하고 인도지향적인 양식을 추구하였다. 예를 들어 8세기 중엽의 양식은 중국 천룡산 석굴의 것보다는 인도의 굽타 양식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유사성일 뿐이지 우리의 것이 생명력의 표현에 있어 훨씬 앞서 있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 미술을 표현할 때 첫째로 생명력, 둘째 자연성, 셋째 기술에 대한 무관심등으로 일관되어 왔다. 김원용, 『한국 고미술의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9.p11~16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력은 우리선조들이 가진 힘 이였다. 그것은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힘에서 보여 지는 선조들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자연성은 말 그대로 자연에의 순응이다. 인공적인 것은 회피하고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기술에 대한 무관심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한다. 삼국시대 전이나 삼국시대에 와서도 불상들은 섬세하고 정교하지 못하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조각이 가질 수 있는 멋을 찾아내기가 힘들다. 그러나 삼국시대때 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고 자체적으로 발전하면서 통일신라시대에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과연 선조들이 기술에 대해 무관심 했다면 그러한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또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다. 비록 삼국시대부터 당(唐)의 영향을 받으면서 불상의 모습은 중국화 경향이 되고 있지만 표정이라든가 그 정신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우리의 것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중국의 문화가 아니라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태어난 우리의 문화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 미술을 알아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문헌
강우방,『한국 불교 조각의 흐름』,서울대학교출판부,1995,7.p246~323 p375~417
김원용, 『한국 고미술의 이해』,서울대학교출판부,1980,9 p48~91
김이나, 『한국고대 불교 조각사 연구』일호각, 1989 p36~40
문명대, 『한국 조각사』 열화당, 1980 p91~104
진홍섭,『한국의 불상』,1976,4.p231~287
최완수, 『불상연구』, 지식산업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