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고구려의 기원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성립
(1) 나집단의 성장
(2) 나부체제의 성립
2) 발전
(1) 국가체제의 정비
(2) 영역의 확대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성립
(1) 나집단의 성장
(2) 나부체제의 성립
2) 발전
(1) 국가체제의 정비
(2) 영역의 확대
본문내용
와 4개의 나부는 고구려 국가를 성립시킨 주체로서 이 지역 전체에 통치력을 행사하는 두 축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초기의 국가체제는 나부를 매개로 통치력을 실현하였다는 점에서 ‘那部統合體制’, 사회가 전반적으로 나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의미에서 ‘那部體制社會’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성립시기는 관점에 따라 주몽집단의 등장이나 나부체제의 성립뿐 아니라 현도군의 퇴축과 나국연맹체의 형성, 예군남려집단이나 句驪의 등장, 나집단의 성장 등 여러 시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곧 고구려는 전체적으로 볼 때 독자적 주민집단 형성 이후 연속적인 역사과정을 밟아왔으므로 계루부왕실 등장 이전도 고구려의 역사로 포괄할 수 있다.
2) 발전
(1) 국가체제의 정비
나부는 원래 독자적인 단위정치체였기 때문에 다양한 세력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부의 개별 독립세력 내부에는 나집단이나 나집단으로 성장하지 못한 지역집단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부는 나집단으로 성장하지 못한 개별지역집단, 나집단, 나국, 다른 나국을 복속시킨 중심 나국 등 여러 세력집단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일원적인 편제기준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封王封主賜城 등의 방법으로 각 세력집단을 편제하였다. 봉왕과 봉주가 비류국 송양집단이나 부여왕 종제집단과 같이 독자적인 운동력을 지닌 단위정치체를 복속편제하는 방법이었던 반면, 사성은 다양한 집단에게 주어졌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3세기 전반경의 관명으로 相加(상가)對盧(대로)沛者(패자)古鄒加(고추가)主簿(주부)優台(우태)丞(승)使者(사자)衣(조의)先人(선인) 등이 나온다. 이 중 상가는 최고 관직인 國相으로 비정되고, 고추가는 계루부의 대가를 비롯하여 소노부의 適統大人(적통대인)과 절노부의 대인에게 수여된 封爵的(봉작적)인 것이었고, 대로는 패자와 교치되었으므로 초기 관계는 대로=패자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 등 7등급으로 파악된다. 실제 패자(대)주부우태(대)사자조의 등은 《삼국사기》에 官階名(관계명)으로 나온다. 패자는 좌우부나 국상 등 최고위직에 취임한 최고의 관계로 왕명을 받아 나부의 군사력을 거느리고 대외전쟁에 출전하기도 하였따. 우태는 패자보다 한 단계 낮은 관계로 독자적인 군사력이나 운동력을 거의 상실한 나국세력에게 수여되었다. (대)주부는 패자와 동격의 관계로서 왕과 함께 외국의 詔書를 받고, 왕의 입장에서 대가의 군사활동을 통제하는 등 왕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각 대가는 사자조의선인을 설치하였는데, 이들은 각 지역의 중심적인 단위정치체가 나부로 편제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관계로 나부의 자치권을 뒷받침하였다. 계루부왕권은 나부세력에게 관계를 수여하여 일원적으로 편제함으로써 이들을 매개로 통치력을 관철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 나부세력은 관계를 수여받아 자신의 세력기반을 인정받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국가 중대사는 계루부왕권과 나부세력들의 협의기관인 諸家評議會(제가평의회)에서 결정되었다. 대외전쟁은 계루부왕권이 나부의 군사력을 동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복속민에
고구려의 성립시기는 관점에 따라 주몽집단의 등장이나 나부체제의 성립뿐 아니라 현도군의 퇴축과 나국연맹체의 형성, 예군남려집단이나 句驪의 등장, 나집단의 성장 등 여러 시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곧 고구려는 전체적으로 볼 때 독자적 주민집단 형성 이후 연속적인 역사과정을 밟아왔으므로 계루부왕실 등장 이전도 고구려의 역사로 포괄할 수 있다.
2) 발전
(1) 국가체제의 정비
나부는 원래 독자적인 단위정치체였기 때문에 다양한 세력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부의 개별 독립세력 내부에는 나집단이나 나집단으로 성장하지 못한 지역집단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부는 나집단으로 성장하지 못한 개별지역집단, 나집단, 나국, 다른 나국을 복속시킨 중심 나국 등 여러 세력집단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일원적인 편제기준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封王封主賜城 등의 방법으로 각 세력집단을 편제하였다. 봉왕과 봉주가 비류국 송양집단이나 부여왕 종제집단과 같이 독자적인 운동력을 지닌 단위정치체를 복속편제하는 방법이었던 반면, 사성은 다양한 집단에게 주어졌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3세기 전반경의 관명으로 相加(상가)對盧(대로)沛者(패자)古鄒加(고추가)主簿(주부)優台(우태)丞(승)使者(사자)衣(조의)先人(선인) 등이 나온다. 이 중 상가는 최고 관직인 國相으로 비정되고, 고추가는 계루부의 대가를 비롯하여 소노부의 適統大人(적통대인)과 절노부의 대인에게 수여된 封爵的(봉작적)인 것이었고, 대로는 패자와 교치되었으므로 초기 관계는 대로=패자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 등 7등급으로 파악된다. 실제 패자(대)주부우태(대)사자조의 등은 《삼국사기》에 官階名(관계명)으로 나온다. 패자는 좌우부나 국상 등 최고위직에 취임한 최고의 관계로 왕명을 받아 나부의 군사력을 거느리고 대외전쟁에 출전하기도 하였따. 우태는 패자보다 한 단계 낮은 관계로 독자적인 군사력이나 운동력을 거의 상실한 나국세력에게 수여되었다. (대)주부는 패자와 동격의 관계로서 왕과 함께 외국의 詔書를 받고, 왕의 입장에서 대가의 군사활동을 통제하는 등 왕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각 대가는 사자조의선인을 설치하였는데, 이들은 각 지역의 중심적인 단위정치체가 나부로 편제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관계로 나부의 자치권을 뒷받침하였다. 계루부왕권은 나부세력에게 관계를 수여하여 일원적으로 편제함으로써 이들을 매개로 통치력을 관철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 나부세력은 관계를 수여받아 자신의 세력기반을 인정받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국가 중대사는 계루부왕권과 나부세력들의 협의기관인 諸家評議會(제가평의회)에서 결정되었다. 대외전쟁은 계루부왕권이 나부의 군사력을 동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복속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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