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광개토왕비의 재발견
1. 능비의 재발견
2. 비문의 내용
Ⅲ. 비문 변조설
1. 이진희의 비문 조작설
2. 중국에서 바라보는 광개토왕비
3. 4c 말 왜의 신라공격
Ⅳ. 비문 연구
1. 비문연구의 진전
2. 비문연구의 현단계
3. 비문연구의 문제점
Ⅴ. 결론
Ⅱ. 광개토왕비의 재발견
1. 능비의 재발견
2. 비문의 내용
Ⅲ. 비문 변조설
1. 이진희의 비문 조작설
2. 중국에서 바라보는 광개토왕비
3. 4c 말 왜의 신라공격
Ⅳ. 비문 연구
1. 비문연구의 진전
2. 비문연구의 현단계
3. 비문연구의 문제점
Ⅴ. 결론
본문내용
추모왕으로부터 연면히 이어지는 신성한 王統의 계승자임을 상기시키면서 주인공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의해서 성취된 고구려 당대의 영광과 평화를 과시하고 있으며, 끝으로는 왕릉의 묘지기에 대한 규정을 선포함으로 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탄탄하게 보장받으려는 강한 의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Ⅲ. 비문 변조설
1. 이진희의 비문 조작설
1972년 10월, 일본 동경에서는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의 『광개토대왕비의 연구(廣開土大王碑の硏究)』라는 책은 놀라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재 만주의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19대 임금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好太王 : 일명 호태왕), 즉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의도적으로 변조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었는데,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한국의 언론들은 연일 책의 내용을 대서특필하였고, 두 나라 사이의 현안으로까지 대두되었다.
이후 한국에서는 연일 이 책을 둘러싼 논쟁과 각종 발표회가 열리고 관련 논문과 서적이 쏟아져 나오고, 일본군 참모본부가 비문을 조작했다는 이 책의 내용은 평소 반일감정으로 무장된 한국인들의 감정에 불을 지폈고 대부분의 학자들도 대체로 비문조작설에 동조해 일파만파의 파문을 일으켰다. 이 책은 조작설의 당사국인 일본학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일부 일본인 학자는 이진희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비문조작설을 일본 근대역사학의 왜곡된 체질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즉 일본의 근대역사학이 군국주의 침략을 뒷받침하는 도구가 된 것이 아니냐는 반성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일본 연구자들은 비문조작설을 무시하면서 심지어 ‘공중에 지은 누각’이라고까지 비판했는데, 그들의 논리는 일개 위관급 포병 장교에 불과한 사카와 대위가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현장에서 비문을 조작할 만한 지식이 없으며, 더구나 일본군참모본부에 의한 은폐작전이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럼 두 나라 역사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진희의 『광개토대왕비의 연구』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이진희의 주장은 대략 이렇다. 19세기 말 일본군 참모본부는 1880년에 사카와를 간첩으로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배운 후 한의(漢醫)로 가장해 일본군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만주 일대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사카와가 1883년에 우연히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사카와는 이 비문이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이용가치가 큰 것을 알고 현지인을 시켜 탁본을 뜨게 했는데, 이것이 쌍구본이다. 사카와가 쌍구본을 일본에 가져온 시기는 1884년 2월 이전인데 쌍구본을 작성하면서 이미 비문의 일부 내용이 변조되었다는 것이다. 쌍구본을 분석한 일본군 참모본부는 이 비문의 내용 일부를 조작하면 한반도 침략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데 착안하여 많은 인원을 동원해서 비문에 대한 해독 작업을 실시했다. 이 작업을 마친 후 참모본부는 탁본을 천황에게 바쳤고, 그 결과를 1888년에 국수주의 단체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5권에 발표했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1894년경에 다시 간첩을 통구에 보내 비문을 탁보했는데, 이 탁본의 상당 부분이 사카와의 쌍구본과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한 일본군 참모본부는 1900년을 전후해서 다시 사람을 보내 비문에 석회를 발라 필요한 글자의 자형을 만든 후 탁본을 떴다. 참모본부는 변조한 비문의 내용을 일본이 일찍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증거로 삼으려 했는데 이런 의도에 완전히 맞추기 위해 다시 사람을 보내 3차로 변조했다. 이렇게 변조된 부분이 문제의 신묘년조 기사의 ‘來渡海’ 글자 등 16곳, 25자에 달한다는 것이다.
일본군 참모본부가 한반도 침략의 명분으로 삼기 위해 광개토대왕 비문을 조작했다는 이 내용은 그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주장만으로도 두 나라에 상당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2. 중국에서 바라보는 광개토왕비
비문조작설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나라는 중국이었는데 이진희의 책이 나온 8년 후인 1984년에 중국학자 왕건궁이 1972년, 1979년, 그리고 1981년 세 차례에 걸쳐, 직접 광개토대왕비를 조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를 출간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군 참모본부의 의도적인 비문조작설은 부인하면서 비문의 석회는 참모본부의 소행이 아니라, 이 비문의 탁본을 판매했던 현지인이 비문을 좀더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바른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왕건군의 『호태왕비연구』의 요지는 이렇다. 청나라 정부는 1876년에 회인현을 설
Ⅲ. 비문 변조설
1. 이진희의 비문 조작설
1972년 10월, 일본 동경에서는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의 『광개토대왕비의 연구(廣開土大王碑の硏究)』라는 책은 놀라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재 만주의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19대 임금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好太王 : 일명 호태왕), 즉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의도적으로 변조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었는데,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한국의 언론들은 연일 책의 내용을 대서특필하였고, 두 나라 사이의 현안으로까지 대두되었다.
이후 한국에서는 연일 이 책을 둘러싼 논쟁과 각종 발표회가 열리고 관련 논문과 서적이 쏟아져 나오고, 일본군 참모본부가 비문을 조작했다는 이 책의 내용은 평소 반일감정으로 무장된 한국인들의 감정에 불을 지폈고 대부분의 학자들도 대체로 비문조작설에 동조해 일파만파의 파문을 일으켰다. 이 책은 조작설의 당사국인 일본학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일부 일본인 학자는 이진희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비문조작설을 일본 근대역사학의 왜곡된 체질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즉 일본의 근대역사학이 군국주의 침략을 뒷받침하는 도구가 된 것이 아니냐는 반성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일본 연구자들은 비문조작설을 무시하면서 심지어 ‘공중에 지은 누각’이라고까지 비판했는데, 그들의 논리는 일개 위관급 포병 장교에 불과한 사카와 대위가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현장에서 비문을 조작할 만한 지식이 없으며, 더구나 일본군참모본부에 의한 은폐작전이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럼 두 나라 역사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진희의 『광개토대왕비의 연구』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이진희의 주장은 대략 이렇다. 19세기 말 일본군 참모본부는 1880년에 사카와를 간첩으로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배운 후 한의(漢醫)로 가장해 일본군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만주 일대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사카와가 1883년에 우연히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사카와는 이 비문이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이용가치가 큰 것을 알고 현지인을 시켜 탁본을 뜨게 했는데, 이것이 쌍구본이다. 사카와가 쌍구본을 일본에 가져온 시기는 1884년 2월 이전인데 쌍구본을 작성하면서 이미 비문의 일부 내용이 변조되었다는 것이다. 쌍구본을 분석한 일본군 참모본부는 이 비문의 내용 일부를 조작하면 한반도 침략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데 착안하여 많은 인원을 동원해서 비문에 대한 해독 작업을 실시했다. 이 작업을 마친 후 참모본부는 탁본을 천황에게 바쳤고, 그 결과를 1888년에 국수주의 단체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5권에 발표했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1894년경에 다시 간첩을 통구에 보내 비문을 탁보했는데, 이 탁본의 상당 부분이 사카와의 쌍구본과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한 일본군 참모본부는 1900년을 전후해서 다시 사람을 보내 비문에 석회를 발라 필요한 글자의 자형을 만든 후 탁본을 떴다. 참모본부는 변조한 비문의 내용을 일본이 일찍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증거로 삼으려 했는데 이런 의도에 완전히 맞추기 위해 다시 사람을 보내 3차로 변조했다. 이렇게 변조된 부분이 문제의 신묘년조 기사의 ‘來渡海’ 글자 등 16곳, 25자에 달한다는 것이다.
일본군 참모본부가 한반도 침략의 명분으로 삼기 위해 광개토대왕 비문을 조작했다는 이 내용은 그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주장만으로도 두 나라에 상당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2. 중국에서 바라보는 광개토왕비
비문조작설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나라는 중국이었는데 이진희의 책이 나온 8년 후인 1984년에 중국학자 왕건궁이 1972년, 1979년, 그리고 1981년 세 차례에 걸쳐, 직접 광개토대왕비를 조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를 출간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군 참모본부의 의도적인 비문조작설은 부인하면서 비문의 석회는 참모본부의 소행이 아니라, 이 비문의 탁본을 판매했던 현지인이 비문을 좀더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바른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왕건군의 『호태왕비연구』의 요지는 이렇다. 청나라 정부는 1876년에 회인현을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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