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 박사 개혁신앙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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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형룡 박사 개혁신앙과 교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국의 개혁주의 안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체로 한결같이 미국 개혁주의 신학 전통의 세 형태의 변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한 표현일 것이다.
메이천의 초기 신학과 사상
“교회는 지금 혼돈 속에서 있으며,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도저히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곳에서 평화, 평화를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급격히 그 힘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선택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하나님이여,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하나님이여, 성경에 따라 판단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이것은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로 임명된 뒤 근 10년간의 학문적 풍토를 자세히 살펴온 깨어있는 학자의 경고였다. 그러나 교회 내 거의 아무도 이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교회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성경에 관한 적합한 역사적 연구와 초자연적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설명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메이천은 이미 이른 시기부터 교회의 일치와 순결을 지키고자 하는 관심과 성경에 관한 역사적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깊은 확신을 발전시켜 왔으며, 또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메이천이 교회 내 일치와 순결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할 때마다, 그것은 단순히 장로교회 표준에 대한 그의 열정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들기 위한 그의 관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메이천 뿐만 아니라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메이천 장로교 논쟁에 심각하게 말려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성경의 신실함과 명료함에 대한 강한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전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칼빈이나, 아치볼드 알렉산더, 찰스 하지, 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 벤자민 워필드, 게할더스 보스등과 같은 자신의 믿음의 선배들의 관점을 반영한 것 일뿐이다.
그의 관점은 신실한 개혁주의와 장로교 신학자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론을 포함한 그의 신학적 시각은 주로 프린스톤 신학의 직, 간접적인 영향 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프린스톤 신학은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정통 칼빈주의에 확고히 뿌리박고 있다.
ll. 메이천의 초지 작품에 대한 고찰
역사와 신앙의 관계를 다루면서 메이천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날카롭게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바로 한 가운데 있다 예수님에 관한 기사에 있어 그러할 뿐 아니라, 성경은 그 자체의 본질적 주장을 확증하여 주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 기초를 파헤치게 되면 교회는 무너지게 될 것 이다. 무너질 뿐 아니라 그 무너짐 또한 매우 심각할 것이다.”51) 그는 이어 “기독교의 두 가지 개념”이 교회 내에서 항상 상호 갈등을 일 으켜 왔다고 말한다.
메이천은 이미 그의 활동을 초기에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정당한 것일뿐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신약과 거기에 기록된 사건들이 부분적으로는 그 당시의 역사적 환경이라는 제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그러한 역사적 환경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 결과 메이천은 역사주의의 본질적 교의들은 거부하였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는 기독교 해석과 자신의 교회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당시의 주류적인 흐름에 대해서도 상반된 입장을 취하게 된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자,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서 성경이 가진 신뢰성에 대한 메이천의 확신은 그가 자란 미국 남부 배경으로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독일에서 머무는 동안 일시적으로 자신의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으나, 메이천은 1906년 프린스톤의 교수로 임명된 뒤 성경과 당대의 학문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 그는 자신이 가졌던 최초의 확신을 재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의 관점은 1915년에 이르러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다.
메이천의 후기 신학과 사상
메이천이 새 선교부를 설립하기로 한 결정은 소위 자유주의 및 중 도파 진영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진영에서조차도 메이천의 후기 신학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다.
본 논문은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 설립과 관련하여 당 시 메이천의 교회론적 관심을 우선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바라기로 는 본 연구로 말미암아 메이천 박사의 후기 신학사상에 대한 논쟁 의 배경을 역사적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계기가 되기‘ 기대 해 본다.
메이천의 후기 신학과 사상에서는 총회가 채택한 여러 선언문들을 한결같이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의 설립이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헌법에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이 어느 기관을 통하여 기독교 사역에 대한 기부를 행사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는 장로교회 헌법에 의해 모든 교인에게 보장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원리이다. 더욱이 이 권리는 교회가 교회 안에 있는 복음의 대적자들에 대해 싸우기를 거절하고,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표준문서들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에는 더욱 명확해진다고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헌법에 명시된 정치 제 20장 2항; 제21장 2항과 3항은 이를 지적하고 있다. 실로, 장로교회의 법은 교회의 기관과 대행기관에 의해 통제되는 기구들 외에 다른 기구들에 기독교적 자선을 위한 기부금을 교인들이 내는 것을 명백하게 허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합중국 장로교회 헌법에 명시된 예배모범 제6장3항과 4항이 이에 속한다.
메이천을 중심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과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의 설립, 그리고 정통장로교회의 시작은 종교적인 자유주의에 대해 메이천이 반대한 논리적인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주의자들이 1920년대를 지나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로교회 안에서 중도파의 도움으로 다수를 점령하게 되자, 보수주의 목소리를탄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복음을 사수하기 위한 행동의 자유를 추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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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6.03.11
  • 저작시기2006.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9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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