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본론
1.기녀는 누구인가
2.화려하지만은 않았던 삶 - 서글픈 노류장화
3.조선시대 종합 엔터테이너
1)지방색에 따른 특기
2)기녀시조
3)기녀시조의 특징
4.사회적 관점에서 본 기녀
1)신분적 특권
2)사회적 효용
3)사회적 영향
Ⅲ. 결론
Ⅱ.본론
1.기녀는 누구인가
2.화려하지만은 않았던 삶 - 서글픈 노류장화
3.조선시대 종합 엔터테이너
1)지방색에 따른 특기
2)기녀시조
3)기녀시조의 특징
4.사회적 관점에서 본 기녀
1)신분적 특권
2)사회적 효용
3)사회적 영향
Ⅲ. 결론
본문내용
다. 그러기 위해서 기녀들 삶의 고달픈 면을 드추어 볼 것이고, 특출난 재능을 드러내보일 것이며,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녀가 어떤 위치에 있었고 어떠한 영행을 미쳤는가를 볼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녀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기족의 편협한 인식이 실상과는 차이가 있음을 살펴보겠다.
Ⅱ. 본론
1. 기녀는 누구인가
기녀란 어휘는 원래 가무와 기예 등을 배워 익혀서 나라에서 필요할 때 봉사하던 여성을 일컫던 말이다. 즉, 어떤 특별한 기능을 가직 여성이라 하여, 기녀 또는 기생이라는 용어가 생겼던 것이다. 여기서 기생이란 용어는 기녀와 유사한 단어로 쓰이나 기녀보다는 유흥의 의미가 좀 더 강하다 그 밖에 조선시대 기녀들은 ‘헤어화’라는 병칭을 가지고 있었다. 즉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고위 관료를 상대함에 있어 어느 정도의 학문적 소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녀라는 용어는 속히 ‘노는 계집’으로 창녀, 창기와 같이 성을 매매하던 여성을 일컬으며 이들은 기예적·기술적 측면의 역할을 했던 기녀와는 구분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이러한 유녀·창녀·창기들이 스스로 기녀로 칭하거나 기녀들이 차츰 유녀와 같은 매춘을 하면서 기녀란 호칭의 구분이 불명확하게 되었다. 본 발표문에서는 본래 기녀의 역할과 기능을 염두에 두고 호칭을 기녀로 통일하기로 하겠다.
2. 화려하지만은 않았던 삶 - 서글픈 노류장화
일반적으로 기녀를 설명하는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화려한 오색한복에 예쁘게 화장을 하고 머리와 몸에 온갖 장신구로 치장을 한 모습, 양반들과 야외로 나들이를 가거나 놀이를 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녀들이 그 당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온갖 부와 사치를 누리며 여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녀를 부르는 별명인 ‘헤어화’에서 알 수 있듯이 꽃처럼 아름답고 선녀처럼 고운 그들이었지만 삶까지 아름답고 호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시와 음률에 뛰어나 당대의 명사들과 사귀면서 상류사화를 주름잡았던 명기들이 역사책에도 등장하지만, 신분이 천인이었으니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장악원에 소속되어 악적에 이름이 올라있는 경기의 주임무는 궁중의 큰 잔치에 가무로 흥을 돋우는 것이었다. 이들은 왕이 사냥이나 온천 행차 등으로 밖에 나갔다가 환궁할 때에 어가행렬 앞에서 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으며, 외국사신을 영접할 때에도 빠짐없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런 큰 행사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고, 국가에서 지급하는 사미의 양은 극히 적어 기녀의 생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이렇듯 국가에서 보조받는 쌀로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기녀들은 다른 경제적 수단을 찾아야 했다. 기녀의 생활은 다른 여염 여인의 생활보다 사치스러울 수 밖에 없고 또한 공석에 나아가 주악할 때 의복이 추하고 남루하면 득죄하여 장을 맞기도 하니 이를 면하기 위해서는 다른 수입원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평상시에는 양반들의 연회에 불려나가 춤과 노래로 봉사한 대가로 전두를 받고, 잠자리까지 함께하면 옷 벗기는 값이라는 뜻의 ‘해웃값’을 받아 살아갔다. 그러나 요즘 유흥업소에 있는 여성들이 그렇듯이 수입은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고, 일정하지도 않았으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어렵게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정 때 ‘용재총화’에서도 세상 풍속이 예전 같지 않게 야박해져서 치사한 양반들이 축하면 창기들을 불러들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부려먹고도 연폐를 주지 않아서, 해진 옷을 입고 다니는 창기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당시에 여러 양반의 총애를 받았던 기녀 연경비도 창덕궁 노인잔치에 불려왔을 때에도 의복이 남루하여 공혜왕후 한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기부를 두어 경제적 원조를 얻게 되며, 국가에서도 기녀의 생활을 위해 비공식적으로 기부를 인정하였는데, ‘세종실록 48권 11년 11월 13일’ 기록을 살펴보면 정식으로는 夫라 칭하고 있어, 비공식적 인정이면서도 공공연히 기부가 인정되었음을 확실히 알수 있게 해준다.
기부는 기녀의 경제적 담당을 위해 인정된 것인 만큼 기녀의 의복에 책임이 있었다. 또한 기녀의 연회 불참에도 책임을 물어 기녀와 같이 득죄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녀들은 양반관료의 첩이 되어 일시적으로 호사를 누리더라도 남자의 애정이 시들해지거나 남편이 죽으면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결국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은 지방 관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또를 유혹하여 고을의 대소사를 쥐었던 관기도 나이가 들어 몸매가 망가지고 미색이 바래지고 나면, 물 긷는 수급비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기생은 나이가 들면 세 가지가 없어지고 한 가지가 남는다고 하였으니, 재산과 미색과 명성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달콤한 말재간뿐이라는 것이다. 노류장화라는 말 그대로 기녀는 길거리의 버들이나 담 밑에 핀 꽃처럼, 지나가는 뭇 남정네 손에 꺾어지기 쉬운 연약한 꽃이었고, 시들면 버려지는 서글픈 존재였다.
3. 조선시대 종합 엔터테이너
1) 지방색에 따른 특기
앞서 말했듯이 기녀는 의약이나 침선의 기술, 또는 가무의 기예를 배워 익혀서 나라에서 필요한 때에 봉사하던 여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였다. 즉, 어떤 특별한 기술을 가진 여성인 것이다. 이런 전문직의 여성들은 대체로 젊고 미모였으며, 또한 남녀의 상면을 금하는 유교적 질서 속에서 남성들의 접근이 허용될 수 있는 천인계층에 속하였으므로 자연히 남성들의 잔치에서 흥을 돋우고 남성들을 위한 구실을 겸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녀들은 국왕을 비롯하여 왕족·관원·학자·문인들의 연회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서는 이들의 관심을 끌만한 특기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기녀들은 자기들의 소질에 맞는 기술을 찾아 꾸준히 살려나갔다. 그리하여, 시가나 서주에 능하거나, 악기나 가무에 능하거나, 또는 재치 있는 말씨나 유머를 잘하여 명성을 남겼다. 특히 미모에 여러 가지 특기를 겸비한 기녀는 명기로서 일세에 그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또한 지방에 따라 기녀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특기가 있다.
첫째, 경상도 안동의 기녀들은 휴학경전의 하나인 ‘대학’을 곧잘
Ⅱ. 본론
1. 기녀는 누구인가
기녀란 어휘는 원래 가무와 기예 등을 배워 익혀서 나라에서 필요할 때 봉사하던 여성을 일컫던 말이다. 즉, 어떤 특별한 기능을 가직 여성이라 하여, 기녀 또는 기생이라는 용어가 생겼던 것이다. 여기서 기생이란 용어는 기녀와 유사한 단어로 쓰이나 기녀보다는 유흥의 의미가 좀 더 강하다 그 밖에 조선시대 기녀들은 ‘헤어화’라는 병칭을 가지고 있었다. 즉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고위 관료를 상대함에 있어 어느 정도의 학문적 소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녀라는 용어는 속히 ‘노는 계집’으로 창녀, 창기와 같이 성을 매매하던 여성을 일컬으며 이들은 기예적·기술적 측면의 역할을 했던 기녀와는 구분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이러한 유녀·창녀·창기들이 스스로 기녀로 칭하거나 기녀들이 차츰 유녀와 같은 매춘을 하면서 기녀란 호칭의 구분이 불명확하게 되었다. 본 발표문에서는 본래 기녀의 역할과 기능을 염두에 두고 호칭을 기녀로 통일하기로 하겠다.
2. 화려하지만은 않았던 삶 - 서글픈 노류장화
일반적으로 기녀를 설명하는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화려한 오색한복에 예쁘게 화장을 하고 머리와 몸에 온갖 장신구로 치장을 한 모습, 양반들과 야외로 나들이를 가거나 놀이를 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녀들이 그 당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온갖 부와 사치를 누리며 여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녀를 부르는 별명인 ‘헤어화’에서 알 수 있듯이 꽃처럼 아름답고 선녀처럼 고운 그들이었지만 삶까지 아름답고 호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시와 음률에 뛰어나 당대의 명사들과 사귀면서 상류사화를 주름잡았던 명기들이 역사책에도 등장하지만, 신분이 천인이었으니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장악원에 소속되어 악적에 이름이 올라있는 경기의 주임무는 궁중의 큰 잔치에 가무로 흥을 돋우는 것이었다. 이들은 왕이 사냥이나 온천 행차 등으로 밖에 나갔다가 환궁할 때에 어가행렬 앞에서 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으며, 외국사신을 영접할 때에도 빠짐없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런 큰 행사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고, 국가에서 지급하는 사미의 양은 극히 적어 기녀의 생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이렇듯 국가에서 보조받는 쌀로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기녀들은 다른 경제적 수단을 찾아야 했다. 기녀의 생활은 다른 여염 여인의 생활보다 사치스러울 수 밖에 없고 또한 공석에 나아가 주악할 때 의복이 추하고 남루하면 득죄하여 장을 맞기도 하니 이를 면하기 위해서는 다른 수입원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평상시에는 양반들의 연회에 불려나가 춤과 노래로 봉사한 대가로 전두를 받고, 잠자리까지 함께하면 옷 벗기는 값이라는 뜻의 ‘해웃값’을 받아 살아갔다. 그러나 요즘 유흥업소에 있는 여성들이 그렇듯이 수입은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고, 일정하지도 않았으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어렵게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정 때 ‘용재총화’에서도 세상 풍속이 예전 같지 않게 야박해져서 치사한 양반들이 축하면 창기들을 불러들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부려먹고도 연폐를 주지 않아서, 해진 옷을 입고 다니는 창기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당시에 여러 양반의 총애를 받았던 기녀 연경비도 창덕궁 노인잔치에 불려왔을 때에도 의복이 남루하여 공혜왕후 한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기부를 두어 경제적 원조를 얻게 되며, 국가에서도 기녀의 생활을 위해 비공식적으로 기부를 인정하였는데, ‘세종실록 48권 11년 11월 13일’ 기록을 살펴보면 정식으로는 夫라 칭하고 있어, 비공식적 인정이면서도 공공연히 기부가 인정되었음을 확실히 알수 있게 해준다.
기부는 기녀의 경제적 담당을 위해 인정된 것인 만큼 기녀의 의복에 책임이 있었다. 또한 기녀의 연회 불참에도 책임을 물어 기녀와 같이 득죄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녀들은 양반관료의 첩이 되어 일시적으로 호사를 누리더라도 남자의 애정이 시들해지거나 남편이 죽으면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결국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은 지방 관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또를 유혹하여 고을의 대소사를 쥐었던 관기도 나이가 들어 몸매가 망가지고 미색이 바래지고 나면, 물 긷는 수급비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기생은 나이가 들면 세 가지가 없어지고 한 가지가 남는다고 하였으니, 재산과 미색과 명성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달콤한 말재간뿐이라는 것이다. 노류장화라는 말 그대로 기녀는 길거리의 버들이나 담 밑에 핀 꽃처럼, 지나가는 뭇 남정네 손에 꺾어지기 쉬운 연약한 꽃이었고, 시들면 버려지는 서글픈 존재였다.
3. 조선시대 종합 엔터테이너
1) 지방색에 따른 특기
앞서 말했듯이 기녀는 의약이나 침선의 기술, 또는 가무의 기예를 배워 익혀서 나라에서 필요한 때에 봉사하던 여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였다. 즉, 어떤 특별한 기술을 가진 여성인 것이다. 이런 전문직의 여성들은 대체로 젊고 미모였으며, 또한 남녀의 상면을 금하는 유교적 질서 속에서 남성들의 접근이 허용될 수 있는 천인계층에 속하였으므로 자연히 남성들의 잔치에서 흥을 돋우고 남성들을 위한 구실을 겸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녀들은 국왕을 비롯하여 왕족·관원·학자·문인들의 연회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서는 이들의 관심을 끌만한 특기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기녀들은 자기들의 소질에 맞는 기술을 찾아 꾸준히 살려나갔다. 그리하여, 시가나 서주에 능하거나, 악기나 가무에 능하거나, 또는 재치 있는 말씨나 유머를 잘하여 명성을 남겼다. 특히 미모에 여러 가지 특기를 겸비한 기녀는 명기로서 일세에 그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또한 지방에 따라 기녀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특기가 있다.
첫째, 경상도 안동의 기녀들은 휴학경전의 하나인 ‘대학’을 곧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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