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 경제발전과 정치, 사회의 변혁과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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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 - 경제발전과 정치, 사회의 변혁과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경제개발, 경제성장
1. 경제개발5개년 계획과 그 내용
2. 제2공화국의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
3.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성격
4.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전략의 특수성
5. 경제학자들이 바라보는 박정희식 경제성장
6.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 평가
7. 경제성장을 알려주는 각종 도표들

Ⅱ.정치·사회적 상황
1. 유신 체재의 성립
2. 유신체재 성립의 배경
3. 1970년대 초에 발생했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혼란
4. 1970년 대의 민주화운동의 부분별 유형

Ⅲ.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1.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에 대한 견해
2. 3공화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 비판의 반론
첫째. 한일 회담에 대한 비판
둘째. 월남파병
셋째. 영호남 차별
넷째. 박정희가 아니였어도 경제개발은 가능할 수 있다?
다섯째. 박정희 정권의 개발은 무차별 강압적 발전이었다.

본문내용

월 12일 참의원 본회의 답변에서 ‘정부는 외국의 전문가와 연구하여 강력하게 추진할 5개년계획을 세우고 실천이 되면 경제계에 대변모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이 답변은 적어도 4월말에는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었음을 뒷받친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측 대표가 5월 9일 미국 워싱턴의 AID를 방문하여 대한원조책임자 캐어리 과장을 만났을 때 경제개발계획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또 민주당 정권의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은 문서화되어 1961년 5월 12일 오위영 장관이 국무회의에 보고되었고, 동일자로 부흥부 명의로 발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과 계획의 일부 내용은 당시의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현재 1961년 5월 12일자로 발표된 장면 정부의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 원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에 관한 연구 - 장면연구회 발표문 순천향대 김기승
3.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성격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박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가장 뜨거운 쟁점은 제1차 계획이 과연 그들의 아이디어였는가이다. 물론 박정권은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러면 먼제 이 문제를 살펴보자. 군사쿠데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쿠데타를 일으킨 주도 세력들 대부분은 경제에 대해 무지했다. 비록 그들이 자주경제 재건을 혁명공약으로 내걸고 이승만과 민주당 정권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경제정책을 입안할 만한 전문가는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학 자문집단으로 교수들을 고용하고, 기존 경제관료들을 기반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박정권은 경제 발전을 추진하는 제도적 기반으로 경제기획원을 새로 발족했는데 이는 건설부의 전 기구와 재무부의 예산국,내무부 통계국을 통합한 것이였다. 또한 내각 수반 직속 기관으로 기획조정위원회를 설치하여 경제개발계획 및 연간 기본운영계획을 세워 사업을 집행하고 그 결과를 심사분석했다.
바로 이 경제기획원에서 1962년 1월에 발표한 제1차 계획이 반론의 핵심 사안이다. 다시 말해 이 계획안은 민주당 안의 복사판이라고 평가받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민주당도 경제기획원과 같은 경제 부서를 통괄하는 기구의 창설을 계획했으며 국가제건최고회의의 개혁안 중에서 부채 농가 지원, 전력회사의 통합, 세제 개혁 수행, 부패관료 및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벌 강화, 원조와 투자의 다양화를 위한 서독과의 관계 확대 추진 등이 이미 민주당 정권에 의해 수행되기로 계획되었거나 공표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군사 쿠데타 세력이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민주당의 경제계획을 입안하던 관료들에게 경제계획안을 계속 작성하도록 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일했던 이진수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기존의 자료를 이용하고 구절을 바꾸어 최고회의 이름으로 계획을 추진했으며 내용도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은행 국유화처럼 박정권의 독자적인 안도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 안과 정확히 일치한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박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일부 그들의 독자적인 정책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민주당 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
당시 한국의 열악한 경제적 조건, 군사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부재를 경제 성장으로 만회하려는 욕구, 경제적으로 우월한 북한을 따라잡으려는 욕구 그리고 자립적인 한국을 건설하려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결합되어 등장한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제정책에 대한 박정권의 의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박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미 민주당 정권에 의해 거의 완성된 것이었다. 제1차 계획을 전면적인 수출 주도형 산업화로 수정시키고 당시 한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던 자금을 차관 형태로 제공해주었으며 한국제 상품의 최대 수출시장을 제공했던 미국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당시의 경제성장이 결코 박정권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과 최악의 노동조건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경제 성장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을 간과한 채 경제 성장의 공을 박정권에게만 돌리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왜곡이다. 뿐만 아니라 박정권이 70년대 초반부터 추진하기 시작한 중화학공업화정책과 새마을운동은 이 시기의 대내외적인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등장한 정책이지만 경제 논리에 의해서 진행되지 않고 유신체제의 정당화 및 공고화라는 정치논리에 의해 좌우됨으로써 정책의 방향과 성격이 변질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 책세상 전재호
4.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전략의 특수성
첫째. 박정희 정권은 60년대 초에 형성된 내외적 조건, 즉 미국원조정책의 변화, 발전주의 지배연합의 형성, 산업화에 대한 국민적 에너지를 시기적절하게 결합시켜 이를 급속한 자본주의 산업화로 연결시켰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부정축재처리, 재정정책, 금융정책 등을 통해 국가-자본관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였고, 국내자본으로 하여금 산업자본을 위주로 하는 자본주의 산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국내자본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서는 자본축적과 경제적 재생산을 도모할 수 없었다. 또한 국가는 외국자본을 국내적 상황에 맞게 능동적으로 수용하였다. 50년대의 국가가 외국자본에 대해 일방적 의존으로 국내경제상황을 전적으로 외국자본의 흐름에 종속시켰던 것과는 달리 박정희정권은 외국자본을 능동적으로 도입하되 그것이 산업부문에 투자되도록 강제함으로써 외자의 도입을 산업화와 연결시켰다.
둘째. 1차계획의 추진과정은 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의 변화라는 미국 원조정책의 변화에 대한 국가의 신속한 대응과정이자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편입과정이었다. 급속한 경제개발과 국내 가용자본의 미비라는 상황은 외국자본의 도입을 통해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나 장면 정권이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원조의 확대를 통해 국내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반면에 박정희 정권은 차관의 적극적인 도입을 통해 외국 생산력을 국내에 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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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07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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