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天神觀
2. 불교의 수용
3. 국가 불교적 면모
4. 유교정치사사의 대두
Ⅲ. 결론
Ⅱ. 본론
1. 天神觀
2. 불교의 수용
3. 국가 불교적 면모
4. 유교정치사사의 대두
Ⅲ. 결론
본문내용
들이 무리를 형성하여 모여 살 때는 모두가 평등한 존재였다. 그런 사회에서는 계급이 없었고 그거 연장자, 경험이 많은 자가 지도자가 되어 사람들을 통솔하는 정도였다. 결코 계급이 높은 사람이 아닌 평등한 위치의 사람 중에 뛰어난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하듯이 사람의 생각과 사회의 모습도 변한다. 사람들은 농업이 시작되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된다. 농업을 하기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필요에 의하여서 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살게 된다. 그러한 마을에서 평등의식이 사라지고 특정 계급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농업을 통한 잉여가 생기면서 부터였다. 농업기술이 조금씩 발달하면서 자신들이 먹고도 남는 곡식이 생기게 된다. 이것으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부를 많이 축적한 자가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잉여의 생산으로 계급의 분화가 이뤄지게 되었다.
계급 중에는 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지배계급이 있었다. 이들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지배계급은 몇 가지 지배이데올로기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는 변화하게 된다.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의식, 불교, 유교 이렇게 변화 하면서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 했고 권위도 확보하였다. 아래에서는 지배계급들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Ⅱ. 본론
1. 天神觀
고대에는 천지신을 숭배하는 신궁이 설치되었다. 신궁의 설치 위미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인 변화와 관련시켜 역사적 의의를 알 수 있다.
소지왕 9년 2월에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을 시조가 태어난 나을에 설치하고 나서 한달 뒤인 3월에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유사에게 관도를 수리할 것을 명하고 7월에는 월성을 수즙하였다. 따라서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의 설치가 중앙통치력 확대 과정의 일환으로서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에 신궁을 설립했다고 해서 주신이 박혁거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상고시기부터 소지왕대까지는 아직도 왕위교체에 자연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으나, 소지왕 이후에는 왕위 교체와 자연변이가 직접 관련이 없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고 그에 대해 친제를 행함으로써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종전의 왕위 교체에 자연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은 영역내의 사상적 구심점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신궁을 설치하여 천지신에 친제함으로써 비로소 사상적 통일을 기하게 되는 왕위 교체에서 자연변이의 영향력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지신을 모신 신궁설치는 국내의 체제정비와 왕위계승과의 관련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외적 의미 또한 큰 것이라 생각한다. 소지왕 17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낸 기록과 함께, 8월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구원을 청한 백제를 도와 고구려를 물리치니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신궁설치는 국력의 신장 과정에 있어서 대외적으로 국가의식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눌지왕 4년(450)의 실직원 싸움과 잇따른 고구려 침입기사로 볼 때 450년에 고구려 군이 철수하여 신라는 이미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와 같이 천지신에게 치제함으로써 자주적 국가의식을 고취한 것이라 하겠다. 제천의례의 기록이 김부식의 사대적 관념의 투영에 의해 삭제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식 성장과 함께 신궁이 설치됨으로써 행해진 것이다.
이러한 국내의 체제정비 및 왕권강화와 대외적 국가의식의 성장은 지증왕대에 이르면 더욱 확고해진다. 즉위 직후 親祀神宮을 제도화하였으며 주군주에게 권농과 우경 실시를 명하였다. 이것은 이러한 기술을 국가적으로 널리 보급시킬 단계에 도달한 것을 말하는바, 이제는 정복 그 자체뿐만 아니라 이미 정복된 영역에 대한 농업생산력의 확대에 큰 관심을 나타냄으로써 영토 의식의 성장을 보이고 있다. 그 다음해에는 성장된 국가의식을 기반으로 국호를 신라로 하고 ‘王’호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완전한 국가체제를 확립하게 된 거시다. 이러한 국력 신장과 국가의식의 성장 기반 위에서 주군현제를 실시하고 군주를 두었으며, 견도에 동시를 설치하고 아시촌에 소경을 두어 육부 및 남쪽 지방민들을 사민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천지신을 모신 신궁의 설치는 대내적으로 국가체제의 정비에 따른 사상적 통일정책이었다고 파악하여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하듯이 사람의 생각과 사회의 모습도 변한다. 사람들은 농업이 시작되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된다. 농업을 하기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필요에 의하여서 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살게 된다. 그러한 마을에서 평등의식이 사라지고 특정 계급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농업을 통한 잉여가 생기면서 부터였다. 농업기술이 조금씩 발달하면서 자신들이 먹고도 남는 곡식이 생기게 된다. 이것으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부를 많이 축적한 자가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잉여의 생산으로 계급의 분화가 이뤄지게 되었다.
계급 중에는 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지배계급이 있었다. 이들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지배계급은 몇 가지 지배이데올로기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는 변화하게 된다.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의식, 불교, 유교 이렇게 변화 하면서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 했고 권위도 확보하였다. 아래에서는 지배계급들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Ⅱ. 본론
1. 天神觀
고대에는 천지신을 숭배하는 신궁이 설치되었다. 신궁의 설치 위미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인 변화와 관련시켜 역사적 의의를 알 수 있다.
소지왕 9년 2월에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을 시조가 태어난 나을에 설치하고 나서 한달 뒤인 3월에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유사에게 관도를 수리할 것을 명하고 7월에는 월성을 수즙하였다. 따라서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의 설치가 중앙통치력 확대 과정의 일환으로서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에 신궁을 설립했다고 해서 주신이 박혁거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상고시기부터 소지왕대까지는 아직도 왕위교체에 자연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으나, 소지왕 이후에는 왕위 교체와 자연변이가 직접 관련이 없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고 그에 대해 친제를 행함으로써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종전의 왕위 교체에 자연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은 영역내의 사상적 구심점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신궁을 설치하여 천지신에 친제함으로써 비로소 사상적 통일을 기하게 되는 왕위 교체에서 자연변이의 영향력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지신을 모신 신궁설치는 국내의 체제정비와 왕위계승과의 관련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외적 의미 또한 큰 것이라 생각한다. 소지왕 17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낸 기록과 함께, 8월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구원을 청한 백제를 도와 고구려를 물리치니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신궁설치는 국력의 신장 과정에 있어서 대외적으로 국가의식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눌지왕 4년(450)의 실직원 싸움과 잇따른 고구려 침입기사로 볼 때 450년에 고구려 군이 철수하여 신라는 이미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와 같이 천지신에게 치제함으로써 자주적 국가의식을 고취한 것이라 하겠다. 제천의례의 기록이 김부식의 사대적 관념의 투영에 의해 삭제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식 성장과 함께 신궁이 설치됨으로써 행해진 것이다.
이러한 국내의 체제정비 및 왕권강화와 대외적 국가의식의 성장은 지증왕대에 이르면 더욱 확고해진다. 즉위 직후 親祀神宮을 제도화하였으며 주군주에게 권농과 우경 실시를 명하였다. 이것은 이러한 기술을 국가적으로 널리 보급시킬 단계에 도달한 것을 말하는바, 이제는 정복 그 자체뿐만 아니라 이미 정복된 영역에 대한 농업생산력의 확대에 큰 관심을 나타냄으로써 영토 의식의 성장을 보이고 있다. 그 다음해에는 성장된 국가의식을 기반으로 국호를 신라로 하고 ‘王’호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완전한 국가체제를 확립하게 된 거시다. 이러한 국력 신장과 국가의식의 성장 기반 위에서 주군현제를 실시하고 군주를 두었으며, 견도에 동시를 설치하고 아시촌에 소경을 두어 육부 및 남쪽 지방민들을 사민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천지신을 모신 신궁의 설치는 대내적으로 국가체제의 정비에 따른 사상적 통일정책이었다고 파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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