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사]해방 전후사로 본 나주지방의 정치, 사회적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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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해방전 일제말기 나주지방의 정세
1) 민족해방운동의 확대
2) 나주지방의 사회경제적 상황
2) 전시지배체체과 나주지방

3. 해방후 인민위원회의 결성 및 해체
1) 건준, 인민위원회의 결성
2)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해체
3) 좌익세력의 강세와 우익세력의 약세

4. 나주지방의 11월 봉기
1) 나주지방 11월 봉기의 경과
2) 나주지방 11월 봉기의 성격

5. 1947년 이후 우익세력의 득세와 좌익세력의 저항
1) 우익 중심의 세력 개편
2) 좌익의 저항과 5.10선거

6. 맺음말

본문내용

한편으로는 이같이 토착적인 인민위 세력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면서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익세력을 새로 부식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45년말까지 전혀 세력화하지 못하였던 나주의 우익세력은 1946년 3월 들어 독립촉성국민회 나주읍지부를 조직함으로써 세력화되기 시작하였다. 독촉 나주지부의 초대 회장은 일제하에서 해남군수 등 관리생활을 한 김영섭이었다. 하지만 1946년말까지 독촉 나주지부의 힘을 미약하였고, 나주의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고 있던 것은 여전히 토착적인 구 인민위세력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미군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였는데, 그것이 1946년 11월 1일의 이른바 '11월 1일 봉기'였다.
나주의 11월 1일 봉기는 10월 1일 대구봉기부터 시작된 이른바 10월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전남지방의 11월 봉기는 10월 31일 목포부터 시작되어 11월하순까지 2부 12개 군에서 일어났는데, 나주의 봉기는 7천여명에 달하는 가장 많은 군중이 참여하고, 또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 봉기로서 유명하다. 11월 1일 아침 각 동리별로 집결한 주민들은 다시 면별로 집결하여 각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병력을 감금하였다. 오전에 각 면에서 봉기한 군중들은 점심때가 되면서 영산포와 나주읍 방면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남쪽 방면의 다시와 고막원 방면의 군중, 그리고 동강·공산·왕곡·반남·세지면의 농민들은 영산포 지서앞으로 집결하였다. 그 수는 5천명에 가까웠다. 이같이 다수 군중이 몰려들자 영산포 지서의 경찰은 발포하여 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이들 군중은 나주읍으로 접근하였다. 한편 북쪽 방면의 문평면과 노안면의 1천여명의 군중들은 금안리를 거쳐 나주읍으로 접근하였다. 또 동쪽 방면의 봉황면과 금천면의 수백명의 군중들도 나주읍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사태를 보고받은 미군정은 미군 병력을 나주로 급파하고, 정찰기를 띄워 군중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미군 병력이 나주경찰서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30분경이었고, 군중들이 나주경찰서 앞으로 몰려든 것도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나주경찰서의 경찰은 군중들이 몰려들자 즉각 발포하여 현장에서 3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하였다. 오후 4시 30분경에 이르러 군중은 해산하였다. 군중 가운데 3천여명은 오후 5시경 금천지서로 몰려가 공격하였으나 경찰의 발포로 4명이 사망하였다. 5시 이후 미군과 경찰 추가병력이 나주에 들어오는 가운데 나주 봉기는 막을 내렸다. 나주봉기에서는 적어도 16명이 사망하였으며, 다수가 부상하였다. 나주경찰서는 이 봉기와 관련하여 133명을 체포하였으며, 15명이 주모자로 인정되어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나주의 11월 1일 봉기는 물론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같이 다수의 주민들이 참여하였던 것은 미군정의 토착적인 인민위세력에 대한 탄압에 대한 저항감, 강제적인 식량공출 정책에 대한 반감, 그리고 외지에서 들어와 반주민적인 태도를 보여온 경찰에 대한 증오심 등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날 군중들이 뿌린 비라에는 인민위에의 권력 이양, 친일경찰 퇴진, 식량공출 중지 등의 요구가 있었고, 그밖에도 미소공위 재개, 입법의원 구성 반대, 토지개혁 실시 등의 요구 사항이 들어 있었다.
11월 봉기 이후 좌익세력과 미군정·경찰간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1947년 5월 1일의 메이데이에 나주 왕곡면에서는 군중이 지서를 습격하였다. 7월 27일 미소공위 재개에 맞추어 반남 등지에서 군중 집회가 있었는데, 경찰은 총을 쏘아 이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주의 좌익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거나 도피하였고, 민전이나 민청 등의 조직도 공개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민청은 미군정에 의해 해산령을 받았으며, 경찰은 나주의 민청 조직을 해산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하였다. 또 교원들 내부의 좌익세력 색출작업도 계속되었다.
반면 미군정은 우익세력의 육성에 적극 노력하였다. 나주의 우익세력은 1947년 들어서 경찰의 지원 하에 세력 결집을 시작하였다. 1947년 2월에는 민족청년단 나주지단이 결성되었으며, 이에는 주로 한독당계열의 인물이 참여하였다. 한편 1946년에 이미 결성된 독촉청년연맹 나주지부는 그해 9월 대동청년단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대동청년단에는 김상호, 김자명 등 김해 김씨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족청과 대동청년단은 모두 군청과 경찰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특히 후자는 더욱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같은 시기 우익 정당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1947년 봄 중국에서 귀국한 최창희(최추서)의 형제, 승명천 등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 나주군당부가 결성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한국민주당 나주군당부가 김창호, 김자명 등 김해 김씨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는 앞서 건준과 인민위 주도세력이 밀양 박씨였던 것과 대비된다. 김해 김씨와 밀양 박씨는 나주의 이족 가문으로서 19세기 후반 이래 협조와 경쟁의 관계를 반복해왔는데, 해방 직후의 시점에서 양자는 대립의 관계에 서게 된 것이었다.
지방 정치세력의 재편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948년 5·10선거가 실시되었다. 좌익세력은 산속으로 도피한 무장대를 중심으로 이에 저항하며 선거를 방해하려 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뒤였다. 이 선거에서는 일제시기 항일운동을 한 이항발이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한민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되었고, 을구에서는 한민당과 대동청년단의 김상호가 민족청년단의 서상덕을 가까스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선거 이후에도 1949년까지 산속으로 들어간 좌익 무장대는 간간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저항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좌익세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우익세력은 마을마다 조직을 갖추는등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이로써 미군정이 기획하였던 토착적인 자치세력의 거세, 중앙권력에 의한 직접적인 지배, 보수 우익 세력의 부식이라는 지방 정치·사회세력의 재편 작업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얼마 뒤 발발한 6·25전쟁은 또 한 번 나주 지방사회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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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9.18
  • 저작시기2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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