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가 우리의 역사인 이유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발해사가 우리의 역사인 이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말

본론
1. 4개국의 발해관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2. 남한과 북한의 인식차이
3. 중-러-일의 자국중심 해석
4. 남북국시대론의 타당성
5. 역사 속 발해에 대한 인식

맺음말

본문내용

군대 3만을 파견하였던 사실이 발단
->이로 인해 당과 신라의 관계 어느 때보다 친숙 자연히 발해와는 거리가 멀어짐
여기서 이사도 는 고구려계 사람으로 발해는 이 반란을 지지하였고(동족의식+국가적이익) 신라는 당의 편을 들었다.(신라 하대 정치 세력의 이해 관계)
⑤ 발해 멸망기의 남북교섭(905-926)
대립관계에서 다시 우호관계로 변함->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이 거란의 팽창을 두려워한 나머지 은밀히 '신라와 여러나라'들에 구원을 요청하여 이것을 약속받음 (음여신라제국결원) 그러나 신라는 오히려 나중에 거란을 도움 -> 신라하대 정치적 이해관계때문
5. 남북국간의 교류가 시사하는 바
남 북국의 이러한 대립과 교섭은 이전의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가 대립과
교섭을 반복한 것과 매우 비슷함
->지극히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임
발해는 고구려멸망에 대한 대립감정으로 인해 안정이 아닌 위기 하에서만 신라와의 교섭을 시도 당의 이이제의 정책에 의해 이러한 감정은 더욱 심화
이러한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발해는 고구려 계승의식이 매우 강함
역사 속 발해에 대한 인식
1.발해에 대한 신라의 인식
…其文集有上大師侍中狀云…高句麗殘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爲渤海… (최치원이 당의 태사시중에게 보낸 문서의 일부분)
발해의 건국을 ‘고구려 유민이 모여 태백산 기슭에 근거지를 삼아 발해를 건국하였다’ 라고 기록함으로써 그 역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인정하였다.
2.발해에 대한 고려의 인식
삼국사기에서 발해사를 제외 ->고려 지성인들이 갖고 있던 역사의식의 한계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고구려인 대부분은 발해를 자국사로 인식 -> 고려 태조가 발해를 “친척의 나라”로 인정하였다.
대몽항쟁 이후의 사서 -> [삼국유사] (1281년경)와 [제왕운기](1287)의 발해관은 자국사로서 인식하였다. [삼국유사]가 중국 [신당서]대로 발해의 대조영을 ‘속말말갈’로 서술, [제왕운기]는 ‘고구려 장수’로 표현하여 보다 적극적임을 볼 수 있다.
*사진에 있는 석등 설명 =>상경성 옛 절터를 외롭게 지키는 거대한 석등이다. 현무암으로 만든 이 석등은 높이가 6m를 넘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기둥을 아래위에 새긴 연꽃무늬 부조도 강건한 느낌을 주어, 당시 절의 규모와 나이가 발해의 국력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이곳은 발해 상경유지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3. 조선시대 발해에 대한 인식
渤海의 韓國史化는 유득공 , 홍석주 , 정약용 , 김정호 등에 의해 적극화되었다.
특히 유득공이 잘 알려진 대로 발해를 한국사의 체계 에 넣어야 한다고 적극 주장
…及扶餘氏亡. 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謂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유등곡의 발해고 서문)
*‘발해고’의 보충설명 => 1784년(정조8)에 유득공이 쓴 발해에 대한 역사책이다. 모두 9개 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했는데, 발해의 종합사서라 할 만하다. 특히 머리말에서 지은이 유득공이 고려 시대에 발해에 대한 체계적 서술을 하지 않은 것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라든가, 발해사를 신라사와 더부어 남북극 역사로 서술해야 할 것임을 제안한 것은
매우 획기적이다.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하면서, 한국사에서 삼국시대에 이어 신라와 발해가 병립하였
던 남북국시대가 있었음을 적극 주장하였다.
4. 한말과 독립 운동기에 발해에 대한 인식
한말 역사교과서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역사집략』(1905)은 발해를 우리 민족사의
일부로 서술하였다.
최남선의 『조선역사강화』(1930)에서 그는 제6장 '신라의 통일'과 제7장 '발해의 따로남'
분립시켜 발해를 한국사에 서술하였다.
신채호『독사신론』(1908)에서 그는 여기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는 『삼국사기』와
발해사를 서술하였던 한말의 교과서까지도 철저히 비판 보다 더 철저한 발해사 인식을 주
장하였다.
맺음말
1.발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그러나 발해의 역사적 특성과 현재 동북아
시아 만주지역의 중요성이 커져 감에 따라 발해의 역사가 위협을 받고 있다.
중국은 지금 영토지상주의에 입각한 역사 인식을 하면서 고구려는 물론 발해의 역사 까지
한국의 역사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2.하지만 무엇보다도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의식이 뚜렸 했고 앞 조의 발표에서도 보았듯이
고구려가 우리 역사가 분명하다는 시점에서 발해는 분명 우리의 역사이다.
3.우리학계의 현실은 발해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다. 더 많은 연구와 투자가 이루
져야 할 것이다.

키워드

추천자료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6.05.25
  • 저작시기200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114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