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문화대혁명 정의
2. 문화대혁명의 배경
3. [해서파관] 비판
4. 문화대혁명 발단
5. 당시의 규정
6. 문화대혁명 전개
7. 문화대혁명의 종언
8. 문화대혁명을 평가하는 3가지 관점
9. 문화대혁명의 특수한 성격
10. 문화대혁명의 영향
11. 오늘날의 평가
2. 문화대혁명의 배경
3. [해서파관] 비판
4. 문화대혁명 발단
5. 당시의 규정
6. 문화대혁명 전개
7. 문화대혁명의 종언
8. 문화대혁명을 평가하는 3가지 관점
9. 문화대혁명의 특수한 성격
10. 문화대혁명의 영향
11. 오늘날의 평가
본문내용
국민경제를 향상시켜야한다고 덩샤오핑이등장하였다. 그는 akdhWJend과 저우언라이의 지지아래 철도 수송을 정돈하고 공업생산 등 각분야를 정돈하여 상황을 호전시켰다. 하지만 1975년 11월부터 덩샤오핑에 대한 4인방의 비판이 전개되어 덩샤오핑이 그동안 취하였던 정책은 자본주의의 복벽이라 하는 비판과 함께 많은 법령과 제도들이 폐지되었다. 그 결과 정상적인 경제질서가 다시 파괴되었다.
이렇듯 문화대혁명이라는 혼란은 중국경제를 전반적으로 침체속에 빠뜨렸고, 그 기간동안의 서구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은 엄청난 경제발전을 하게 되어 중국과의 격차를 더 크게 만들었다. 이런 경제적인 침체는 그 이후 중국이 개혁, 개방에 의한 중국식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들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사회문화적인 영향
문화와 교육분야는 문화대혁명 기간 중 가장 재난을 겪은 분야이다. 학술계, 교육계, 신문계, 문예계, 출판계가 심각한 공격을 받았다. 또한 10년동안의 계속되어진 혼란은 중국 인민들을 폐쇄적이고 수동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중국인들이 가지는 부정적인 경향은 대부분이 문화대혁명의 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자기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려는 경향과 항상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 등으로 나타났다.
문학분야에서으이 임표와 강청이 결탁하여 건국이래 문예계의 성과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 있었으며, 문화계의 각 협회들이 강제적으로 해산되거나 활동이 정지되었다. 또한 전국의 342종 신문과 790여종의 잡지가운데 중앙과 지방이 당신문과 소수의 간행물을 제외한 대부분이 정간되었다. 학술계의 많은 저명인사들이 총두목, 학술권위의 반동이란 멍에를 쓰고 비판받았으며 감옥에 투옥되었다. 대체로 문화대혁명기간 중 부상당하거나 장애자 또는 죽음에 이른 저명한 교수, 작가, 역사가, 예술가 등은 대략 수 백명에 이르고 전국 각지의 역사유적, 문화유산, 중국과 외국의 명저, 진귀한 보물들이 4구를 타파하자는 구호아래 파괴되었다.
교육분야에서는 대학교육의 질적 저하, 전문인력 양성 실패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낳았다. 문화대혁명기에 폐쇄되었던 대학은 신입생을 다시 받기시작하였으나, 대부분이 사상성을 기반으로 해서 추천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질의 하락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EH한 대학생을 비롯한 학생들은 농촌 등지로 강제적으로 이주하여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이러한 전문인력 양성실패는 문화대혁명 이후 전문인력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와서야 그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문화대혁명은 소수민족에 있어 엄청난 불행을 몰고 왔다. 문화대혁명의 논리는 민족을 부르주아적 존재로 보고 있으므로, 종료를 포함하여 민족적 존재는 모두 '파구입신'의 슬로건 아래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간섭의 범위는 종교는 물론이고 민족의상,식사,습관에 이르렀고, 진보적이라고 하여 한족의 그것으로 강제되었다. 그에따라 언어, 의상 전통이 파괴되었다.
11. 오늘날의 평가
- 문화대혁명은 한때 만민평등과 조직타파를 부르짖은 인류역사상 위대한 실험이라고 극찬을 받았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 운동으로 약 300만 명의 당원이 숙청되었고, 경제는 피폐해지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하였다.
중국은 79년 10월 1일, 건국 30주년을 맞아 그 축하집회에서 예젠잉이 처음으로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한 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6중전회에 의한 <건국 이래의 당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이 당의 결의에 의해 정식으로 부인되어 류사오치를 비롯하여 문화대혁명으로 타도된 지도자 모두를 복귀 또는 명예 회복시키는 한편, 문화혁명파는 모두 실추하여 비마오쩌둥화가 진전되었다.
12.
자료사진
마오쩌둥의 어록을 들고 사원앞에 불상을 내놓고 공개비판할 때
거리로 뛰쳐나온 군중들 사용하였던 고깔모자를 씌운뒤 봉건사상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적어 놓았다.
이 사진은 홍위병 집회의
모습이다.
생활필수품이 아닌 문화유품은 홍위병집회의 모습
봉건자재였고 그런 물건을 가지고있는 것은
자신이 아직 봉건사회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었기에 개인이 소장할수 없었다.
흑료강성 당 간부가 군중집회에서
공개비판을 받고 이 비판운동이 끝나고 간부는
자살했다.
이렇듯 문화대혁명이라는 혼란은 중국경제를 전반적으로 침체속에 빠뜨렸고, 그 기간동안의 서구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은 엄청난 경제발전을 하게 되어 중국과의 격차를 더 크게 만들었다. 이런 경제적인 침체는 그 이후 중국이 개혁, 개방에 의한 중국식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들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사회문화적인 영향
문화와 교육분야는 문화대혁명 기간 중 가장 재난을 겪은 분야이다. 학술계, 교육계, 신문계, 문예계, 출판계가 심각한 공격을 받았다. 또한 10년동안의 계속되어진 혼란은 중국 인민들을 폐쇄적이고 수동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중국인들이 가지는 부정적인 경향은 대부분이 문화대혁명의 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자기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려는 경향과 항상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 등으로 나타났다.
문학분야에서으이 임표와 강청이 결탁하여 건국이래 문예계의 성과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 있었으며, 문화계의 각 협회들이 강제적으로 해산되거나 활동이 정지되었다. 또한 전국의 342종 신문과 790여종의 잡지가운데 중앙과 지방이 당신문과 소수의 간행물을 제외한 대부분이 정간되었다. 학술계의 많은 저명인사들이 총두목, 학술권위의 반동이란 멍에를 쓰고 비판받았으며 감옥에 투옥되었다. 대체로 문화대혁명기간 중 부상당하거나 장애자 또는 죽음에 이른 저명한 교수, 작가, 역사가, 예술가 등은 대략 수 백명에 이르고 전국 각지의 역사유적, 문화유산, 중국과 외국의 명저, 진귀한 보물들이 4구를 타파하자는 구호아래 파괴되었다.
교육분야에서는 대학교육의 질적 저하, 전문인력 양성 실패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낳았다. 문화대혁명기에 폐쇄되었던 대학은 신입생을 다시 받기시작하였으나, 대부분이 사상성을 기반으로 해서 추천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질의 하락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EH한 대학생을 비롯한 학생들은 농촌 등지로 강제적으로 이주하여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이러한 전문인력 양성실패는 문화대혁명 이후 전문인력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와서야 그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문화대혁명은 소수민족에 있어 엄청난 불행을 몰고 왔다. 문화대혁명의 논리는 민족을 부르주아적 존재로 보고 있으므로, 종료를 포함하여 민족적 존재는 모두 '파구입신'의 슬로건 아래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간섭의 범위는 종교는 물론이고 민족의상,식사,습관에 이르렀고, 진보적이라고 하여 한족의 그것으로 강제되었다. 그에따라 언어, 의상 전통이 파괴되었다.
11. 오늘날의 평가
- 문화대혁명은 한때 만민평등과 조직타파를 부르짖은 인류역사상 위대한 실험이라고 극찬을 받았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 운동으로 약 300만 명의 당원이 숙청되었고, 경제는 피폐해지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하였다.
중국은 79년 10월 1일, 건국 30주년을 맞아 그 축하집회에서 예젠잉이 처음으로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한 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6중전회에 의한 <건국 이래의 당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이 당의 결의에 의해 정식으로 부인되어 류사오치를 비롯하여 문화대혁명으로 타도된 지도자 모두를 복귀 또는 명예 회복시키는 한편, 문화혁명파는 모두 실추하여 비마오쩌둥화가 진전되었다.
12.
자료사진
마오쩌둥의 어록을 들고 사원앞에 불상을 내놓고 공개비판할 때
거리로 뛰쳐나온 군중들 사용하였던 고깔모자를 씌운뒤 봉건사상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적어 놓았다.
이 사진은 홍위병 집회의
모습이다.
생활필수품이 아닌 문화유품은 홍위병집회의 모습
봉건자재였고 그런 물건을 가지고있는 것은
자신이 아직 봉건사회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었기에 개인이 소장할수 없었다.
흑료강성 당 간부가 군중집회에서
공개비판을 받고 이 비판운동이 끝나고 간부는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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