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중국종교와 사상
<목 차>
Ⅰ. 서 론
Ⅱ. 춘추전국시대의 사회변혁과 사상
1.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상
2. 춘추시대의 철학사상
(1) 관중(管仲)의 부국강병사상
(2) 공자(孔子)의 핵심개념 '仁'
(3) 묵자(墨子)의 겸애론적 사상
3. 전국시대의 철학사상
(1) 상앙(商 )의 패도(覇道)사상
(2) 맹자(孟子)의 왕도(王道)사상
(3) 한비(韓非)의 법치(法治)사상
Ⅲ. 결 론
<참고문헌>
<목 차>
Ⅰ. 서 론
Ⅱ. 춘추전국시대의 사회변혁과 사상
1.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상
2. 춘추시대의 철학사상
(1) 관중(管仲)의 부국강병사상
(2) 공자(孔子)의 핵심개념 '仁'
(3) 묵자(墨子)의 겸애론적 사상
3. 전국시대의 철학사상
(1) 상앙(商 )의 패도(覇道)사상
(2) 맹자(孟子)의 왕도(王道)사상
(3) 한비(韓非)의 법치(法治)사상
Ⅲ.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전쟁은 단순히 군사력만의 대결이 아니라 경제력의 겨룸이며 지력의 다툼이다. 그 나라의 경제력을 증진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겸병전쟁에서 승리하여 대일통의 제국을 건설하려면 덕치나 예치가 아니라 법치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의 법치사상은 인성(人性)이 "수고로움을 싫어하고 편암함을 좋아하며 이록(利祿)을 좋아하고 형벌을 싫어한다."는 관점에 근거한다. 이러한 인성관은 순자의 성악설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비는 이러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이해타산으로 맺어져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이 생산과 전투에서 공을 세우게 하려면 상과 벌을 수단으로 하는 법치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치는 주관적 심치(心治)와 달리 객관적 기준에 입각한 통치행위이다. 법은 사물들을 재고 저울질할 수 있는 도량형과 같이 인간행위의 객관적 표준이다. 한비가 이와 같이 법의 객관성을 강조한 것은 유가의 심치와 법가의 법치를 구별하기 위함이다. 위의 표준인 법인 누구나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도록 공표해야 한다. 한비가 법의 개관화와 성문화를 강조한 것은 법해석의 자의성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형평에 맞게 법을 운용하기 위함이다.
법치를 추진하려면 받드시 '세"(勢)가 있어야 한다. '세'는 지위와 권력을 가리킨다. 한비는 이러한 입장에서 신도(愼到)의 승세설을 받아들였다. 신도가 말한 세와 달리 한비가 말한 세는 '인위지세'(人爲之勢)이다. '인위지세'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법에 의하여 다스릴 수 있는 형세를 만드는 것이다. 한비의 세치(勢治)설은 유가의 덕치(德治)를 겨냥한 것으로 실효면에서 당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덕치보다 세치가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국력을 키우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행위의 객관적 표준인 법이 있어야 하고 그 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세(勢)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각급 관료들을 활용할 수 있는 '술'(術)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한비는 신불해(申不害)의 '술'에 관한 이론을 수용하여 발전시켰다.
'술'이란 사람들이 각자 지닌 힘과 지식·지혜를 남김없이 발휘케 하는 방법이다. 최상의 군주는 자기의 힘과 지식·지혜를 쓰지 않고 남들의 힘과 지식·지혜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비는 하군(下君) 자기 능력을 다하고 중군(中君)은 남의 힘을 다하고 상군은 남의 지혜를 다한다."고 하였다.
한비가 말한 술치의 내용은 대단히 풍부하나 그것을 간추리면 대체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으니 하나는 방간(防姦)이며 하나는 허정(虛靜)이고 다른 하나는 순명책실(循名責實)이다.
천하에 찬탈당하기를 바라는 군주는 없었으나 역사상 찬탈당한 군주가 그토록 많았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비에 의하면 그것은 관료들의 농간술을 살펴내고 방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비는 방간술을 상세히 논하였다. 관료들의 농간을 방지하려면 군주는 관료들을 허정으로 대해야 한다. 이 허정설은 한비가 도가(道家)사상을 그의 용인술에 원용한 것이다. 한비는 이와 같이 법과 술과 세가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법치사상으로 당시 사회에 주어진 대일통(大一統)의 과제를 해결코자 하였다.
이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하여 5백여 년이나 지속된 전란을 종식시키고 안정된 사회를 구현하기를 목적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Ⅲ. 결 론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역사상 가장 깊고 크게 사회전반이 변동했던 시기였다. 혈연을 바탕으로 삼았던 주(周)나라의 사회조직과 제도와 이념과 규범이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정착하지 못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영웅호걸들과 제자백가가 등장하여 각자 자기 나름의 이상을 가지고 사회를 바꾸어 보고자 하였다.
관중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갖가지 기존제도들을 개혁하고 상과 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백성들의 생산력을 증진함으로써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공자는 법과 형과 같은 강제적 수단으로 다스리는 것을 반대하고 인(仁)한 사람이 사회를 주도하여 백성들이 넉넉하고 고르게 잘 살면서도 윤리도덕이 지배하는 도덕적인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묵자는 천하의 이(利)를 증진하고 해(害)를 제거하여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이상시하였다. 이러한 사회를 이룩하려면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하여 살아가기를 바라는 하늘의 뜻에 따라 통치자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상앙은 관중처럼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제도와 사람들을 밀어내고 국력을 효율적으로 증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천하를 제패할 수 있는 부강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전(農戰)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이 사회를 주도하고 국가의 토지와 관작과 권력을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앙의 정책은 전형적인 패도정치의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맹자는 패도가 아니라 왕도를 추구하였다. 그는 인간들에 의하여 일으켜진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그 무엇보다도 인화(人和)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인화를 이룩하려면 백성들과 희노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마음에 의거해야 한다고 믿었다.
한비는 전란을 종식하고 안정을 실현하려면 '치치지란'(致治止亂)을 사회의 목표로 보았다. 이러한 사회를 이룩하려면 덕치나 예치가 아니라 힘에 의해야 한다. 즉, 국가의 힘을 최대한 증진하여 전쟁에 의해 국가사이에 얽힌 문제들을 해결해야하며 오래 끌어온 전란을 종식하고 대일통의 사회를 구현코자 하였다.
이와 같이 춘추전국 시대에 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나름대로 철학을 가지고 사회를 변혁코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들은 중국이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서로 조화되고, 비판을 거쳐 중국사회 사상의 큰 조류를 형성하여 통일국가를 이루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참 고 문 헌 >
왕안섭,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사상개관>,상무출판사, 2004.
윤천근, <중국사회사상>, 형설출판사, 2003.
이효걸,<중국철학의 역사적 상황과 수용의문제>,외계출판사, 2002.
박태원, <중국철학의 사상적 의미>, 예문서원, 1999.
김충열, <중국철학사1>, 예문서원, 1994.
중국 북경대 철학과 연구실, <중국철학사>, 자각아카데미, 1994.
전쟁은 단순히 군사력만의 대결이 아니라 경제력의 겨룸이며 지력의 다툼이다. 그 나라의 경제력을 증진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겸병전쟁에서 승리하여 대일통의 제국을 건설하려면 덕치나 예치가 아니라 법치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의 법치사상은 인성(人性)이 "수고로움을 싫어하고 편암함을 좋아하며 이록(利祿)을 좋아하고 형벌을 싫어한다."는 관점에 근거한다. 이러한 인성관은 순자의 성악설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비는 이러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이해타산으로 맺어져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이 생산과 전투에서 공을 세우게 하려면 상과 벌을 수단으로 하는 법치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치는 주관적 심치(心治)와 달리 객관적 기준에 입각한 통치행위이다. 법은 사물들을 재고 저울질할 수 있는 도량형과 같이 인간행위의 객관적 표준이다. 한비가 이와 같이 법의 객관성을 강조한 것은 유가의 심치와 법가의 법치를 구별하기 위함이다. 위의 표준인 법인 누구나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도록 공표해야 한다. 한비가 법의 개관화와 성문화를 강조한 것은 법해석의 자의성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형평에 맞게 법을 운용하기 위함이다.
법치를 추진하려면 받드시 '세"(勢)가 있어야 한다. '세'는 지위와 권력을 가리킨다. 한비는 이러한 입장에서 신도(愼到)의 승세설을 받아들였다. 신도가 말한 세와 달리 한비가 말한 세는 '인위지세'(人爲之勢)이다. '인위지세'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법에 의하여 다스릴 수 있는 형세를 만드는 것이다. 한비의 세치(勢治)설은 유가의 덕치(德治)를 겨냥한 것으로 실효면에서 당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덕치보다 세치가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국력을 키우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행위의 객관적 표준인 법이 있어야 하고 그 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세(勢)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각급 관료들을 활용할 수 있는 '술'(術)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한비는 신불해(申不害)의 '술'에 관한 이론을 수용하여 발전시켰다.
'술'이란 사람들이 각자 지닌 힘과 지식·지혜를 남김없이 발휘케 하는 방법이다. 최상의 군주는 자기의 힘과 지식·지혜를 쓰지 않고 남들의 힘과 지식·지혜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비는 하군(下君) 자기 능력을 다하고 중군(中君)은 남의 힘을 다하고 상군은 남의 지혜를 다한다."고 하였다.
한비가 말한 술치의 내용은 대단히 풍부하나 그것을 간추리면 대체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으니 하나는 방간(防姦)이며 하나는 허정(虛靜)이고 다른 하나는 순명책실(循名責實)이다.
천하에 찬탈당하기를 바라는 군주는 없었으나 역사상 찬탈당한 군주가 그토록 많았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비에 의하면 그것은 관료들의 농간술을 살펴내고 방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비는 방간술을 상세히 논하였다. 관료들의 농간을 방지하려면 군주는 관료들을 허정으로 대해야 한다. 이 허정설은 한비가 도가(道家)사상을 그의 용인술에 원용한 것이다. 한비는 이와 같이 법과 술과 세가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법치사상으로 당시 사회에 주어진 대일통(大一統)의 과제를 해결코자 하였다.
이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하여 5백여 년이나 지속된 전란을 종식시키고 안정된 사회를 구현하기를 목적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Ⅲ. 결 론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역사상 가장 깊고 크게 사회전반이 변동했던 시기였다. 혈연을 바탕으로 삼았던 주(周)나라의 사회조직과 제도와 이념과 규범이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정착하지 못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영웅호걸들과 제자백가가 등장하여 각자 자기 나름의 이상을 가지고 사회를 바꾸어 보고자 하였다.
관중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갖가지 기존제도들을 개혁하고 상과 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백성들의 생산력을 증진함으로써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공자는 법과 형과 같은 강제적 수단으로 다스리는 것을 반대하고 인(仁)한 사람이 사회를 주도하여 백성들이 넉넉하고 고르게 잘 살면서도 윤리도덕이 지배하는 도덕적인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묵자는 천하의 이(利)를 증진하고 해(害)를 제거하여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이상시하였다. 이러한 사회를 이룩하려면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하여 살아가기를 바라는 하늘의 뜻에 따라 통치자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상앙은 관중처럼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제도와 사람들을 밀어내고 국력을 효율적으로 증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천하를 제패할 수 있는 부강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전(農戰)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이 사회를 주도하고 국가의 토지와 관작과 권력을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앙의 정책은 전형적인 패도정치의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맹자는 패도가 아니라 왕도를 추구하였다. 그는 인간들에 의하여 일으켜진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그 무엇보다도 인화(人和)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인화를 이룩하려면 백성들과 희노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마음에 의거해야 한다고 믿었다.
한비는 전란을 종식하고 안정을 실현하려면 '치치지란'(致治止亂)을 사회의 목표로 보았다. 이러한 사회를 이룩하려면 덕치나 예치가 아니라 힘에 의해야 한다. 즉, 국가의 힘을 최대한 증진하여 전쟁에 의해 국가사이에 얽힌 문제들을 해결해야하며 오래 끌어온 전란을 종식하고 대일통의 사회를 구현코자 하였다.
이와 같이 춘추전국 시대에 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나름대로 철학을 가지고 사회를 변혁코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들은 중국이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서로 조화되고, 비판을 거쳐 중국사회 사상의 큰 조류를 형성하여 통일국가를 이루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참 고 문 헌 >
왕안섭,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사상개관>,상무출판사, 2004.
윤천근, <중국사회사상>, 형설출판사, 2003.
이효걸,<중국철학의 역사적 상황과 수용의문제>,외계출판사, 2002.
박태원, <중국철학의 사상적 의미>, 예문서원, 1999.
김충열, <중국철학사1>, 예문서원, 1994.
중국 북경대 철학과 연구실, <중국철학사>, 자각아카데미, 1994.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