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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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제가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들어가며

Ⅱ.박제가의 생애실학 연구 입문 (역사학회편), 일조각, 1973
한국의 실학사상 (강만길 외), 삼성출판사, 1990
실학파의 철학 사상과 사회 정치적 견해 (최필승), 한마당, 1989

Ⅲ.박제가가 살던 시대실학의 철학 (한국사상사 연구회 편저), 1996 (박제가 부분 著-나우권)와 그 시대의 문제점의 해결을 모색한 북학파
1.박제가가 살던 시대
2.利用厚生의 실학실학의 철학 (한국사상사 연구회 편저), 1996 (박제가 부분 著-나우권)
3.저항·개혁 사상으로서의 北學한국의 실학사상 (강만길 외), 삼성출판사, 1900

Ⅳ.박제가의 사상
1.학문관실학의 철학 (한국 사상사 연구회 편저), 1996 (박제가 부분 著-나우권)
①『大學』주의 반주자학적 해석
②博學
2.자연관실학의 철학 (한국 사상사 연구회 편저), 1996 (박제가 부분 著-나우권)
3.경제관실학의 철학 (한국 사상사 연구회 편저), 1996 (박제가 부분 著-나우권)
①用奢論농본주의적 경제 체제와 연관되어 儒家·道家·墨家·法家 등 대부분의 동양 사상 속에서 儉約을 중요한 가치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소비를 중시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管子』이다. 박제가의 경우 절검을 비판하고 소비와 상업을 촉진시키고자 하였다. ‘용사론’이라는 표헌은 김용덕 교수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②重商論실학파의 철학 사상과 사회 정치적 견해 (최필승), 한마당, 1989
4.과학 기술 발전에 관한 견해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 정치적 견해 (최필승), 한마당, 1989
5.국방론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 정치적 견해 (최필승), 한마당, 1989

Ⅴ.서얼로서의 박제가(신분제도의 폐단을 비판)
1.새로운 사회계층-중인층의 성장조선 후기 역사의 이해 (정옥자), 일지사, 1993
2.박제가의 社會身分制度·門閥制度 비판)朝鮮後期 實學派의 社會思想硏究 (신용하), 지식산업사, 1997
3.양반신분제도의 弊端)朝鮮後期 實學派의 社會思想硏究 (신용하), 지식산업사, 1997
4.과거제도의 폐단과 그 개혁)朝鮮後期 實學派의 社會思想硏究 (신용하), 지식산업사, 1997

Ⅵ.《북학의》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내편朴齊家-北學議 (이익성 옮김), 한길사, 1992)
2.외편朴齊家-北學議 (이익성 옮김), 한길사, 1992)
3.進北學議朴齊家-北學議 (이익성 옮김), 한길사, 1992)

Ⅶ.평가실학파의 철학 사상과 사회 정치적 견해 (최필승), 한마당, 1989

Ⅷ.마치며

본문내용

근무하면서 여기에 소장된 책들을 맘껏 읽고 國內 知識人들과도 널리 사귈 수 있었다. 또한 직책상 正祖와 接觸할 기회가 많아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전후 네차례에 걸친 燕行(1778년, 1790년 5월, 동년 10월, 1801년)애서 청조의 문화를 대표할만한 이조원 등의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그는 청의 物質文化生活을 각 방면에서 관찰하고 利用厚生에 필요한 선진적인 기술과 도구를 연구하였다. 이것은 1778년 제1차 燕行에서 돌아와 지은 「北學議」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로 하여금 北學派의 대표적인 인물이 될 수 있게한 요인이었다. 그의 개혁사상은 1781년 1월 22일에 올린 그의 「丙午所懷1786년 1월 정조의 요청에 따라 문무대신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당시의 제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와 1799년에 農書로서 바친 「疎進本北學議」를 통하여 正祖에게 건의되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殺되었다. 그 내용이 봉건통치자들의 利害와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그는 심한 唐癖에 사로잡혀 있다는 모함을 받게되고 급기야는 문체반정이라는 思想淨化運動에 걸려 규제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외국학자들과의 교류는 制限되었으며, 박제가는 봉건 통치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1792년에 檢書官職을 그만두고 扶餘縣監이 된 그는 1794년에 武科別試에 장원하여 五衛將이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永平縣令으로 전직되었다. 「進北學議疎」는 이때 農官으로서 올린 것이다.
1800년 6월에 그를 庇護하던 正祖가 죽자, 그에게는 큰 위험이 닥쳐왔다. 1801년 9월에 그는 辛酉邪獄신유사옥, 신유박해라고도 한다. 순조 1년(1801년, 신유년)에 노론의 벽파가 시파를 꺾기 위하여 시파와 가깝던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등 많은 신도가 사형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귀양갔다. 주문모 신부도 자수하였다가 사형당했고, 왕의 친척도 가리지 않고 처형하여 300여명이 순교 또는 유배되었다.
에 연좌되어 咸鏡道 鏡城府로 억울하게 피해를 받게 된다.
그는 謫所에서 자제교육을 위한 경서연구로 여생을 보내다가 1805년 3월에 釋放되어 그해 4월 25일에 고향에서 別世하였다.1815년에 사망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그의 末年 行蹟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설도 있다.
亭年 45세. 膝下에는 6남매가 있었다. 그의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고 한다.
Ⅲ.박제가가 살던 시대실학의 철학 (한국사상사 연구회 편저), 1996 (박제가 부분 著-나우권)
와 그 시대의 문제점의 해결을 모색한 북학파
1.박제가가 살던 시대
그가 살던 시대는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의 전란 속에서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위정자들은 禮訟復明反淸 등의 명분론에 치우쳐 있었다. 이른바 실학자들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주자학과 명분론적 反淸論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청의 선진적인 문물제도를 배우지 않고서는 나라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그는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등과 어울리며 조선의 백성을 구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2.利用厚生의 실학실학의 철학 (한국사상사 연구회 편저), 1996 (박제가 부분 著-나우권)
서학과 서구 세계 및 그들의 천문설역산술과학 기기 등의 수용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학자들은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최한기 등이었다. 이들은 농사법의 개량, 수리 사업의 개발, 화폐의 유통, 상품 시장의 확장 및 농구와 운송에 관련된 각종 기기의 제작 등을 역설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단순한 經世致用이 아닌 利用厚生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裕民益國의 안인을 목표로 한 利用厚生에 목적을 두었던 까닭에 이들은 수기인 正德의 비중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것은 우 임금이 육부를 베풀어 놓은게 이용과 후생의 바탕이 아님이 없고, 이용과 후생은 또 반드시 正德을 근본으로 하는 것입니다.「課農少抄」
아아, 이와 같은 다음에라야 비로소 ‘이용‘이라고 할 만하다. 이용한 다음에 후생할 수 있고, 후생한 다음에 그 덕을 바르게(正德)할 수 있다. 그 이용을 하지 못하면서 후생할 수 있는 경 우는 드물다. 생활하는 것이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그 덕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熱河日記」
이용과 후생에서 하나라도 닦여지지 않는다면 정덕을 침해한다.박제가, 『北學議』「自序」夫利用厚生, 一有不修, 則上侵於正德
이들은 양자의 실제 관계에서 후생이 정덕보다 우선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이용→후생→정덕으로 되는 것이 이것들의 실제적 관계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生自厚而後能正德‘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들은 裕民益國을 지향한 利用厚生의 방안인 明農通商惠工에 관한 학문, 즉 실학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동시에 內實實質에 치중하는 이들 실학이 명분의리를 생명과 같이 여기던 성리학의 실학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도 이로써 분명하다. 이른바 이러한 경향의 실학에서는 근대적 성향이 싹트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3.저항개혁 사상으로서의 北學한국의 실학사상 (강만길 외), 삼성출판사, 1900
《북학의》라 하면 北學派를 상기한다. 북학파라고 불리던 一群의 실학자들은 우리의 문화사사상사를 빛낸 우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북학파의 북학 사상을 가장 철저하고도 용감하게 대변한 것이 《북학의》이므로 북학파란 이름이 《북학의》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북학의》의 저자 박제가를 북학의 최선봉이라 하는데 異論이 없을 것이다. 북학은 그 시대와 사회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 사상이며, 북학의 목표를 그대로 오늘에 계승 발전시켜야 할 목표와 일치된다.
여기서 북학이 자란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별견하면, 그때는 18세기 중엽 明君 正祖의 治世이건만 사회풍조는 주자학의 단점만이 횡행하는듯 하였다. 현실적으로는 청나라에 대하여 事大 관계를 맺고 있었으면서도 국내에서는 청나라를 오랑캐라 멸시하였다 中華文明의 전통은 중국 땅에서는 사라지고 우리 나라에만 있었으며, 우리가 보다 문명하다고 오만하게 생각하였으나 저 胡亂

키워드

박제가,   실학,   철학,   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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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07
  • 저작시기2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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