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머리말
1. 영국 혁명
(1) 배경
(2) 청교도 혁명
(3) 명예 혁명
(4) 결과 및 의의
2. 미국독립 혁명
(1) 독립혁명 이전의 식민지 사회
(2) 배경
(3) 경과
(4) 결과 및 의의
3.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1) 사회적 배경
(2) 종교개혁과 독립전쟁의 발발
(3) 독립전쟁의 전개
(4) 독립전쟁의 결과 및 의의
*맺음말
1. 영국 혁명
(1) 배경
(2) 청교도 혁명
(3) 명예 혁명
(4) 결과 및 의의
2. 미국독립 혁명
(1) 독립혁명 이전의 식민지 사회
(2) 배경
(3) 경과
(4) 결과 및 의의
3.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1) 사회적 배경
(2) 종교개혁과 독립전쟁의 발발
(3) 독립전쟁의 전개
(4) 독립전쟁의 결과 및 의의
*맺음말
본문내용
오라녜 공 빌렘, 에그몬트 백작, 호른 백작이 이끄는 네덜란드 독립군이 스페인 군과 맞서게 된다. 이에 마가렛 총독은 처음에는 유화책을 썼으나 결국은 무력으로 진압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이에 빌렘은 독일로 망명하게 된다. 그러나 빌렘이 망명한 뒤에도 네덜란드의 소요는 끊이지 않았고, 마가렛 총독의 진압이 시원찮다는 판단이 들자 펠리페 2세는 악명높은 알바 공(1507~1582)을 신임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하게 된다.
알바 공은 부임하자마자 무자비한 공포 정치를 시작하여, 폭동재판소를 설치하고 에그몬트 백작, 호른 백작 등을 비롯하여 1만이 훨씬 넘는 수의 네덜란드 인사들을 처형하였다. 알바 공의 무자비한 탄압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켜 상대적으로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덜했던 네덜란드 남부의 카톨릭 지방의 이반마저 불러왔다. 이에 알바 공은 그 뛰어난 전술적 재능으로 네덜란드 독립군을 줄줄이 격파하였지만 네덜란드의 반발심은 알바 공의 승리횟수와 비례하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칼뱅파 귀족들은 영국이나 독일 등으로 망명하거나 해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스페인 궁정에서는 이들을 일컬어 거지들(Geuzen: 고이젠)이라 했는데, 이들이 모여 \'해상 거지단(Zeegeuzen)\'을 결성하고 스페인 해군을 공격하였다.
한편 빌렘은 독일의 나사우에서 네덜란드의 독립을 선포하였다.(1568) 이로써 네덜란드의 80년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즈음 펠리페 2세는 영국이 해상 거지단을 비호하는 것을 강력히 규탄하였는데,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이 해상 거지단을 영국에서 추방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이 해상 거지단이 마스 강 하구의 브리엘(로테르담 근처)을 함락하게 된다. 이에 프랑스의 신교도와 엘리자베스 1세는 네덜란드의 상황에 주목하게 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전역에서 알바 공의 위세에 숨죽이고 있던 세력들이 떨치고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스 강 유역이 평정되고 이어 하를렘(암스테르담 서쪽)에서 스페인 함대가 격파되었다. 암스테르담 등은 교역의 퇴조를 우려하여 적극적인 참전을 미루었지만 빌렘이 귀국하여 자치의회를 결성하고 홀란드 총독으로 선출되면서 네덜란드 독립군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게 된다. 빌렘은 칼뱅교로 개종하고(1573) 더욱 강력히 스페인 군을 압박하게 된다.
결국 사정이 이에 이르자 펠리페 2세는 더 이상 알바 공을 네덜란드 총독으로 유임시킬 수 없게 되었다. 6년 전과 비교해 최악의 상황에 이른 네덜란드를 무마하기 위해 펠리페 2세는 유화적인 총독 레스퀸스를 임명한다. 1574년 레이덴(헤이그 북동쪽)에서 스페인 군이 패하면서 스페인 군의 북부지방에 대한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이 와중 레스퀸스 총독이 돌연사하자 재정 악화로 급료가 밀린 스페인 군은 앤트워프를 중심으로 폭동을 벌이게 되는데, 이 \'스페인 광란\'으로 8천이 넘는 네덜란드인이 무고하게 죽어갔다. 이 일은 네덜란드인의 분노를 자극하여 종교가 다른 남부지방이 북부지방과 연합을 맺게 된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이듬해 체결된 강의 맹약이었다. 네덜란드 17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맹약한 사례이다.
1571년 레판토에서 투르크 해전을 완파하여 지중해 최고의 강자로 부상한 펠리페 2세에게 네덜란드에서의 소요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있던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인들이 카톨릭을 믿기로 하면 그 자주권을 인정해줄 요량이었다. 그에 새로 부임한 총독 돈 후안은 스페인 군의 철수를 공표하는 한편 카톨릭만을 믿을 것을 강요했다. 네덜란드에서 그동안 벌어진 소요의 근본원인조차 재지 못한 펠리페 2세의 방침은 당연히 실패하였다. 이에 돈 후안 총독은 군사적 탄압을 시작하였지만 군사적으로 알바 공에 미치지 못한 그가 성공할 리는 만무하였다. 돈 후안 총독은 결국 레판토 해전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운 알렉산더 파르네세에게 총독 직위를 넘겨준다. 파르마 여공 마가렛의 아들로 파르마 공이 된 이 사람은 16세기 네덜란드에 부임한 자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고 또한 그 공적 역시 가장 대단했다.
파르마 공은 장블루 전투에서 네덜란드 군을 완파하는 한편, 분리 대응하는 방침을 세웠다. 비록 강의 맹약을 맺었다고는 하나 그 결속력이 약했던 북부와 남부를 다르게 대우하여 북부는 강압적으로, 남부는 유화적으로 대한 것이다. 이에 남부 10주는 내분을 겪게 되었고, 북부 7주 역시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 와중에 북부 7주의 주요한 요새였던 마스트리히트(현재 네덜란드의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가 파르마 공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이로써 당시 독립전쟁을 주도하던 빌렘의 명성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럼에도 빌렘은 결별선언문을 발표, 북부 7주로 구성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다. 이는 1579년 결성된 위트레흐트 동맹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즈음 포르투갈을 병합하고 승승장구하던 펠리페 2세는 파르마 공의 승전보에 방심했는지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앙주 공을 신임 총독으로 임명한다. 앙주 공은 사욕을 채우기 위해 앤트워프를 계속 공격하였다. 파르마 공의 유화책으로 흔들렸던 남부 10주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네덜란드는 다시 혼미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던 중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오라녜 공 빌렘이 스페인 자객에게 암살된다. 이렇게 되자 북부 7주는 빌렘의 아들 모리츠가 이끌게 된다. 또한 무능한 앙주 공 역시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이로써 파르마 공은 다시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파르마 공은 앙주 공이 들쑤셔놓은 덕에 다시 스페인에 저항하게 된 앤트워프를 13개월간 포위하여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남부 10주를 완전히 스페인의 치하에 두게 된다.
파르마 공은 북부 7주에 대한 공격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었지만, 본국에서는 파르마 공의 바람과는 달리 영국 공격을 결정하였다. 아르마다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결집하여 영국 본토에 상륙, 단숨에 런던을 함락하고 엘리자베스 1세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펠리페 2세의 계획은 파르마 공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파르마 공은 자신이 이끄는 스페인 정규군 3만과 함께 프랑스 북부의
알바 공은 부임하자마자 무자비한 공포 정치를 시작하여, 폭동재판소를 설치하고 에그몬트 백작, 호른 백작 등을 비롯하여 1만이 훨씬 넘는 수의 네덜란드 인사들을 처형하였다. 알바 공의 무자비한 탄압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켜 상대적으로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덜했던 네덜란드 남부의 카톨릭 지방의 이반마저 불러왔다. 이에 알바 공은 그 뛰어난 전술적 재능으로 네덜란드 독립군을 줄줄이 격파하였지만 네덜란드의 반발심은 알바 공의 승리횟수와 비례하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칼뱅파 귀족들은 영국이나 독일 등으로 망명하거나 해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스페인 궁정에서는 이들을 일컬어 거지들(Geuzen: 고이젠)이라 했는데, 이들이 모여 \'해상 거지단(Zeegeuzen)\'을 결성하고 스페인 해군을 공격하였다.
한편 빌렘은 독일의 나사우에서 네덜란드의 독립을 선포하였다.(1568) 이로써 네덜란드의 80년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즈음 펠리페 2세는 영국이 해상 거지단을 비호하는 것을 강력히 규탄하였는데,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이 해상 거지단을 영국에서 추방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이 해상 거지단이 마스 강 하구의 브리엘(로테르담 근처)을 함락하게 된다. 이에 프랑스의 신교도와 엘리자베스 1세는 네덜란드의 상황에 주목하게 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전역에서 알바 공의 위세에 숨죽이고 있던 세력들이 떨치고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스 강 유역이 평정되고 이어 하를렘(암스테르담 서쪽)에서 스페인 함대가 격파되었다. 암스테르담 등은 교역의 퇴조를 우려하여 적극적인 참전을 미루었지만 빌렘이 귀국하여 자치의회를 결성하고 홀란드 총독으로 선출되면서 네덜란드 독립군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게 된다. 빌렘은 칼뱅교로 개종하고(1573) 더욱 강력히 스페인 군을 압박하게 된다.
결국 사정이 이에 이르자 펠리페 2세는 더 이상 알바 공을 네덜란드 총독으로 유임시킬 수 없게 되었다. 6년 전과 비교해 최악의 상황에 이른 네덜란드를 무마하기 위해 펠리페 2세는 유화적인 총독 레스퀸스를 임명한다. 1574년 레이덴(헤이그 북동쪽)에서 스페인 군이 패하면서 스페인 군의 북부지방에 대한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이 와중 레스퀸스 총독이 돌연사하자 재정 악화로 급료가 밀린 스페인 군은 앤트워프를 중심으로 폭동을 벌이게 되는데, 이 \'스페인 광란\'으로 8천이 넘는 네덜란드인이 무고하게 죽어갔다. 이 일은 네덜란드인의 분노를 자극하여 종교가 다른 남부지방이 북부지방과 연합을 맺게 된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이듬해 체결된 강의 맹약이었다. 네덜란드 17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맹약한 사례이다.
1571년 레판토에서 투르크 해전을 완파하여 지중해 최고의 강자로 부상한 펠리페 2세에게 네덜란드에서의 소요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있던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인들이 카톨릭을 믿기로 하면 그 자주권을 인정해줄 요량이었다. 그에 새로 부임한 총독 돈 후안은 스페인 군의 철수를 공표하는 한편 카톨릭만을 믿을 것을 강요했다. 네덜란드에서 그동안 벌어진 소요의 근본원인조차 재지 못한 펠리페 2세의 방침은 당연히 실패하였다. 이에 돈 후안 총독은 군사적 탄압을 시작하였지만 군사적으로 알바 공에 미치지 못한 그가 성공할 리는 만무하였다. 돈 후안 총독은 결국 레판토 해전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운 알렉산더 파르네세에게 총독 직위를 넘겨준다. 파르마 여공 마가렛의 아들로 파르마 공이 된 이 사람은 16세기 네덜란드에 부임한 자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고 또한 그 공적 역시 가장 대단했다.
파르마 공은 장블루 전투에서 네덜란드 군을 완파하는 한편, 분리 대응하는 방침을 세웠다. 비록 강의 맹약을 맺었다고는 하나 그 결속력이 약했던 북부와 남부를 다르게 대우하여 북부는 강압적으로, 남부는 유화적으로 대한 것이다. 이에 남부 10주는 내분을 겪게 되었고, 북부 7주 역시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 와중에 북부 7주의 주요한 요새였던 마스트리히트(현재 네덜란드의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가 파르마 공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이로써 당시 독립전쟁을 주도하던 빌렘의 명성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럼에도 빌렘은 결별선언문을 발표, 북부 7주로 구성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다. 이는 1579년 결성된 위트레흐트 동맹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즈음 포르투갈을 병합하고 승승장구하던 펠리페 2세는 파르마 공의 승전보에 방심했는지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앙주 공을 신임 총독으로 임명한다. 앙주 공은 사욕을 채우기 위해 앤트워프를 계속 공격하였다. 파르마 공의 유화책으로 흔들렸던 남부 10주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네덜란드는 다시 혼미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던 중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오라녜 공 빌렘이 스페인 자객에게 암살된다. 이렇게 되자 북부 7주는 빌렘의 아들 모리츠가 이끌게 된다. 또한 무능한 앙주 공 역시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이로써 파르마 공은 다시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파르마 공은 앙주 공이 들쑤셔놓은 덕에 다시 스페인에 저항하게 된 앤트워프를 13개월간 포위하여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남부 10주를 완전히 스페인의 치하에 두게 된다.
파르마 공은 북부 7주에 대한 공격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었지만, 본국에서는 파르마 공의 바람과는 달리 영국 공격을 결정하였다. 아르마다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결집하여 영국 본토에 상륙, 단숨에 런던을 함락하고 엘리자베스 1세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펠리페 2세의 계획은 파르마 공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파르마 공은 자신이 이끄는 스페인 정규군 3만과 함께 프랑스 북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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