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1. 연구의 의의와 목적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Ⅱ. 본문 분석
1. 다른 복음을 좇는 갈라디아 사람들(갈 1:6)
2. 복음을 변질시키는 이들(갈 1:7)
3. 사도 바울의 반박(갈 1:8-10)
1. 연구의 의의와 목적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Ⅱ. 본문 분석
1. 다른 복음을 좇는 갈라디아 사람들(갈 1:6)
2. 복음을 변질시키는 이들(갈 1:7)
3. 사도 바울의 반박(갈 1:8-10)
본문내용
혜상태의 삶을 버리고 거짓복음으로 전락한 것을 질책하고자 함이다. Ibid., 98.
‘너희를’, 이는 갈라디아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부르신 이’,는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같이 속히’,이는 갈라디아인들이 다른 복음으로 전락한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를 굳이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떠나’ 부르신 이로부터 분리이탈을 뜻하는 전치사 ‘아포’(π, from)에 해당한다. 바울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을 때의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부터 다른 복음으로 전락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누리는 상태에서 떠났음을 뜻한다.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셨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접했었고, 이 복음을 진리로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이제 이들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변절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에 반기를 든 그의 적대자들의 선동 내용을 ‘다른 복음’이라 지칭했다. Ibid., 101.
여기서 ‘다른’이란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어떻게 규명되느냐에 따라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서신의 목적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다른’이라는 형용사는 어떤 특정한 사물, 사실, 인물 이외의 제2 또는 제3의 다른 사물이나 인물을 단순히 개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또는 사물, 사실, 인물과 성질, 특성이 다른 제2 또는 제3의 다른 사물이나 인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헤테론 유앙겔리온’(τερον εαγγλιον;다른 복음)에서 ‘헤테로스’(τερο; 다른)이라는 말은 희랍어에서 두 선택의 가능성 중 다른 하나를 가리키나 헬라화 된 희랍어에서는 그런 분명한 구별이 희미해진다. R. A. Cole,『갈라디아서』김효성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0), 41.
본문에서 사용한 ‘다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간에 주석상 논란이 되어 왔으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이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7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음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무리들을 말하는 점으로 볼 때, 자신이 전파한 복음과 유사한 종류의 ‘다른’ 복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며 그 외의 복음이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복음’에로 전락했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다른 정의를 수용했다거나 다른 종류의 구원의 상태에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비록 명칭상으로는 ‘다른 복음’이라 일컬어졌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복음’과 정반대 되는 상태, 즉 실질적으로 완전히 비복음적인 상태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갈라디아서-복음을 위한 투쟁,”「기독교사상」1988년 360호, 240.
일부 주석가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실제로 본질상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복음을 향해 돌이킨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말하나 William Hendrikson,『갈라디아서』김경신 역(서울: 아가페출판사, 1981), 62.
바울이 결단코 ‘다른 복음’을 정당한 의미에서 ‘또 하나의 복음’으로 사용하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이 문제는 계속해서 심도 있게 다루어 질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의 사역 중 최우선의 이슈였다. 행 21:20-21에서도 드러남과 같이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 하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으나 율법에 열심 있는 자(20절)들의 오해와 커다란 핍박을 그의 평생에 감수해야 하였다.
7절에서의 ‘다른 복음’ 자체의 부정은 그의 입장의 단호함을 명확히 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편지의 첫머리에서 전제한 점과 1:12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함을 천명함으로써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참 복음임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나무라는 것은 이상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변절자이며 영적 이탈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헤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다른 복음을 붙잡고 있었다. 참된 복음은 본질상 바울이 사도행전 20: 24에서 말 한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John R. W. Stott,『갈라디아서 강해 -자유에 이르는 오직 한길』문인현김경신 공역(서울: 아가페출판사, 1990), 21-22.
그것은 쓸모 없는 죄인들에게 주어진 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죽도록 내어 놓으셨다. 은혜로 그는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은혜로 그는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바울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왔다”(고후 5:18)함은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은혜의 복음을 받았던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제 행위의 복음이라는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 버렸다. 그들, 선동자들은 분명히 유대주의자들로서 그들의 메시지는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행 15:1)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위하여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또한 더하여서,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시작한 것을 모세로 하여금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리스도가 시작한 것을 사람 자신이 완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에 사람의 업적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성취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사람 스스로 완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된 사역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값없이 저어진 은혜의 복음이다.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며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공로의 업적 없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변절이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할속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경험되어진 은혜까지도 져버렸음을 지적하고 있다(갈 3:1-5). 그들은 다른 복음을
‘너희를’, 이는 갈라디아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부르신 이’,는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같이 속히’,이는 갈라디아인들이 다른 복음으로 전락한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를 굳이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떠나’ 부르신 이로부터 분리이탈을 뜻하는 전치사 ‘아포’(π, from)에 해당한다. 바울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을 때의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부터 다른 복음으로 전락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누리는 상태에서 떠났음을 뜻한다.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셨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접했었고, 이 복음을 진리로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이제 이들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변절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에 반기를 든 그의 적대자들의 선동 내용을 ‘다른 복음’이라 지칭했다. Ibid., 101.
여기서 ‘다른’이란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어떻게 규명되느냐에 따라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서신의 목적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다른’이라는 형용사는 어떤 특정한 사물, 사실, 인물 이외의 제2 또는 제3의 다른 사물이나 인물을 단순히 개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또는 사물, 사실, 인물과 성질, 특성이 다른 제2 또는 제3의 다른 사물이나 인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헤테론 유앙겔리온’(τερον εαγγλιον;다른 복음)에서 ‘헤테로스’(τερο; 다른)이라는 말은 희랍어에서 두 선택의 가능성 중 다른 하나를 가리키나 헬라화 된 희랍어에서는 그런 분명한 구별이 희미해진다. R. A. Cole,『갈라디아서』김효성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0), 41.
본문에서 사용한 ‘다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간에 주석상 논란이 되어 왔으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이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7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음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무리들을 말하는 점으로 볼 때, 자신이 전파한 복음과 유사한 종류의 ‘다른’ 복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며 그 외의 복음이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복음’에로 전락했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다른 정의를 수용했다거나 다른 종류의 구원의 상태에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비록 명칭상으로는 ‘다른 복음’이라 일컬어졌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복음’과 정반대 되는 상태, 즉 실질적으로 완전히 비복음적인 상태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갈라디아서-복음을 위한 투쟁,”「기독교사상」1988년 360호, 240.
일부 주석가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실제로 본질상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복음을 향해 돌이킨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말하나 William Hendrikson,『갈라디아서』김경신 역(서울: 아가페출판사, 1981), 62.
바울이 결단코 ‘다른 복음’을 정당한 의미에서 ‘또 하나의 복음’으로 사용하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이 문제는 계속해서 심도 있게 다루어 질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의 사역 중 최우선의 이슈였다. 행 21:20-21에서도 드러남과 같이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 하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으나 율법에 열심 있는 자(20절)들의 오해와 커다란 핍박을 그의 평생에 감수해야 하였다.
7절에서의 ‘다른 복음’ 자체의 부정은 그의 입장의 단호함을 명확히 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편지의 첫머리에서 전제한 점과 1:12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함을 천명함으로써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참 복음임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나무라는 것은 이상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변절자이며 영적 이탈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헤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다른 복음을 붙잡고 있었다. 참된 복음은 본질상 바울이 사도행전 20: 24에서 말 한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John R. W. Stott,『갈라디아서 강해 -자유에 이르는 오직 한길』문인현김경신 공역(서울: 아가페출판사, 1990), 21-22.
그것은 쓸모 없는 죄인들에게 주어진 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죽도록 내어 놓으셨다. 은혜로 그는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은혜로 그는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바울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왔다”(고후 5:18)함은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은혜의 복음을 받았던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제 행위의 복음이라는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 버렸다. 그들, 선동자들은 분명히 유대주의자들로서 그들의 메시지는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행 15:1)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위하여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또한 더하여서,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시작한 것을 모세로 하여금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리스도가 시작한 것을 사람 자신이 완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에 사람의 업적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성취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사람 스스로 완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된 사역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값없이 저어진 은혜의 복음이다.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며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공로의 업적 없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변절이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할속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경험되어진 은혜까지도 져버렸음을 지적하고 있다(갈 3:1-5). 그들은 다른 복음을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