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 황진이의 생애
(2) 황진이의 문화적 유산
가. 자연사랑과 정한
나. 예술로 승화된 여심
(3) 황진이의 뛰어난 문학성
(4) 황진이의 문학사적 위치
3. 결론
보충자료 : 여류시조와 기녀시조에 대하여
본론
(1) 황진이의 생애
(2) 황진이의 문화적 유산
가. 자연사랑과 정한
나. 예술로 승화된 여심
(3) 황진이의 뛰어난 문학성
(4) 황진이의 문학사적 위치
3. 결론
보충자료 : 여류시조와 기녀시조에 대하여
본문내용
神話的) 조명까지 받아왔는가? 그 원리는 간단하다. 당시, 사랑을 할 수 있는 장(場)은 기방(妓房)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정신적인 세계에 머물지 않고 육감적(肉感的)인 한에 있어서는 그녀의 미모와 지성은 그런 전설을 불러일으킨 진원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그런 것을 초월 해서 전국민의 애인이 되었는데, 그 한몫을 진이의 전설을 부연한 문인과 소설가에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같은 심정이었던지, 진이를 에워싼 인물로 야사(野史)에 전하는 것만, 철학자 서경덕(徐敬德), 재상 송순(宋純), 진이와 동거했다는 종실(宗室),이언방(李彦邦), 재상 소세양(蘇世讓)등이 있고, 망신한 이로 지족선사( 知足禪師)가 있고, 진이의 사적을 기록한 이로서도 허균(許筠)과 이덕형(李德炯), 유몽인(柳夢寅)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호( 白湖) 임제(林梯)는 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치제(致祭)했다 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을 당한 것도 특기할 만 하다.
가. 지족선사와의 일화
지족 선사는 송도 근교 깊은 산 속 암자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도해온 스님이었다. 송도 사람들은 그를 생불이라고 존경하였다. 그래서 진이는 지족 선사를 택했다. 하얗게 소복한 채 지족선사를 찾아갔다. \"뜻하는 바가 있어 불제자가 될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청상과부인데 지족선사 스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슬픈 표정으로 애원하였다. 깊은 산 속 속세와 절연하고 살아온 스님은 난데없는 미녀의 출연에 당황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자신의 수양부족을 탓하며 \'나무아미 타불 관세음 보살\'을 되뇌이며 열심히 불도만을 닦았다. 풍경소리도 그치고 밤은 깊어갔다. 이젠 할 말이 없었다. 진이의 몸가짐만이 등불 아래서 고요히 흔들릴 뿐이였다. 지족 선사는 자신과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착 달라붙은 비에 젖은 홍시같은 살결을 훔쳐보며 선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요염한 교태 앞에 그만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30년 면벽도 하루아침에 공염불이 된 것이였다. 열반의 세계에 귀의하려던 지족선사는 오욕이 끊는 육체의 야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목적을 달성한 진이는 암자를 빠져나왔다. 지족선사는 법복도 염주도 버리고 황진이를 찾아 헤매었다. 송도 거리의 반광인,반걸인이 되고 만 것이였다. 그의 생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식소록,조야휘언(識小錄,朝野彙言)에서 황진이가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망치게 한 것도 나 때문이었다\"라고 후회하고 있다. 인간의 약점을 찌른 애닯은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나. 서경덕과의 일화
서경덕은 당시 도학군자로서 학덕과 인격이 널리 알려진 위인이었는데 황진이의 농락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느날 화단정사에 놀러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황진이가 별안간 복통을 일으켜 신음하기 시작했다. 서경덕은 한 채밖에 없는 이불을 펴주었다. 자기는 늦도록 책을 읽었다. 꾀병을 앓으면서도 연방 서경덕의 통태를 살폈으나 일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서경덕은 웃목에 조그마한 포대기를 얌전히 개켜놓고 단정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제의 자세 그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황진이는 자기의 부질없는 연극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선생님 송도에는 삼절이 있다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서경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첫째는 박연폭포요,둘째는 선생님이시고 셋째는 진이입니다.\" \" 이 비록 아름다운 선학(善謔)이나 또한 진지이니라.\" 서경덕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서화담은 성종 20년(1489)에 나서 명종 1년(1546)까지 산 당대의 석학이였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에만 전념하였다. 황진이도 서화담에게 글을 배우러 오는 문하생이었다. 진랑이 오는 날이 뜸해졌다. 밤은 깊고 주위는 적막한데 우수수 낙엽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는가싶어 영창을 열고 기울여보았으나 주위는 더욱 적막하기만 하였다. 다시금 영창을 닫았다. 불을 껐다. 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정신은 자꾸만 맑아졌다. 기다려도 진이는 오지 않았다. 서화담은 초연히 앉아 어둠 속에서 이렇게 노래를 읊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귄가 하노라 진랑인들 스승의 인자한 모습, 부드러운 음성을 보고 듣고 싶지 않았겠는가? 진이는 문 밖에 와있었다. 자신의 사무치는 마음을 화담 스승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 속 깊이 깔려있던 그 동안의 오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참을 추스렸다.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님을 속여 월침 삼경에도 올 뜻이 전혀없는가 하고 탄식하고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도 절절할 수 있을까?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였다. 님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님은 올 생각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님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서경덕의 황진이에 대한 연정과 황진이의 서경덕에 대한 연정은 마음 속에다 깊이 간직해두었던 것이었다. 잎지는 소리는 서경덕에게는 환청으로 들려왔고, 진이에게는 낸들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였다. 자연의 이치를 서로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화담의 죽음을 진이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명월은 자기 자신을 청산에 비기고 서경덕을 녹수에 비겼다. 녹수는 없고 청산만 남은 것이었다. 물 없는 청산이다.이 무슨 허무한 인생이란 말인가. 이렇게 인생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꼭 이 서화담의 죽음을 한탄하여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청춘 시절에 흠모했던 인물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생 무상을 노래한 것이리라.
다. 벽계수와의 일화
종실 벽계수라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부른 황진이의 시조 한 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종실 벽계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한번 진랑이를 보면 빠져버리나 나는 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가. 지족선사와의 일화
지족 선사는 송도 근교 깊은 산 속 암자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도해온 스님이었다. 송도 사람들은 그를 생불이라고 존경하였다. 그래서 진이는 지족 선사를 택했다. 하얗게 소복한 채 지족선사를 찾아갔다. \"뜻하는 바가 있어 불제자가 될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청상과부인데 지족선사 스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슬픈 표정으로 애원하였다. 깊은 산 속 속세와 절연하고 살아온 스님은 난데없는 미녀의 출연에 당황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자신의 수양부족을 탓하며 \'나무아미 타불 관세음 보살\'을 되뇌이며 열심히 불도만을 닦았다. 풍경소리도 그치고 밤은 깊어갔다. 이젠 할 말이 없었다. 진이의 몸가짐만이 등불 아래서 고요히 흔들릴 뿐이였다. 지족 선사는 자신과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착 달라붙은 비에 젖은 홍시같은 살결을 훔쳐보며 선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요염한 교태 앞에 그만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30년 면벽도 하루아침에 공염불이 된 것이였다. 열반의 세계에 귀의하려던 지족선사는 오욕이 끊는 육체의 야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목적을 달성한 진이는 암자를 빠져나왔다. 지족선사는 법복도 염주도 버리고 황진이를 찾아 헤매었다. 송도 거리의 반광인,반걸인이 되고 만 것이였다. 그의 생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식소록,조야휘언(識小錄,朝野彙言)에서 황진이가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망치게 한 것도 나 때문이었다\"라고 후회하고 있다. 인간의 약점을 찌른 애닯은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나. 서경덕과의 일화
서경덕은 당시 도학군자로서 학덕과 인격이 널리 알려진 위인이었는데 황진이의 농락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느날 화단정사에 놀러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황진이가 별안간 복통을 일으켜 신음하기 시작했다. 서경덕은 한 채밖에 없는 이불을 펴주었다. 자기는 늦도록 책을 읽었다. 꾀병을 앓으면서도 연방 서경덕의 통태를 살폈으나 일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서경덕은 웃목에 조그마한 포대기를 얌전히 개켜놓고 단정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제의 자세 그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황진이는 자기의 부질없는 연극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선생님 송도에는 삼절이 있다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서경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첫째는 박연폭포요,둘째는 선생님이시고 셋째는 진이입니다.\" \" 이 비록 아름다운 선학(善謔)이나 또한 진지이니라.\" 서경덕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서화담은 성종 20년(1489)에 나서 명종 1년(1546)까지 산 당대의 석학이였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에만 전념하였다. 황진이도 서화담에게 글을 배우러 오는 문하생이었다. 진랑이 오는 날이 뜸해졌다. 밤은 깊고 주위는 적막한데 우수수 낙엽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는가싶어 영창을 열고 기울여보았으나 주위는 더욱 적막하기만 하였다. 다시금 영창을 닫았다. 불을 껐다. 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정신은 자꾸만 맑아졌다. 기다려도 진이는 오지 않았다. 서화담은 초연히 앉아 어둠 속에서 이렇게 노래를 읊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귄가 하노라 진랑인들 스승의 인자한 모습, 부드러운 음성을 보고 듣고 싶지 않았겠는가? 진이는 문 밖에 와있었다. 자신의 사무치는 마음을 화담 스승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 속 깊이 깔려있던 그 동안의 오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참을 추스렸다.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님을 속여 월침 삼경에도 올 뜻이 전혀없는가 하고 탄식하고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도 절절할 수 있을까?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였다. 님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님은 올 생각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님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서경덕의 황진이에 대한 연정과 황진이의 서경덕에 대한 연정은 마음 속에다 깊이 간직해두었던 것이었다. 잎지는 소리는 서경덕에게는 환청으로 들려왔고, 진이에게는 낸들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였다. 자연의 이치를 서로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화담의 죽음을 진이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명월은 자기 자신을 청산에 비기고 서경덕을 녹수에 비겼다. 녹수는 없고 청산만 남은 것이었다. 물 없는 청산이다.이 무슨 허무한 인생이란 말인가. 이렇게 인생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꼭 이 서화담의 죽음을 한탄하여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청춘 시절에 흠모했던 인물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생 무상을 노래한 것이리라.
다. 벽계수와의 일화
종실 벽계수라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부른 황진이의 시조 한 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종실 벽계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한번 진랑이를 보면 빠져버리나 나는 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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